내 인생의 마라톤
글 | 유세준_GS칼텍스 HCR2팀 주임
어느 순간 살아오면서 닥치는 일, 예를 들어 때 되면 학교에 가고 군대에 가고 결혼하는 등 당면한 과제의 처리(?)에만 급급했지 스스로 계획하고 실행하여 얻은 것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자녀나 타인들이 “인생에서 자랑할만한 것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했을 때 답을 못하고 망설이는 내 자신을 보게 되었다.
이제는 나에게 소중한 계획을 세워봐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아무나 쉽게 할 수 없으며 스스로도 자부심을 느끼고 타인들도 인정하는 것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이후 여러 가지 도전과제들을 갖고 실패를 거듭하다가 우연히 국내마스터즈 마라톤대회 중계를 보게 되었다. 방송을 통해 선수들의 일그러진 얼굴, 그 뒤에 오는 환희의 모습을 보며 무엇이 저들을 그렇게 달리게 만드는지 나도 한번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가 2003년 6월, 나의 마라톤 인생이 시작되었다.
마라톤을 하면서 정직한 운동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자기가 노력한 만큼의 성과, 즉 기록이나 원만한 레이스가 나오기 때문이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지만 마라톤은 준비기간이 많이 걸릴뿐더러 꾸준히 지속적으로 해야만 되는 운동이다. 그런 면에서 마라톤은 인생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작은 요행에 따라 금방 잘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길게 봤을 때 삶은 정직하다라는 것이다.
어떤 취미든 필요에 의해서 선택했더라도 즐겁지 않으면 낙제점인 것 같다. 마라톤을 하면서 스케줄에 맞춰서 무조건 열심히 했더니 크고 작은 부상을 입기도 했고 기록도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았다. 이영표 선수가 그랬던가? “즐기면서 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나도 그렇다. 물론 한없이 나태해질 필요는 없으나 내가 즐겁게 할 수 있는 시간을 선택해 즐겁게 하는 것, 내가 생각하는 마라톤의 첫 번째 조건이다.
물론 마라톤을 할 때는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있었다. 2004년 3월 서울 동아마라톤, 사타구니가 쓸려 속옷이 피로 젖을 정도로 쓰라린 고통 속에 완주하기도 했고, 2005년 9월 공주대회에서는 탈진상태에, 지난 2008년 5월 보성대회에서는 배탈이 난 상태에서 포기의 유혹이 밀려왔다. 하지만 심한 고통도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는 데서 오는 희열과는 비교할 바가 못 된다. 마라톤을 하는 과정 곳곳에도 즐거움은 도사리고 있다. 나를 스치는 바람, 머리에 떠오르는 사색들, 건강한 몸을 움직이는 데에서 느끼는 뿌듯함이 나의 친구가 되어준다.
마라톤을 하면서 좋은 점의 첫 번째는 당연히 건강! 육체적인 것은 물론이고 정신건강에도 아주 좋다. 몸이 피곤하면 만사가 귀찮고 짜증이 난다. 컨디션이 좋으면 그 반대가 아니겠는가? 마라톤으로 체력을 키우니 업무도 새삼 삶의 의욕이 솟아나기도 한다.
특히 시간관리와 식사조절도 되어 절제되고 규칙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 또한 훈련과 대회에서 참고 이겨내는 끈기와 열정이 생활에 접목되어 긍정적인 자세가 된다. 나는 생활 속에서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마음 속으로 외친다. ‘마라톤의 그 힘든 순간도 넘겼는데 이까짓 쯤이야!’
여기서 끝이 아니다. 대회에 참가하고 사내외 클럽활동을 하면서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를 할 수 있어 좋고 전국의 여러 대회에 참가하면서 여행도 할 수 있는 것이 큰 즐거움 중 하나다. 나는 1년에 풀코스는 10번 이상, 하프와 10km를 합해 10번 정도 참가한다.
게다가 마라톤은 필요한 장비가 적어서 더욱 좋은 운동이다. 쿠션 좋은 운동화와 간단한 운동복, 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언제 어디서라도 마라톤을 시작할 수 있다.
다만 어려운 점이 있다면 교대근무를 하는 특성상 대회의 컨디션을 잡기가 쉽지 않다는 것과 휴가를 마라톤에 사용하다 보니 간혹 가족에게 미안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는 가족에게도 적극 권장해 함께 달려볼까 한다.
마라톤의 첫 도전은 지난 2002년 4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프마라톤에 첫 출전했는데 그동안 준비를 많이 했다고는 하지만 생각보다 무척 힘들었다. 15km부터는 힘겹게 걸으면서 “다시는 마라톤을 하나 봐라!” 이를 갈았던 생각이 난다. 하지만 그래도 완주했고 매번 그러한 과정을 거치지만 그 후에도 쭈욱 마라톤을 하고 있다.
이후 2005년 김제대회에 참가해 마지막 2km 정도의 피말리는 레이스 끝에 2초 차이로 2위로 골인했다. 다음 번에는 꼭 1위를 해보리라 다짐하며 연습에 매진한 결과 2006년 풀코스에서는 처음으로 우승의 트로피를 품에 안을 수 있었다.
그리고 2007년 말, 후쿠오카 국제 마라톤 대회에 참여했던 일이 기억에 남는다. 그 해 유난히도 강한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12월의 어느 날, 스텝들과 다른 참가선수들과 후쿠오카행 비행기에 올랐다. 사실 여름의 과도한 훈련 탓인지 하반기 들어 떨어진 페이스가 회복되지 않았기에 컷오프 탈락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래도 마음을 가다듬고 대회 당일, 초반에 절대로 무리하지 말자고 마음속으로 몇 번을 다짐했기에 흐름대로 천천히 따라가려 했는데 자꾸 추월을 당하면서 이대로 가다가는 첫 5km 관문에서 탈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페이스를 올려 요리조리 피해가며 초반 나를 추월해간 선수들에 복수를 시작했다. 5km 통과지점에서 말로만 듣던 제한시간에 도달 못한 선수들을 무참히(?) 낚아챌 심판관을 보며 시계를 보니 18'39", 하마터면 일본까지 와서 5km 겨우 달리고 잘릴 뻔 했다는 생각에 지금도 아찔하다.
난관은 수차례 있었다. 숨이 차오르고 왼무릎과 대퇴에 통증이 와서 그만 멈추고 싶기도 했고, 차가운 겨울바람이 앞길을 막고 일본의 선수가 방해전을 펼쳐 축구의 한일전을 치르는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다가 많은 일본 사람들 속에서 터져나온 “대한민국 화이팅!” 응원에 가슴이 뭉클해졌던 기분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이날 참가한 동료 전원이 좋은 기록으로 완주하는 기쁨을 누렸다. 달리는 내내 적극적인 협조와 열렬히 응원을 해주는 후쿠오카 시민들을 보며, 작은 것 하나하나까지 세심하게 준비하는 그들의 치밀함과 목이 터져라 응원해주던 학생들과 아이들의 모습이 참 부러웠다. 그리고 내 앞에, 주위에 달리는 수많은 선수들을 보며 나도 딴에는 비록 지방에서지만 잘 달린다고 생각했던 게 얼마나 우습고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좁은 생각이었는지 알았다. 마라톤을 하면서 이렇게 각종 대회에 참여하는 경험이 얼마나 소중한 지 매번 느낀다.
아이들은 엄마 품에 안기면 편안해 한다. 마라톤도 그렇다. 일정한 보속으로 리듬을 타며 달리다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상념이 사라진다. 주로 혼자 하는 운동이다 보니 달리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데 그간의 일을 정리하고 앞으로의 결심을 다지는 등 삶에 많은 도움이 된다. 혼자만의 싸움, 조용히 혼자서 레이스를 달릴 때면 나의 심장박동 소리가 들려온다. 내가 살아 있음을 정말 진하게 느끼는 순간이다.
마라톤을 할 때면 건강한 신체를 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솟는다. 달리고 싶어도 못 달리는 분들을 생각해서라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나에게 행복한 삶을 선물해준 마라톤이 있어 나는 더욱 풍요로워졌다. 가끔은 여유를 가지고 삶을 뒤돌아 볼 수 있는 마라톤이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