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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온 밀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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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온 밀레
-오르세 미술관전시회-

박희숙_화가(개인전8회), 강릉대학교 강사 역임

지금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오르세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19세기 인상파 미술품을 전시하고 있다. 밀레, 세잔, 마네, 반 고흐, 고갱, 드가, 르누아르, 피사로, 모네 등 인상파 미술을 주도했던 화가들의 작품 70여점이 전시되고 있어 그들의 치열한 예술 혼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위해 세워졌던 오르세 기차역은 파리 한복판에 있는 센 강을 사이에 두고 루브르 박물관과 튈르리 궁전과 마주보고 있는 아름다운 기차역이다. 오르세 미술관이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이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이다. 그래서 다른 이름으로는 인상파 미술관이라는 불려지기도 한다.

인상파란 서울에 작품이 오지는 않았지만 아침 햇살에 빛나는 르아브르 항구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클로드 모네의 <인상-해돋이>라는 작품에서 시작되었다. 지금은 미술사조 중에 가장 인기 있는 인상파 화가들이지만 그 당시 화단에서 인상파는 조롱거리였다.

클로드 모네의 <인상, 해돋이> 작품을 본 비평가 루이 르루아가 ‘르 샤리바리’지에 기고한 기사의 제목을 <인상, 해돋이>에서 따와 ‘인상주의 전시’라고 붙이고 비난을 퍼부었다. 곧 인상주의를 조롱하기 위해 쓰였진 기사가 그들을 대표하는 말로 되었다.

풍경이나 인물들의 순간적인 모습을 포착해서 그린 인상파 화가들의 새로운 화풍은 19세기 당시에 볼 수 없었던 혁신적인 그림들이었다.

오르세 미술관에서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자 프랑스의 자랑인 밀레의 <만종>이다. <만종>은 19세기 최고의 예술로 평가받고 있지만 이 작품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복제되어 작품의 예술성이 제대로 평가받고 있지 못하는 실정이다. 너무 평범한 그림으로 치부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품이 주는 경건함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 많은 화가들이 농부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그렸지만 밀레의 <만종>은 농부들의 모습을 화면 전체에 드러낸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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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프랑수와 밀레의‘만종’

<만종> 은 남자는 모자를 벗고 여자는 두 손을 모은 채 기도하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작품이다. 석양에 물들어 있는 벌판은 전형적인 농촌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화면 오른쪽 여자의 뒤로 아득히 보이는 교회의 종소리에 농부들은 일손을 멈추고 기도하고 있다. 밭 밑에 감자를 캐다 그만 둔 괭이가 남자 옆에 있고 감자를 담아둔 자루가 있는 손수레 그리고 여자의 앞에는 감자를 담아둔 바구니가 보인다. 노동자로서의 남자의 모습과 생활을 책임지고 있는 여자의 모습으로 상징되고 있다. 그 당시 남자와 여자의 역할분담을 확인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화면 중앙에 농부들이 있지만 전체 화면의 분위기와 동떨어지지 않고 어울려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장 프랑수아 밀레<1814~1875>의 <만종>은 그가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그린 작품이다. <만종>은 1857년 여름 미국의 화가 토머스G 애플턴의 의뢰로 제작하게 되었지만 그가 인수하지 않자 여러 사람의 수중을 전전하게 된다. 1889년 경매를 통해 뉴욕에 있는 미국미술연맹이 소장하지만 프랑스인들은 이 작품이 루브르에 소장하기를 바라게 되었다. 그 이후 치열한 분쟁 끝에 루브르 백화점 소유주가 1890년 그 당시 막대한 금액이었던 80만 프랑을 주고 사서 프랑스 정부에 기증함으로서 국제 분쟁을 해결한다
 
이번 전시회에서 가장 특색 있는 작품 중은 모로의 <오르페우스>다. 이 작품은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과는 다르게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오르페우스를 각색해서 표현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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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스타브 모로의‘오르페우스’

▲에두아르 마네의‘피리 부는 소년’

비극적인 그리스 로마 신화 이야기에서 모로는 영감을 얻었다. ‘한 젊은 여인이 헤브로 지방의 트라카아 강가까지 떠내려 온 오르페우스의 머리와 리라를 경건하게 거둔다.’라는 부제로 모로는 이 작품을 제작하게 된다. 전통적인 이야기에서 벗어낫지만 자신이 만들어 낸 새로운 결말을 위해 그는 다양한 방법과 화려한 색채를 사용해 표현했다.

<오르페우스> 이 작품에서 화면 오른쪽 붉은 노을이 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강이 흐르고 있고 그와 대조적으로 화면 왼쪽은 바위로 가려져 있어 분위기를 장엄하게 만들고 있다. 바위 앞에 젊은 여인은 리라와 오르페우스의 머리를 들고 서 있다. 그녀가 입고 있는 화려한 옷과 비극적인 장면과는 어울리지 않으나 모로는 당시에 발간된 고고학이나 문헌에서 찾아 여인의 옷을 장식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또한 모로는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살로메>의 영향을 받아 은쟁반에 세례 요한의 목을 들고 있는 살로메처럼 젊은 여인이 오르페우스의 머리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귀스타브 모로<1826~1898>는 장식적이고 화려한 색채로 파리 공식 화단에서 일찍이 인정을 받았다. 모로는 파리 국립 아카데미에서 교수로 제직하면서 많은 화가들을 양성했다.
마네의 <피리 부는 소년> 이 작품은 미술역사상 가장 큰 스캔들을 일으켰던 그의 <올랭피아> 작품 때문에 그 당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작품이다. <올랭피아> 때문에 살롱전에 출품된 이 작품을 심사위원들은 낙선시키기로 한 것이다.

살롱전에서 거부당한 이 작품을 유일하게 친구였던 소설가 에밀 졸라만이 옹호했다. 그 당시 비평가들로부터 거부당했던 이 작품은 마네의 작품 중에서도 걸작에 속한다. 단 몇 개 안되는 색채만 가지고도 충분하게 음악적 효과가 나타나며 단순한 구도지만 인물이 생생하게 표현되었다.

<피리 부는 소년>는 마네가 스페인 여행에서 본 벨라스케스와 고야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했는데 이 작품에서 소년의 손과 발 부분을 빼고 그림자가 전혀 없다. 인물을 평면적으로 묘사한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모델은 마네의 친구였던 르조슨 사령관이 데려온 황실 친위대 소속의 피리 부는 소년이다. 그는 마네를 위해 군복을 입고 포즈를 취해 주었다. 사실적으로 생생하게 묘사된 소년은 화면 중앙에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다. 공식 초상화의 느낌이 나도록 마네는 배경을 단순화 시켰다. 단순한 배경으로 인해 소년의 실체가 더 느껴지는 작품이다.

에두아르 마네<1832~1883>의 이 작품은 검은색 윤곽선으로 둘러싸여 있는 소년의 모습에서 트럼프 카드를 연상시키지만 그것은 18세기부터 유행하던 채색판화의 영향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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