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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휴가 책과 함께 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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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휴가 책과 함께 떠나요


- 구 본 준 한겨레신문 기자 -

세상 사는 재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철이 바뀔 때마다 제 철 즐길 것을 만나는 일입니다. 음식은 말할 필요도 없겠죠. 계절의 변화를 담은 먹을 거리를 굳이 찾아 즐기는 게 사는 재미를 더해주니까요.
문화도 그렇습니다. 철에 맞춰 즐기는 것이 관례처럼 굳어진 것들이 있습니다. 여름에는 신나는 액션영화를 보고, 겨울에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보는 것처럼, 항상 계절 상품으로 나오는 문화상품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특정 계절에 맞춘 문화상품들이 가장 다양하게 준비되는 철은 역시 여름입니다. 여름이면 신나는 댄스음악이 나오고, 신나게 때려부수는 블록버스터 영화가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야외 음악 공연도 여름에만 즐길 수 있는 행사로 빠뜨릴 수 없지요.
이런 제철 문화상품들은 뻔한 것 같지만 그 철에 즐기는 것이 제 맛입니다. 익숙한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도 사는 재미이고, 이렇게 정해진 것과 거꾸로 시도해보는 것도 재미입니다. 여름에 캐럴을 들어보면 또 어떻겠습니까. 따라 즐겨도, 청개구리처럼 뒤집어도 좋은 게 여름입니다.

책에도 ‘제철 책’들이 있습니다. 이 제철 책들은 특히나 여름에만 나옵니다. 이른바 ‘납량’용 책들입니다. 물론 언제 즐겨도 좋은 책들인데 출판사들은 굳이 여름에 맞춰 책을 펴냅니다. 해마다 되풀이되면서 일종의 관습이 된만큼 여름책을 읽는 것도 여름을 보내는 또다른 방법이 되겠죠. 저무는 여름을 아쉬워하면서 올해 나온 여름책들을 하나 고르는 것도 사는 재미가 아닐까요?
올해 여름책들은 지난해 나온 것들보다 조금 더 재미가 알차졌습니다. 출판시장에서 흔히 ‘장르문학’이라고 꼽는 추리, 스릴러, 공포, 판타지 소설들이 늘어나는 것은 독서시장이 성숙했다는 징표이기도 합니다. 다양한 재미를 추구하는 다양한 독자들이 상존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대중소설들이 오히려 순수소설보다 훨씬 적게 팔리지만 외국에서는 다릅니다. 미국의 경우만보더라도 스티븐 킹이나 마이클 크라이튼, 존 그리샴, 데니스 루헤인 같은 스릴러 작가들이 십수년 넘게 항상 베스트셀러를 휩쓸고 있습니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대중적 스릴러들의 인기가 덜한 편입니다. 그래서 해마다 여름철에만 집중적으로 나오고 있는데, 반갑게도 해마다 그 질과 양이 조금씩 좋아지는 편입니다.

올해 나온 스릴러 가운데에서는 <팔란티어>(김민영 지음, 황금가지 펴냄, 전 3권)란 책을 추천합니다. 이 책은 아쉽게도 신문의 서평란에서 거의 다뤄지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예전에 나왔던 책이 제목을 바꿔 재출간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작 예전에 나왔을 때도 그리 주목받지는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조금 웃기기는 하지만, 이 스릴러가 국내 작가가 쓴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릴러라고 하면 당연히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 정교하고 놀라운 짜임새, 그리고 기발한 상상력이 필수적입니다. 이런 스릴러의 참맛을 느끼게 해주는 작품들은 거의 예외없이 외국 작품들이었습니다. 아니, 국내에서는 도전조차 드물었습니다. 그래서 스릴러라고 하면 당연히 외국것으로 여기기 마련이었고, 이 책처럼 국내 작가가 쓴 것은 당연히 검증되지 않은 책일 것으로 지레 짐작한 독자들이 그리 눈여겨보지 않았던 것이죠.
그런 선입견 때문에 오해받는 바람에 이 소설은 지난 99년 <옥스타칼니스의 아이들>이란 이름으로 나왔을 때 널리 알려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일단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은 열광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단숨에 책을 다 읽게 만드는 흡입력이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당시 크게 유명해지지는 않았어도 뜨거운 호응을 얻었습니다. 이후 이 책은 절판되었는데, 재미에 비해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 것을 아쉬워한 팬들이 계속 재출간을 요구했습니다. 그 결과 올 여름에 <팔란티어-게임중독 살인사건>이란 이름으로 다시 선보인 겁니다.
이 <팔란티어>는 2중 구조의 소설입니다. 백주 대낮에 어떤 미치광이가 칼로 국회의원의 목을 잘라버리는 엽기적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테러 뒤 범인은 수수께끼같은 말만 남긴채 그 자리에서 숨집니다. 컴퓨터 전문가인 주인공은 친구인 형사의 요청을 받고 이 사건 수사를 도와줍니다. 그런데 자신이 즐겨하는 가상현실 게임인 ‘팔란티어’와 이 사건이 연관이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소설은 살인사건이 벌어지는 현실, 그리고 이 사건과 연관이 있어보이는 게임속 가상현실을 오가며 진행됩니다.
보통 이런 종류의 소설들에 대해 기성세대들은 ‘어린 애들이나 젊은 애들만 좋아하는 이야기’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렇지만 이 책은 조금만 이런 장르에 호기심이 있다면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독자를 빨아들이는 힘만큼은 당연 첫손 꼽힙니다. 그래서 한 권 600쪽짜리 세 권이나 되지만, 일단 읽기 시작하면 하루만에도 다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진도가 잘 나갑니다.
잠깐 출판 담당 기자로 귀띔하자면, 책을 고를 때, 특히 소설책은 권수가 많으면 어느 정도 재미가 있다고 보면 맞습니다. 경제학적으로 보자면, 책 가운데 가장 리스크가 많은 책이 바로 소설입니다. 실용서나 인문학 또는 교양책들과 달라서 소설은 정보나 자료로서 가치가 거의 없습니다. 오로지 재미만으로 승부하기 때문에 잘 팔리지 않으면 아예 전혀 안 팔리게 됩니다. 그래서 출판사들은 소설책을 낼 때 가장 위험 부담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책을 내서 안팔리면 가장 손해를 보게 되는 출판사가 몇권짜리 긴 소설을 낸다는 것은 그만큼 재미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다는 뜻입니다. <팔란티어>도 시험해 보시지요.

스릴러의 가장 주요한 장르처럼 굳어진 ‘팩션’ 열풍도 여전합니다. 팩션은 ‘역사적 사실’을 뜻하는 ‘팩트’와 ‘지어낸 이야기’란 뜻의 ‘픽션’을 합친 말입니다. 역사적 사실과 소설이 적절이 배합된 역사추리, 또는 역사스릴러 소설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올해에 나온 팩션 스릴러로는 영국의 여성작가 케이트 모스가 지은 <라비린토스>(해냄 펴냄, 전 2권)가 있습니다. 이 책도 팩션의 단골 소재인 ‘성배 전설’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팩션들과는 아주 다른 점이 하나 있습니다. 이 책을 독특하게 만들어주는 가장 큰 매력이기도 합니다. 이 소설도 <팔란티어>처럼 구조가 2중으로 짜여져있습니다. 고대의 기밀 문서를 둘러싼 암투가 줄거리인데, 13세기와 21세기 두 시대를 각각 무대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그리고 이 두 시대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물론 악역까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역들이 모두 여성입니다. 이게 바로 이 소설의 특징입니다. 그렇다고 긴장감이 떨어져서는 안되겠지요? 기막힌 반전같은 작가와 독자의 두뇌싸움 대신 마치 영화를 보는 듯한 생생한 현장감이 매력입니다. 중세 시대의 전쟁 장면은 무척이나 처절하고, 또 고증에 충실한 편입니다. <다빈치 코드>가 괜찮았던 분들에게 권합니다. 정통 추리소설의 맛을 원하신다면 다른 책이 나을 듯 하네요.

여름철에 어울리는 여름책은 꼭 납량소설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행의 계절, 시원한 사진과 맛깔나는 글로 넓고 넓은 세상을 간접 경험할 수 있는 빼어난 기행문들도 여름에 읽어야 제맛입니다.
올 여름에는 지중해 문명을 잉태한 곳 에게해로 떠나보면 어떨까요? 책으로도 떠날 수 있으니까요. 일본을 대표하는 다큐멘터리 작가이자 저술가인 다치바나 다카시의 책 <에게-영원회귀의 바다>(청어람미디어 펴냄)가 에게해 속으로 독자들을 안내합니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이 책에서 그야말로 해박한 지식과 빼어난 글솜씨로 자연과 풍경이 어떻게 문명과 역사와 이어지는지 풍성한 교양 상식을 풀어내며 한 수 가르쳐줍니다. ‘성(聖)스러운 것은 성(性)스럽다’는 것도 함께 가르쳐주네요. 사진가 스다 신타로의 서정적인 사진들도 다치바나의 글 못지 않은 볼거리입니다. 여행을 통해 다치바나가 깨달은 세계인식과 자기발견을 함께 나눠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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