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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마당] 「어제와 내일이 매력적인 그곳... 중국을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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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와 내일이 매력적인 그곳...

중국을 다녀와서..."

글·한정구 | 현대오일뱅크 대외정책/환경팀


거대한 나라 중국. 그곳은 모택동, 공산당 등 그간 부정적인 이미지를 씻고 1990년대 이후 새롭게 떠오르는 경제 선진국으로서, 우리와 숙명의 라이벌이기에 그들의 현재를 알고 내일을 준비해야 한다는 어떤 사명감도 있었지만 적어도 내게는 달마대사와 소림사가 있는 곳, 오악(五岳)의 산수가 아름다운 곳 그리고 태극권의 창시자 장삼봉 조사가 잠든 곳이라는 매력이 더욱 크게 다가오는 땅이다.

여행을 떠나기 앞서 교과서, 삼국지, 초한지 등 책으로 본 역사 속의 영웅들에 대한 가슴 뭉클한 이미지도, 사상의 격변 속에서 대한민국이라는 이름과 등 돌렸던 우울한 역사의 모습도, 나를 매료시켰던 중국 국영방송의 배우들도 잠시 잊어야만 했다. 혹시라도 나에게 새롭게 배우게 될 중국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편견이라는 이물질이 껴들 틈을 없애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제 어릴 때 즐겨 부르던 이남이의 비행기 가사처럼 난생 처음 비행기를 타고 낯선 땅을 밟아보기 위한 본격적인 준비가 시작되었다. 해외여행이 늘 그렇지만 문제는 언어였다. 아무리 중국인들이 영어를 잘한다고 해도 정말 영어로 그들이 커뮤니케이션 할지는 미지수였다. 그런 걱정들은 중국 여행의 자문을 구했던 태극권 사부님의 한마디로 해결되었다.

“영어 절대로 안통하니 패키지로 가고 마적들을 조심하게!”

사부님의 말씀은 사실이었다. 북경 공항의 공안부터 영어는 통하지 않아 앞으로 일정이 걱정되기는 했지만 든든한 가이드와 아리따운 연변출신 미녀 가이드의 친절한 리드에 여행의 불편함에 대한 걱정은 이미 점점 잊고 있었다.

버스에서 보이는 고층 건물들과 국내에서도 보기 힘든 고급 일제 승용차들. 이는 매체를 통해 보았던 중국의 모습을 충분히 의심하고도 남을 만큼 충격적인 것이었다. 한반도 전체의 50배가 넘는 넓은 땅임을 감안할 때 저들은 우리처럼 집 걱정 없겠구나 생각했건만 북경의 집값이 서울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설명에 또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외국에 나가면 애국자가 된다고 했던가. 치솟는 물가와 부동산 열풍에도 대한민국 만세였다.

원래 북경은 사막 위에 세워진 도시라서 상당히 더운 도시임에도 도착 당일은 다행히 비온 뒤라서 여름임에도 크게 더위를 느끼지 못했다. 다만 날이 다시 회복되어 갈수록 사막의 더위는 한국의 여름과는 다른 숨막힘이 있었고, 황하강의 석회질 때문에 수돗물마저도 우리처럼 함부로 마시지 못하는 그들의 환경 탓에 비싼 생수를 계속해서 구입해야만 했다. 더욱 특이한 것은 물이 귀한 탓에 식당에서도 차는 무료로 무한정 내어주는 반면 생수는 그 자리에서 구입해야만 했다.

천안문과 자금성 등 첫날의 여정을 끝낼 때쯤 일행 중 또래 친구들이 생겼다. 혼자라서 오히려 느낄 것도 많고 볼 것도 많은 장점이 있지만 타지에서 사귄 친구들과 그 기분을 나눈다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 친구들과 일정이 끝나고 호텔에서 밤마다 술 마시던 기억은 조용히 많이 배우고 느끼고 돌아오려던 처음의 의도를 벗어나게 했지만 여행의 소중한 부분으로 남아있다.

사실 애초에 여행의 목적은 소림사 탐방이었다. 대학생들이 가장 가고 싶은 곳은 미주, 유럽 등 선진 문화를 체험하는 그것이겠지만 나에게는 큰 매력이 없었다. 오히려 달마대사의 혼이 숨쉬는 그곳, 거대한 중국 역사가 낳은 수많은 협객들의 전설이 아직도 흐르는 그곳이 내게는 이 땅을 떠나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중국 소림 역사는 남송 시대에 북방민족에 밀려 복건 땅에 남소림이 세워지면서 두 갈래로 나누어지게 되지만 본류인 여전히 숭산에 있는 북소림을 보고싶은 마음에 가까운 북경 프로그램을 신청했다. 그러나 결국 현실적 어려움으로 소림사를 내 눈으로 볼 기회는 가지지 못하였다.

가장 큰 문제는 소림사가 일반인들에게 일년에 두 번 정도만 개방하며 그래서 대부분 여행사가 아닌 일반인들의 민간 여행 조직에 의해 대부분 방문하게 되는 아쉬운 운영상의 그것이었다. 결국 소림사 무술 공연단의 무술시범에 만족해야만 했다. 그리고는 다짐했다. 언젠가 내가 살아 숨쉬는 한 꼭 숭산 아래 살아 숨쉬는 소림의 모습을 보리라.

중국 기행에서 지금도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천단 공원에서의 태극권 시범이었다. 기수련으로서 그 형태가 유사한 파룬궁은 그 세력 확장의 위협으로 중국 정부가 탄압을 하고는 있지만 태극권의 경우 아직 도가의 근본이 강해서 정치적인 세력으로 위협은 되지 않음을 판단한 것일까? 아침 국영 방송에서 태극권의 약식들을 방송해 중국 성인들의 건강을 챙겨주는 모습이 파룬궁과는 사뭇 대조되어 보였다. 천단공원은 중국 명나라때 세워진 것으로 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세워진 곳이다. 199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될 정도로 그 빼어난 모습도 가지고 있지만 더 큰 감동은 그 위세였다. 그 장엄한 위세는 백성들로 하여금 왕을 제사를 지내는 신들과 동일한 위치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한다는 정치적인 의도가 강하다는 가이드의 말에 교과서에서 배운 암기용 텍스트가 아닌 역사의 한 토막 그 무언가를 가슴에 가져갈 수 있었다.

천단공원 아래에는 북경 시민들이 공원 구석구석에서 자신들만의 문화를 즐기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우리의 7,80년대에서 볼 수 있었던, 라디오를 틀어놓고 성인들이 짝을 지워 춤을 추는 모습들이 가장 먼저 다가왔는데, 그 춤사위를 보자면 유사한 듯 하지만 어쩐지 춤바람난 동네 아줌마, 아저씨들이 즐기는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오히려 건강을 위해 삼삼오오 모여 춤을 추는 모습이 어쩌면 비공산권인 우리가 더 편견과 폐쇄의 문화적 시각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

춤판이 벌어지는 곳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서는 아침 국영방송을 보고 태극권을 연마하는 어른들의 모습들이 들어왔다. 나는 주위를 구경하는 일행들과 떨어져서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그들의 태극권은 내가 배운 것과는 유파가 달라서 어느 정도 차이를 보였다. 청나라 시절 양가 태극권의 창시자인 양로선 조사가 그렇게 꿈꾸던 생활 속 태극권의 보급을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좀도둑과 마적을 조심하라는 사부님의 말도 있었지만 여름이라 더울까봐 가져갔었던 태극선을 꺼내들고서 잠시 휴식을 취하던 그들 앞에서 감히 몇 초식을 선보였다.

이상하게 생긴 타국 청년이 갑자기 나타나 태극선을 휘두를 때 그들이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는 모르지만 마지막 동작이 끝났을 때 그들은 나에게 박수와 악수를 건네었다. 그때 느낌은 마치 태권도 종주국인 한국 선수를 타국 선수가 이긴 느낌 이랄까. 지금 생각하면 당시의 행동이 철없게 느껴져 부끄럽기도 하지만 마치 태극권 종주국인 그들을 한국의 아마추어가 눌렀다는 자부심이 강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때 결심했다. 만약 다음에 다시 이곳을 오게 된다면 그때는 더욱 고급스런 모습을 보여주리라고 말이다.

다음 여정은 만리장성이었다. 지상의 건축물 가운데 위성사진에서도 유일하게 그 모습이 보인다는 만리장성. 만리장성의 위용은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이지만 사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만리장성이 아니라 그 아래 풍경이었다. 만리장성으로 가는 대중교통 수단은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빵차’였다. 왜 빵차일까 지금 생각해봐도 알 수는 없지만 정말 웃긴 자동차 였다. 국산 다마스 혹은 그 유사한 중고차량들을 싸게 수입해서 뒷좌석 다 뜯어내고 이름 그대로 뼈대만 남은 자동차들이 만리장성 입구에서 출입문까지 거의 100km로 달리는 진풍경들을 볼 수 있었다. 위험한지도 모르고 신기한 듯 재미있는 듯 즐겼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위험한 선택이었다.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곳은 소계림(小桂林)이라 불리우며 장엄한 협곡을 자랑하는 용경협이었다. 개인적으로 중국 드라마를 즐겨보는데, 특히 소오강호(笑傲江湖)를 통해 보았던 중국의 산수와 협곡의 그것은 나를 중국이라는 땅에 발을 붙이게 만든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러나 용경협의 그것은 그 기대 이상의 감동을 나에게 남겨주었다. 벼랑 사이사이에 남겨진 용이 할퀴고 지나간 것 같은 자국들과 자연이 만들어낸 절묘한 경관들은 배가 흘러가는 흐름들이 만들어 낸 작은 파도의 흔적들이 내 바지를 적셔도 아랑곳 하지 않을 만큼 내 시선을 그리고 내 마음을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기억의 길이는 짧지만 감동의 길이는 길었다. 여정을 끝내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도 그 느낌은 잊혀지지 않았다. 언젠가 다시 이 땅을 밟게 되면 그때는 계림(桂林)을 바라보며 더 큰 감동을 얻어가리라 다짐했다.

아침 10시에 인천공항에서 출발하여 북경공항에 내렸는데도 다시 10시일 때 마치 1시간의 시간을 인생에서 벌어가는 것 같은 느낌에 좋았는데, 돌아오는 날은 오히려 반대의 경험을 하게 되었다. 긴 여정이 가져온 피로에 쓰러질 듯 했지만 이상하게도 눈 앞에 그려지는 여정이 남겨준 기억과 함께 언젠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시작될 나의 여행에 대한 청사진도 함께 그리고 있었기에 이성은 가장 강하게 빛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그때의 기억을 다시 그려본다. 다시 시작될 기억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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