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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토크] 석유가 영화를 만났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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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

영화를 만났을 때

글·이상민 | 문화칼럼니스트


영화와 석유는 그리 친하지는 않다. 그래도 가끔 석유가 나오는 영화가 나온다. 반면 석유를 다루는 영화는 확인해보지는 못했지만 없는 것 같다. 석유란 무엇이며 석유를 개발하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의 드라마를 감동적으로 그린 영화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대신 석유를 둘러싼 숨가쁜 음모나, 석유를 지배하려는 야욕을 지닌 악당을 물리치는 액션영화가 가끔 나온다.

석유가 영화에 등장할 때에는 예외없이 엄청난 이권을 상징한다. 그건 당연하다. 자본주의의 역사는 잉크가 아니라 석유로 쓰여졌다. 산업사회의 혈관에는 석유가 흐른다. 그래서 석유를 지배하는 자가 곧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고, 석유를 지배하기 위해 세계 열강들은 치열한 전쟁을 벌여왔다. 영화는 이런 현실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면 지금 ‘석유를 지배하는 세력’은 누구인가. 얼핏 산유국들 같지만, 진짜 지배자가 뒤에 있다. 바로 미국이다. 미국은 석유를 직접 생산하는 중동의 여러나라들과 짬짜미해서 석유지배권을 유지하고 있다. 산유국의 정치권과 미국의 정치권이 서로 파트너가 되어 미국은 손쉽게 석유를 얻고, 산유국 지도자들은 지위를 보장받는 그런 식이란 이야기다. 물론 이 과정에서 미국은 많은 무리수를 두기도 하고, 또 부도덕한 일을 저지르기도 한다.

이런 치부는 자주 드러나지는 않는데, 아주 간혹 외부로 알려지기도 한다. 이 드라마들의 주연은 주로 미국 CIA다. 미국과 산유국의 밀약을 깨려는 시도를 사실상 ‘테러’로 막고, 부도덕한 정치인들을 보호하는 것 등이 CIA가 석유를 지키기 위해 써먹는 레퍼토리다.

이처럼 우리가 생활속에서 거의 공기처럼 사용하고 있는 석유란 물건의 뒤편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석유가 만들어내는 요지경 세상을 가감없이 들여다보는 영화가 나왔다. 전직 CIA 요원이쓴 책을 원작으로 해서 만든 영화 <시리아나>다.
3월31일 개봉한 이 영화는 CIA요원으로 나온 조지 클루니가 올해 아카데미상에서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면서 영화의 무게를 더했다. 앞서 말했듯 ‘석유가 나오는 영화’는 많았지만 ‘석유를 다루는 영화’는 사실상 전무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본격적으로 석유문제를 들여다보는 거의 첫 번째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영화를 고를 때 우선 출연자, 그리고 감독을 따진다면 일단 이 영화는 이름면에서 무척이나 화려하다. 먼저 배우들을 살펴보자.
조지 클루니. 미국 최고의 미남배우로 손꼽히는데다 영화제작자이자 작가, 감독으로도 활동하는 만능 재주꾼이다. 단순히 인기스타가 아니라 의식있는 영화인으로 점점 더 거물이 되어가고 있다.

다음 맷 데이먼. 1998년 <굿 윌 헌팅>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고, 1999년 <리플리>에서도 뛰어난 연기력을 보여줬다. 그가 나온 영화들만 꼽아봐도 <라이언 일병구하기> <오션스 트웰브> <도그마>, 그리고 최근의 <그림형제>까지. 액션첩보영화팬들이라면 무엇보다도 <본 아이덴티티>와 그 속편인 <본 슈프리머시>이 맷 데이먼의 대표작으로 꼽을 것이다.

중년 영화팬들이라면 ‘아, 그 배우’하고 떠올릴 윌리엄 허트도 나온다. <브로드캐스트 뉴스>와 <작은 신의 아이들>, <다크 시티>와 <제인 에어> 그리고 <닥터> 등등 수많은 영화에서 연기파 배우로 이름날린 이다. <거미여인의 키스>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과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동시에 제패한 화려한 이력을 지녔다.

그러나 배우보다도 영화를 좌우하는 것은 역시 감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더욱 그렇다. 소재와 주제, 그리고 연출 등 모든 면에서 <시리아나>는 배우의 영화가 아니라 철저하게 감독의 영화다.

<시리아나>의 감독은 스티븐 개건이다. 영화팬들이 아니라면 친숙하지 않은 이름이겠지만 영화팬들에게는 영화 <트래픽>으로 확실한 인상을 남긴 인물이다. 개건이 각본을 쓴 영화 <트래픽>(감독은 스티븐 소더버그)는 2000년 그해 최고의 영화로 각종 상을 휩쓸었다. 이후 <룰스 오브 인게이지먼트> 등의 영화 시나리오를 쓰면서 헐리웃 최고의 이야기꾼으로 인정받고 있다.
개건의 특징은 권력의 추악함, 세상을 지배하는 음모에 집요하게 파고드는 점이다. 마약거래를 다룬 <트래픽>에서도 그랬고, 자신이 직접 감독한 이 영화 <시리아나>에서는 더욱 그런 집요함을 보여준다.
스타일이 그렇다보니 <시리아나>는 <트래픽>처럼 선이 굵은 전형적인 남성영화가 됐다. 감미로운 장면도, 멋진 음악도 없다. 액션은 있으나 광고장면처럼 현란하지 않다. 거칠고 투박하지만 원초적인 힘을 그대로 간직한‘날 것’의 힘을 담는 데 주력하면서 영화가 고발하는 사회적 메시지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 요즘 영화들에 빠짐없이 나오는 컴퓨터 그래픽이나 낭만, 우정, 진한 페이소스같은 것을 일체 거부하고 석유산업을 둘러싼 음모의 본질에 바로 돌격한다.
그래서 미남 스타 조지 클루니가 나왔다고 해서 잘생기고 멋진 중년 남성일 것이란 기대는 하지 않아야 한다. 이 영화에서 CIA의 중동 요원으로 나오는 조지 클루니는 캐릭터에 맞춰 몸무게를 14킬로그램이나 늘려서 중년 첩보원으로 실감나는 연기를 보여준다. 잘 생긴 얼굴도 중동지역 첩보원답게 덥수룩한 수염으로 덮여 우리가 아는 조지 클루니가 맞는지 처음에는 당황스러울 정도다. 영화는 석유와 직간접적인 관련이 있는 네 사람의 이야기를 엮어 석유문제를 들여다본다. 조지 클루니가 분한 씨아이에이 요원, 파키스탄 이민노동자, 석유업체들의 의뢰를 맡은 변호사, 산유국 왕자의 경제자문관 등 서로 다른 네 명의 이야기를 통해 석유룰 둘러싼 정치적 음모와 배신, 권력의 부패를 적나라하게 끄집어낸다.

<시리아나>는 이야기가 워낙 생생해 오히려 거북스러울 정도다. 메시지는 명쾌하고 단호하다. 바로 “세계는 음모로 움직인다”는 경고다. 영화 제목인 ‘시리아나’는 그런 함축적 의미를 담은 말이다. ‘시리아나’(syriana)란 미국의 씽크탱크들이 중동지역을 자국의 이익에 따라 분할해 지칭하는 용어라고 한다. 석유를 지배하는 이들이‘시리아나’란 개념처럼 세상을 자기 생각대로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망상이라고 영화는 고발하고 있다.
그러면 ‘석유가 나오는 영화’들은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
영화 <자이언트>(1956)는 석유가 등장하는 대표적인 영화다. 20세기 최고 스타 가운데 한 명인 제임스 딘이 이 영화를 찍은 뒤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 ‘제임스 딘의 유작’으로도 유명한 이 영화는 미국 텍사스를 무대로 유전개발로 대박을 터뜨리던 시절을 무대로 한다. 그러나 석유는 주요한 소재로 쓰이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줄거리의 중심축은 세 주연의 은근한 삼각관계였다.

007 시리즈의19탄 <007 언리미티드>(1999)는 석유를 둘러싼 음모를 제임스 본드가 막는다는 줄거리다. 석유재벌의 딸 소피 마르소가 석유송유관을 독점하려는 음모를 꾸며 아버지까지 죽이고 이스탄불을 폭발시켜 석유이동통로를 차단해 자신이 석유수송을 지배하려고 한다. 송유관이나 유전 모습이 등장하지만, 어디까지나 줄거리 구색 맞추기에 지나지 않는 전형적인 007 영화다. 007 시리즈에서 사상 처음으로 007이 여성 악역을 죽이는 장면이 등장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런 점에 비춰볼 때 <시리아나>는 진정한 ‘석유영화’다. 주제도, 소재도, 그리고 진짜 배경도 모두 ‘석유’라는 검은 황금에 집중되어 있다. 주제는 묵직하고, 이야기는 생생하다. 그러나 양념이나 잔재미가 전혀 없어 템포가 빠르고 현란한 요즘 영화에 익숙한 이들은 다소 지루할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이 영화가 너무나 당연하지만 ‘미국’ 영화라는 점이다. 양심적인 미국 영화인의 입장에서 자기 나라의 치부를 드러내는 영화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다소 동떨어진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우리 역시 미국이 만들어놓은 석유배급 체제의 하위구조란 점을 잊고 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리아나>는 보는 이로서 씁쓸해질 수 밖에 없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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