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여름의 추억
글·이아영 | 대한석유협회 행정부담당 사원
“월드컵이 이제 7개월여 남짓 남았습니다. 2006년 여름 독일의 경기장 곳곳에서 터지는 붉은 악마들의 응원 소리가 벌써 기대되는군요…”
“세르비아 몬테그로와의 경기에서 2대0으로 시원하게 이긴 것을 보면서 2002년 4강의 설레임을 다시 한번 꿈꿔 볼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요”
“그럼 어제 경기 하이라이트 다시 한번 보실까요?”
11월 18일 저녁 7시 30분경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에서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지하철의 흔들림에 몸을 맡긴 채 꾸벅꾸벅 꿈까지 꾸고 있었다. 눈 덮인 산에서 토끼를 쫓는 꿈을 꾸다가 갑자기 장면이 반전되면서 꿈속에서 어렴풋이 월드컵 소식을 전하는 뉴스 앵커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꿈속에서 듣던 뉴스 앵커 목소리가 지하철 TV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지하철의 TV를 보고 있었고, 스포츠 아나운서의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졸음에서 막 헤어난 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2002년 여름의 월드컵의 기억으로 되감기 되고 있었다.
#1.
2002년 6월, 나는 영국에서 피쉬앤칩스(한국의 떡볶이 정도 급 되는 영국 음식)에 서서히 질려가고 있던 4개월 차 유학생이었다. 그리고 기적이라 불렸던 이탈리아 전, 나는 친구들과 ‘Be the Red ‘티셔츠를 자랑스럽게 입고 트라팔가 광장으로 향했다. 이탈리아 선수들의 말도 안 되는 경기 매너에 분개하고 한 골 득점에 알지도 못하는 옆 사람들과 얼싸안고 정신 나간 듯이 환호성을 지르던 사이 이탈리아 전은 우리의 승리로 끝났다. 4강 진출이 확정되는 순간 우리는 서로 약속한 듯이 거리로 뛰쳐나가 기차 놀이를 하기 시작했다. 모두들 “한국이 4강 진출했습니다” 라고 외치면서 승전을 알렸다. 지나가던 사람들 몇몇은 가던 길을 잊고 함께 “코리아”를 외치면서 행렬에 동참했고, 조금 터프하긴 했지만 멋진 경기였다고 거듭 이야기 하고 엄지를 치켜들면서 ‘KOREA’를 외치는 사람도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한국이 멋진 플레이를 했다고 진정으로 생각했다기 보다 이탈리아를 이겨준 것에 고마웠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말이다.
#2.
학교가 일찍 끝난 한가한 오후 어느 날 홈스테이 할머니와 TV를 보던 도중 BBC방송에서 갑자기 남대문 시장과 종로 거리 그리고 강남의 빌딩들을 담은 영상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반가움과 뿌듯함으로 나는 저 사진이 바로 한국이라면서 홈스테이 할머니에게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이어 한국의 경제성장 과정과 지정학적 위치 등이 자세히 보도되기 시작하자 나는 너무 들떠 자리에 제대로 앉아있을 수 조차 없었다. 사실 그 동안 영국사람들이 한국에 대해 너무 관심 없다는 것에 서러웠던 터였다. 서점을 가도 중국, 일본에 관한 여행 책자나 사전은 빼곡한데, 한국에 대한 책은 업데이트 되지 않은 99년판 여행 가이드 책이 뽀얗게 쌓인 먼지 속에 놓여있기 일쑤였다. 게다가 론리 플래닛에서 나온 일본의 큐슈라는 지역 가이드 책자는 한국 전체 가이드 책자 두께와 맞먹었다. 그 동안의 서러움을 한 큐에 날리려는 듯 TV를 보면서 나는 계속 떠들기 시작했다. 홈스테이 할머니는 앞집에 사는 여자가 몇 시에 집에 들어가고 나오는지, 개를 산책시키면서 개의 배설물을 치우지도 않는 매너 없는 사람이 어디에 사는지 등 시시콜콜한 것에 호기심이 끊이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유독 한국에 대해서는 무신경한 사람이었다. 아니, 무신경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한국은 한국의 고유어인 한국말을 쓴다고 아무리 설명을 해줘도 결국 그것이 중국어와 일본어를 섞어놓은 것 아니냐고 마음대로 생각해버리는 고집 센 할머니였다. 하지만 방송의 위력에 더해진 나의 열정적인 나라 사랑에 감동을 받았는지 할머니는 그제서야 내 이야기에 조금씩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홈스테이 할머니는 매운 맛에 비 쏟아지듯 땀을 흘리면서도 별미로 오뚜기카레와 신라면을 일주일에 한 두 번씩 꼭 챙기는 팬이 되었다.
#3.
8월 월드컵의 열기가 어느 정도 누그러져 갈쯤 학교를 늦게 끝마치고 펍에서 친구들과 놀던 도중이었다. 펍 입구로 통하는 구불구불하고 좁은 골목길을 통해 일렬로 줄지어 몇몇 사람들이 들어오더니, 펍은 떠들썩한 외국인 관광객 무리로 점령당해버렸다. 갑작스런 분위기에 놀라 얼떨떨해하던 도중 한 성격 좋게 생긴 아저씨 한 사람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일본사람이죠?” ‘아… 이건 한국사람들이 70년대에 외국 나가면 자주 들었던 말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2000년대에도 이런 말을 듣다니…’ 바로 발끈한 나는 한 자 한 자 힘주어 또박 또박 ‘코리아’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주위 사람들에게 ‘저 사람 한국에서 왔대’ 라면서 왁자지껄하게 떠들더니, 이내 곧 “한국사람들 너무 열정적이고 좋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빨간색 티셔츠와 응원이 너무 인상적이었다. 그 빨간티셔츠 하나 구할 수 있겠느냐?”라고 말을 걸었다. 일본인 아니냐는 첫인사에 쌩 해졌던 맘이 곧 녹아버린 나는 당장은 티셔츠가 없지만 내일도 여기서 머무를 계획이면 구해다 줄 수 있다고 싱긋이 말하면서, 우리 한국 사람들이 원래 좀 그렇게 열정적이고 뭐든지 열심이다라고 한 마디 더해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결국 그 다음날 나는 친구가 가지고 있던 티셔츠 몇 벌을 빼앗아 그 사람에게 갖다 주고 말았다. 그 때 레드 티셔츠를 수십 장 바로 복사 해 낼 수 있다면 주위 사람들에게도 널리 전해주라고 보따리채 주고 싶었던 기억이 난다.
“네… 이번에 아드보카트호의 출발도 매우 순조로웠고, 저는 내년 월드컵에 4강이 아니라 결승전으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고개를 들어보니 나는 2005년 11월 18일 퇴근 지하철 안에 있고 TV에서는 여전히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앵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내년2006년 독일 월드컵 때는 영국이 아닌 한국에서 그리고 협회 사람들과 대형 TV가 설치된 음식점에서 고기를 뒤집으면서 ‘대한민국’을 외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친구들과 광화문으로 달려나가 응원하면서 지나가는 외국인을 붙잡고 한국이 두 번째로 4강 진출했노라고 외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2002년 여름의 기억은, 내년 그리고 내후년이 되어 다시 되돌려 본다 해도 가슴이 뻐근하리 만치 뿌듯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