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홍환 | 한국 땅이름학회 부회장
백두대간이 국토의 등뼈를 이루며 남으로 마구 달리다가 함메(咸白山:1,573m)에 이르러, 잠시 머뭇거리며 다시 국토의 서남쪽으로 내달으니 이것이 이른바 소백산 줄기다.
그 소백산 줄기는 국토의 중남부를 가르고 있으니, 그 남쪽을 영남이라 이른다. 그래서 소백산 줄기를 넘나드는 큰 재가 고치재를 비롯하여 죽령, 만항치, 황전치, 하늘재, 새재, 이화령, 화령, 추풍령 같은 높고도 험한 재가 여럿 있다. 산이 높은 곳엔 으레히 재가 있기 마련, 그 재는 문물과 문명을 낳은 모태이기도 하지만 이동과 전파를 가로막는 극복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 가운데 서울에서 영남을 이어주는 새재(鳥嶺)는 숱한 전설과 역사의 회오리를 안고 있는 재이기도 하다.
‘새재’란 본디 산과 산 사이에 자리한 재 즉 「사이재→새재」로 발음되면서 한자로 뜻빌림(意譯)한 것이 「새재→조령(鳥嶺)」이 되었다는 설이 있고 또, ‘새재’골짜기에 억새풀이 무성하여 ‘새(식물)’가 많은 재라서 ‘새재’요, 또 동네 이름이 ‘서리(새)풀’이라는 뜻으로 상초리(霜草理)라는 설도 있고,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는 ‘풀이 무성하다’는 뜻의 초점(草岾)이라고도 쓰고 있어 정작 어느 것이 맞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글쓴이의 소견으로는 ‘주흘산(主屹山 : 1,160m)과 조령산(鳥嶺山 : 1,008m)사이에 있는 재’라는 말이 꽤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멀리 서도지방의 관서는 물론 관북지방까지 잇는 교통의 요지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옛날엔 많은 보부상들이 넘나들었고 또, 영남 선비들에겐 한양·개경으로의 길목이기도 하였다. 「문경새재 물박달나무 /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 홍두깨 방망이 팔자 좋아 / 큰 애기 손결에 놀아난다. / (후렴) // 문경새재 넘어갈 때 / 구비야 구비야 눈물이 난다. / (후렴)」
오늘날 까지도 서민들에게 널리 애창되고 있는 민요 ‘문경 아리랑’이다.
이토록 서럽도록 눈물이 나는 문경새재 주흘관문과 조곡관문, 조령관문을 숨이 턱에 와 닿도록 허위허위 돌아서 빠져나와 우락부락한 월악(月岳)을 멀리하고 해가 다 넘어갈 즈음이면, 충주 중원벌에 다다른다. 그 중원벌 한가운데 남한강과 달래강이 마주치는 곳에 통한의 역사의 현장, 탄금대(彈琴臺)가 자리하고 있다. 탄금대 밑으로 예나 지금이나 남한강의 맑은 물이 무심한 세월과 함께 흐르고 있다. 임진왜란의 비극의 역사도 함께 흐르고 있다.
탄금대는 옛 가야국의 악성 우륵(于勒)이 신라에 망명, 가야금을 뜯으며 망국의 한(恨)을 달랬다는 곳이기도 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몇 해 전부터 사회의 일각에서는 왜군이 쳐들어 올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이율곡의 유비무환 차원에서의 10만 양병설 제기를 일축한 채, 당리당략에만 빠져, 이전투구에만 급급해 있었다. 민심이 하 뒤숭숭하다 보니, 조정에서 황윤길(黃允吉)과 김성일(金誠一)을 일본에 보낸 것은 난이 일어나기 2년 전의 일이었다.
돌아온 두 사람의 보고 내용이 사뭇 달라, 나라의 국민들에게 엄청난 혼란과 실수를 저질렀던 것은 너무나 유명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실책은 조정에서 김여물(金汝物)의 건의를 듣지 않았음은 물론, 그를 옥에 가둬버린 일이라 할 것이다.
김여물은 30세에 장원급제, 의주(義州)목사가 되었다. 의주에 부임해 보니 매일 술자리에 기생파티가 시끌벅적 했다. 의주는 압록강가에 자리하여, 중국으로 사신이 오가는 관문이란 걸 빙자해 한마디로 사신접대를 핑계로 술 마시고 노래하며 국고를 거덜내는 것이 중요 일과처럼 되어 있었다. 김여물은 신임사또로 부임하자 기강을 바로 잡고 창고에 세워둔 녹슨 무기를 갈고 닦으며 한편으론 군사를 훈련시켰다.
밤낮으로 술타령만 하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고된 군사훈련을 받게 되니 김여물을 미워하지 않을 리 없었다.
어느 시대, 어느 조직이고 일하는 사람 따로 있고, 불평만 늘어 놓고 손 하나 까딱 않으면서 남을 모함하는 데는 이골이 난 사람 또한 있게 마련이다. 김여물도 그런 사람들의 희생물이 되어 그만 파직, 투옥되고 말았다.
김여물은 일찍부터 나라 주변 정세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 특히 일본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율곡(栗谷)이 10만 양병설을 제창한 사실은 교과서에도 있는 얘기지만, 이 10만 병력으로 어떻게 적을 막느냐 하는 문제에 이르러 의견이 분분했다.
당시의 정세는 두 가지 다른 의견이 맞설 수 밖에 없었다. 그 하나는 적을 바다에서 상륙하지 못하게 하는 해상방위론이고, 또 하나는 적을 육지로 끌어들여서 싸워 결판내는 육상방위론이었다.
김여물은 비록 문관이었지만 병법에는 일가견을 가지고 있어 해상방위론을 앞세웠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무릇 전쟁이란 적이 누구인가를 먼저 살펴서 그에 따라 무찌를 전략을 세워야 한다(兵因敵而制勝)’는 것이며, 왜군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해전에 약하고 육전에 강하다. 그들이 상륙하기 전에 바다에 수장시켜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김여물의 주장을 무시하고 모두들 육상방위론을 받아들여 일찍이 김종서(金宗瑞)가 6진을 개척하면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지어 놓은 제승방략(制勝方略)을 인쇄하여 변방의 장수들에게 배포하고 습득하게 했다. 난이 일어나고 왜군이 부산포에 상륙, 동래를 점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모두들 서둘러서 좥제승방략좦을 펴들고 병사들을 산성에 배치, 전열을 가다듬게 했으나 허사였다. 본시 책에 적힌 이론과 실제와는 거리가 먼데다가 북방의 오랭캐와 섬나라 왜의 군대와는 달라도 보통 다른 게 아니었다.
지형지물이 다르고 무기가 다른데 똑같은 전술로 맞서려고 하니 될 턱이 없었다. 이러한 때에 왕의 특명으로 김여물이 옥에서 풀려났다. 그로서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마지막 기회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신립(申砬)장군을 모시고 충주전투에 참가하게 되었다. 김여물은 충주에 당도한 뒤, 신립 장군에게 자신의 작전계획을 아뢰었다. ‘저 김여물의 견해로는 문경새재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경새재는 천혜의 요새이니 우리 같은 소수 병력으로 적의 대군을 막기에는 가히 하늘이 내린 장소인 줄 압니다.’ 신립은 김여물의 말을 귀담아 듣는 것이 옳았으나, 그는 일언지하에 김여물의 주장을 일축해 버렸다. ‘적은 보병이고 우리는 기병이니 넓은 들에서 적을 맞아 철보(鐵步)로 족치면 이기지 못할 리가 없다.(彼步我騎兵入廣野 以鐵步滅之無不勝也)’이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 승패의 갈림길이었는가는 탄금대에서 산화한 두 장수의 역사를 잘 아는 우리로서 너무나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신립의 주장대로 아군은 탄금대벌에 포진해 있었다. 왜군은 처음부터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화우전법(火牛戰法 : 소의 꼬리에 솜뭉치를 매어달아 불을 붙여 소가 놀라 적진에 뛰어들어 적의 진영을 교란시키는 전법)’ 으로 나오면서, 당시 신무기라고 하는 조총을 연신 쏘아대니 배수진을 친 아군은 퇴로 남한강에 막혀 일거에 무너지고 말았다.
김여물은 처음부터 이 전쟁에서 질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들에게 유언장을 쓰고 싸움에 임했다.
유서에서 그는 ‘온 나라에 군대를 불렀으나 한 사람도 모여드는 사람이 없으니 우리는 다만 맨주먹으로 싸울 뿐이다.’ 라고 하면서 ‘나는 이미 나라를 위해 죽기를 결심하였으니 가족은 마땅히 도망하거나 피난할 생각은 하지 말라.’ 고 당부하였다. 더욱이 그는 적에게 포위되어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신립장군의 유언까지 받아 써 주는 여유까지 보였다고 한다. 갑옷을 입은 채 붓을 놀렸으니 붓이 움직일 때마다 쇳소리가 났다고 하며, 그의 필체는 평시와 조금도 다를 바 없을뿐더러 문인 선비답게 명필이었다고 한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신립이 김여물의 말을 듣고 문경새재에 군을 매복했더라면 우리 역사는 상당히 달라졌을 텐데…, 라는 생각을 해본다. 세월은 가고 탄금대 밑을 감싸 도는 한 많은 물줄기는 오늘도 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