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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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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석유협회보 2019년 신년호 가상인터뷰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모던보이, 작가 이상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일어나 한 번 이렇게 외쳐 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

작가 이상의 소설 날개의 처음과 끝부분입니다. 작가 이상(李箱: 1910.09.23.~1937.04.17)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는 참 많지요. 한국문학의 돌연변이, 한국문학사의 이단아, 근대문학의 마침표이자 현대문학의 시작, 한국 시사(詩史) 최고의 아방가르드 시인, 한국 현대시 최고의 모더니스트, 한국의 보들레르 등등. 즉 이상의 등장 자체가 한국 현대문학사상 최고의 스캔들로 통합니다.

특히 기생 금홍과의 스캔들은 상식적인 남녀관계의 방식을 깨는, 매우 기이하고 당시로서는 파격적이며 통념을 뛰어넘어 사도마조히즘적인 관계로 후대에 영화와 연극의 소재로 수도 없이 리바이벌되기도 했습니다.

불행한 운명 가운데서 난 사람은 끝끝내 불행한 운명 가운데에서 울어야만 한다. 그 가운데에 약간의 변화쯤 있다 하더라도 속지 말라. 그것은 다만 그 불행한 운명의 굴곡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상이 제 운명에 대해 했던 말인데요. 천재작가 이상의 삶은 자신이 했던 이 말처럼 철저히 불운과 비극으로 점철되었습니다. 스물일곱해의 짧은 생을 살았던 그의 삶은 마치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불행의 축소판을 모두 보았던 불운의 사내였습니다. 그럼 이 자리에 이상 작가님을 모시고 왜 그런 불행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었는지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보이는 대로 뭐든 따라 그리던 그림 천재 흰동이.

인터뷰어 : 안녕하세요. 이상 작가님.

이상 : 안녕하시오. 날개오감도의 작가 이상이요. 반갑소이다.

인터뷰어 : 흔히 작가님을 불운의 천재하고 말하지요. 대부분의 천재들이 자신의 재능을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하고 불행한 삶을 살았지만 이상 작가님은 특히나 더욱 그러하셨지요. 그 원인이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상 : 우선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과 가난한 집안의 맏이라는 처지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뒤섞여 발생된 불행이 아니겠소? 나는 어미젖을 갓 뗀 후, 아들이 없는 큰집에 구원투수로 입양되어 백모의 서릿발 같은 눈총을 받아가며 성장기를 보냈소, 나의 불행의 시발점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됐지. 내 집이 아닌 남의집살이.

나는 명석한 두뇌와 뛰어난 재능을 가져 어려서부터 천재라는 말을 종종 들었지만 가난과 소외, 그리고 병마의 굴레로부터 평생 벗어나지 못했소. 내 욕망과는 상관없이 돈이 도무지 따라주질 않아서 제비를 비롯해 벌이는 다방사업마다 얼마 못가서 말아먹고, 가까운 친구한테조차 얼치기’,‘괴팍한 시인으로 불렀소. 겉으로는 언제나 쿨한 척했지만, 나는 입양아 트라우마에서 평생토록 자유롭지 못했고, 만 스무 일곱 해 동안 아무도 진심으로 사랑하지도, 또 사랑받지도 못했소. 내게 사랑과 연애는 철저히 유희에 지나지 않았고, 상대를 이기느냐 지느냐만 관심 있는 게임이었소.

인터뷰어 :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남다른 소질을 보이셨다고 전해지는데…….

이상 : 그랬소. 나는 어린 시절부터 유독 뭘 그리는 것을 좋아했소. 얼굴이 유난히 창백해서 마을 어른들이 그림 잘 그리는 흰둥이라고 불렸지요, 그때야 지금처럼 종이가 흔하지도 않았고, 그저 어른들이 버린 담배갑 종이에 끄적거리는 수준이었지. 하지만 나는 무엇이든 주의 깊게 관찰하고 골똘히 생각해, 밤을 새워서라도 종이 위에 똑같이 그려내 어른들을 놀라게 했소. 한번은 내 나이 서너살 때에 길가에 버려진 화투 목단 열 곳 짜리를 똑같이 그려냈지요. 백모가 환쟁이는 상놈이라고 막무가내로 혼내고 말려도 소용없었소. 나는 그림 그리는 게 좋았고, 혼자 있을 때엔 늘 무언가를 그렸어요. 내 미술 쪽 재능은 보성교보에 다닐 때 촉발됐소. 당시 보성교보에는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였던 고희동이 미술 교사로 재직 중이었고, 미술공부를 하기는 더 없이 좋은 분위기였소. 나는 솔직히 다른 수업은 재미가 없었지만 유독 미술시간 만큼은 두 눈을 반짝이며 집중했소. 그 시절, 교내 미술전람회에서 작품 풍경으로 1등상을 받았고, 몇 해 후에는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작품 자화상을 출품해 입선하기도 했소. 나는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백부가 가난한 화가는 집안에 도움이 안된다면서 건축을 공부하라고 권하셨소, 다행히 미술과 건축이 연관이 있기에 별 거부감 없이 건축을 선택한 것이오. 당시 문인들 중, 나처럼 문벌이 버젓한 전문직업인은 없었소.

인터뷰어 : 원래 이상이 본명이 아니었죠? 필명에 얽힌 이야기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이상 : 내 본명은 김해경이오. 1932년 스물세 살 즈음, 총독부 건축과에 취직해 기수로 일할 때에 공사장 인부들이 일본어로 김상(さん)’이상(さん)’으로 착각해 그렇게 부르던 것에서 유래됐다는 설도 있고, 내 행동과 성격이 워낙 남달라 사람들이 이상한 사람이라는 의미로 그렇게 불렸다는 설도 있지요. 그러나 1929년 경성고등공업학교의 졸업앨범에 이상이라는 필명이 처음 등장하는데, 실습생 시절 공사현장에서 인부들이 본인을 그렇게 부르는 것을 필명으로 사용했다는 게 맞을 거요. 그 후, 1932년 작가로 등단작품이라 할 수 있는 시 건축무한육면각체를 발표할 때부터 나는 김해경이 아닌, 이상의 삶을 살았소.

 

금홍이와의 스캔들

인터뷰어 : 기생 금홍과의 연애, 안 여쭈어볼 수가 없군요. 금홍과는 언제 어떻게 어떤 계기로 만나셨습니까?

이상 : 내가 천생 남 밑에서 월급쟁이나 할 위인은 아니잖소? 걸핏하면 일본인 상사와의 갈등으로 총독부 기수 자리를 박처고 나와서 얼마간 폐인처럼 문란하게 지냈더니 폐결핵에 걸리고 말았고, 당시 결핵은 아주 흔한 병이었지만, 걸리면 꼼짝없이 죽는 병이었소, 특히 작가들의 전문직업병이 결핵이었소.

암튼 1933년 황해도 배천온천에 요양차 갔을 때 금홍(본명: 연심)을 만났소. 금홍이는 온천에서 가까운 능라정이란 요정의 기생이었소. 금홍이를 조선시대 명기 황진이나 매창, 계량 같은 기녀로 생각하는 건 어림 반 푼어치도 없소. 조선시대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예()를 갖춘 기녀들의 명맥은 대부분 끊겼고, 대신 말 그대로 술 팔고 몸 파는 싸구려 기녀들과 그들을 데리고 영업하는 요정들만 우후죽순으로 늘어났소. 해서 금홍이도 장구와 잡가 등을 대충 조금 배우고 색주가로 팔려온 케이스였소.

내 소설 봉별기를 보면 금홍이와의 만남과 동거, 그리고 작별까지의 모든 전말을 상세하게 기록돼 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보시고, 금홍이는 체구도 꼭 풋고추마냥 자그맣고 통통하며 귀엽고 앙팡진 스타일이었소. 한마디로 남자들을 홀리는, 섹기가 좌르르 흐르는 스타일 말이오. 나도 당시 피 끓는 일팔 청춘이었으므로 별 수 없었소. 어쨌든 나는 처음 본 다음날부터 금홍이를 좀 짓궂게 가지고 놀았소. 다른 남자들한테 소개해주기도 했는데 금홍이는 싫어하는 내색도 없었소. 지병인 폐결핵을 치료하려 요양차 비싼 한약까지 지어 공기 좋고 물 맑은 유명 온천에 갔지만 결국 정성껏 약을 달여 먹기는커녕 금홍이와 이상야릇한 유희를 즐기는 데만 골몰했소. 허나, 어찌나 그 놀이가 재미지던지 각혈까지 멈췄소.

인터뷰어 : 그래서 금홍이에게 그런 시까지 바치셨던가요? 내가 그다지 사랑한 그대여.

이상 : 맞소. 내가 쓴 글 중에서 유일한 달달한 글이오. 한번 읊어드리다. 내가 그다지 사랑한 그대여 / 내 한평생 그대를 잊을 수 없소이다 / 내 차례에 못 올 사랑인 줄은 알면서도 / 나 혼자는 꾸준히 생각하리다 / ,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인터뷰어 : 그렇게 예뻐 보였던 금홍이와는 왜 헤어지셨어요?

이상 : 온천에서 만났던 금홍이와는 백부의 부음을 받고 서둘러 경성으로 가는 바람에 아쉽게 헤어졌소. 19336, 백부의 유산으로 청진동 한 건물에 전세를 내 다방 제비를 개업하고, 금홍을 불러와 얼굴마담으로 앉혔소이다. 어쨌든 이게 내 본격적인 물장사 역사의 출발점이자, 금홍이와의 기묘한 동거의 시작이었소. 명색이 기녀 출신인 금홍이가 사업수완이 없는 나를 대신해 다방 운영을 잘할 것이라고 내심 기대를 했지만 빗나갔소. 우리 다방은 커피 맛이 아주 엉망진창이었거든. 나도 맛없는 걸 누가 와서 돈 내고 마시겠어. 금홍이는 술만 따라봤지, 커피에는 관심도 없었고 게다가 까만색 벽으로 사방을 칠한 다방 제비의 분위기는 아주 음습하기 짝이 없었소. 암튼 그래서 점점 손님도 줄고 망해갔지. 다방에 파리만 날리니까, 어느 날부터 금홍이가 바깥으로만 나돌고, 어느 날엔가는 떼 묻은 버선짝을 방바닥에 벗어던지고 어느 놈이랑 눈이 맞아서 가출을 했소. 컴백홈과 가출을 반복하다가 아주 이별했소,

인터뷰어 : 후대인들은 금홍이란 인물에 대해 천재 이상을 단명 시킨 팜므파탈로 생각하는데요. 이에 대해 금홍이 대신 항변하신다면?

이상 : 금홍이가 팜므파탈이라? 허허, 듣다보니 별 소리를. 솔직히 그럴만한 여자가 못되지 않나? 동거 초기에는 우리는 여느 신혼부부처럼 함께 산책도 다니고 사이가 아주 좋았소. 내 일생에 있어서 금홍이랑 함께한 날들이 가장 행복하고 안정되었소. 만 스무 일곱 해의 생애에 있어서 교제한 여자가 금홍이 외에도 똑똑한 신여성이 두 명이나 더 있었지만 영혼 깊숙이 각인된 것은 금홍이였소. 금홍이를 만나기 이전의 나는 자폐성이 강한 사람이었소. 몸집만 어른이었을 뿐, 내 자아를 세 살 때 백부의 집으로 입양될 즈음에 가둬버렸기에 나는 어른으로 성장할 수 없었소. 금홍이는 어른이 아직 되지 못한 내 잠재적인 인격과 나름의 정체성을 찾아 자기 식으로 길들였소. 그게 육체적 관계였든, 가학적 관계였든 뭐든 간에. 암튼 금홍이와 함께일 때 비로소 나는 입양아 트라우마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소.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우리 두 사람은 그 어떤 진실한 감정의 커뮤니케이션 없이 마치 게임이라도 하듯 그렇게 엔조이에만 머문 관계였을지도 모르오. 우리는 어쩜 사도마조히즘적 광기. 금홍은 매춘녀라는 직업으로 인해 유혹자이기도 했지만, 반대로 남자들의 성적 욕망, 그리고 야릇하고 독특한 내 짓궂은 게임 본능을 채워주는 희생자이기도 했소.

인터뷰어 : 지면 관계상 마지막 질문입니다. 신여성 변동림과 결혼 직후, 동경에서 유명을 달리하셨는데 그렇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상 :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쯤, 절친 구본웅의 의붓 이모였던 신여성 변동림과 결혼을 했지요. 솔직히 똑똑한 신여성과 살아보니 금홍이만큼 재미가 없었어요, 마침 부잣집 아들이었던 친구 구본웅이 이 이모부에게 돈 몇 푼 쥐어주며 며칠 동경이나 다녀오라고 했지요. 나는 동경이 가고 싶었어요, 내 눈으로 근대를 보고 싶었어요. 근데 동경도 별게 없습디다. 가솔린 냄새만 심하지. 어쨌든 기왕 갔으니까 구경 좀 하다 올 생각이었는데 돈도 없고, 먹는 것도 시원찮고, 추운 겨울나기가 쉽지 않았소. 그래서 결핵은 심해졌고, 설상가상으로 외모가 봉두난발에 옷차림도 허술해서 산책길에 일본 경찰 불심검문에 딱 걸려 한 달 넘게 옥고를 치렀소. 결국 내 폐는 녹아내렸고, 손을 쓸 수조차 없이 남의 나라에서 죽어갔소, 하지만 마지막은 외롭지 않았소. 조선 유학생들이 밤낮 없이 내 곁을 지켜주었소.

인터뷰어 : 그랬군요.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 홍지화/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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