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로 남은 명의 (名醫)
--『동의보감』의 저자 구암 허준
십수년 전, 인기리에 방송되었던 드라마 <허준>을 다들 기억하실 것입니다. 사실 조선 선조 때의 어의였던 구암(龜巖) 허준(許浚, 1539~1615)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이라고는 당대 사람들이 남긴 행적 몇 줄과 『동의보감』등 몇 권의 의학서를 집필한 사람이라는 기록뿐입니다. 현대에 이르러 소설로, 드라마로 재창조과정을 거치면서 픽션을 덧붙여 가히 신화적인 인물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텐데요. 그가 말년을 바쳐서 쓴 『동의보감』은 한의학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봤을 필독서가 되었고, 중국과 일본 등 해외에서도 꾸준히 출판될 정도로 귀중한 지적 유산이 됐을 뿐 아니라, 이러한 세계적인 영향력을 인정받아 2009년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지요. 그럼 구암 허준 대감님을 이 자리에 모시고, 그간의 소회를 들어보겠습니다.
◆ 의술로 날개를 달다.
인터뷰어 : 안녕하십니까? 대감님.
허준 : 안녕하시오. 나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이오. 후대 분들이 나와 내 책을 이리 귀히 여겨 주시니 감계무량하고 고맙구려.
인터뷰어 : 신분사회였던 조선시대에 비교적 천직에 속했던 의관을 직업으로 선택한 계기가 있으신가요?
허준 : 드라마에서는 내 신분이 다소 천하게 나왔지만, 사실 나는 뼈대 있는 가문의 도련님이었소. 할아버지는 경상우수사를 지낸 인물이며, 아버지도 용천부사를 지낸 분이시지요. 다만, 친모가 정실이 아니었기 때문에 내 신분도 어머니 신분을 따를 수밖에 없었소. 어머니도 양반 가문의 서녀였소. 해서 나는 중인신분이었기에 과거급제를 통해 벼슬길로 나아가는 데에는 제약이 따랐지만 제법 권세 있는 집의 아들이었기에 별 어려움 없이 학문을 습득할 수 있었소. 어려서부터 총민하고 영특해 집안 어른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했소.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나가놀기보다는 책상머리에 앉아 공부하기를 즐겨했소. 특히 경전과 역사에 흥미가 많아 그런 분야의 책을 많이 보았지요. 그 중에는 중국의 의서도 있었소. 내가 의관이 되겠다고 결심한 데에는 그러한 영향도 있었을 것이오.
인터뷰어 : 대감님은 현재 동양의학에서는 신화적인 인물이 되셨지만, 역사적인 자료는 너무 빈약합니다. 내의원에 들어가신 후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을 남기기 전까지 일반 백성으로서 대감님의 행적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선조 때 유학자인 유희춘이 남긴 문집이 유일합니다. 유희춘 대감님과의 인연은 어떤 계기였나요?
허준 : 옛날 인물들이 다 그렇소마는, 그 당시에는 의관 지망생을 교육하는 데가 따로 없었소. 혼자 독학하는 게 전부였지. 나도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이미 나온 여러 의서들을 보고 내 나름으로 연구도 하며 어느 정도 여러 질환에 대한 지식을 쌓았을 무렵, 우연찮게 유희춘대감 일가의 병 치료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소. 내가 독학할 때 노비나 천민들 중 아파도 약 한 첩 쓸 수 없는 가엾은 사람들을 많이 고쳐주었거든. 따로 물어본 적은 없지만 아마 유대감도 나에 대한 소문을 어디선가 듣고 나를 불렀을 것이오. 그렇게 해서 유대감과 친밀해져 각별하게 지냈소. 특히 1569년 유대감의 얼굴에 난 종기를 완치해줬는데 그로 인해서 그의 신임이 더욱 두터워졌소. 용하다는 의원들 중 아무도 못 고쳤고, 종기는 나날이 커지고 있었거든. 결과적으로 유대감이 애써준 덕에 나는 내의원에 들어갈 수 있었소. 나에 대한 신뢰가 어느 정도였나 하면, 이조판서에게 나를 추천하는 서신을 보냈고, 그 덕분에 나는 삼십대 초반에 쉽사리 종4품 내의원 첨정의 자리에 오르게 됐소. 당시 의과의 초시와 복시를 수석으로 합격해 얻을 수 있는 관직이 겨우 종8품이었소, 나는 그야말로 파격 승진을 했지. 서자 출신이라서 의과도 통과하지 못한 내가 말이오.
인터뷰어 : 그럼 내의원에 들어가 선조와 광해군을 가까이 모시면서 승승장구하신 게 언제부터였어요?
허준 : 유대감 추천으로 내의원에 들어가긴 했으나 한동안은 그다지 두각을 드러내진 못했소. 1590년 당시 왕세자였던 광해군이 천연두에 걸려 죽어가고 있었소. 호전될 가망이 전혀 없을 만큼 상태가 심각했소. 다른 어의들은 모두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는데 두고만 볼 수 없어 내가 나섰소. 선조한테 감히 내게 맡겨 달라 청했소. 나는 나대로 목숨을 걸었지. 다행히 병이 호전되었고 광해군이 다시 건강을 되찾자, 선조는 크게 기뻐하며 내게 정3품 당상관인 통정대부의 벼슬을 내려 공을 치하했소. 당시 사회구조상 서얼 출신의 기술관한테 허용되었던 벼슬은 정3품의 당하관이 최고였소. 말하자면 나는 내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어 다시 파격 승진을 한 것이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나는 선조와 함께 피난길에 올랐소. 그와 생사를 함께 하리라 마음먹었지. 내가 성품이 우직하고 충성스럽거든, 에헴. 전쟁 중에 다시 광해군의 병을 고침으로서 동반에 올라, 나는 신분의 한계를 완전히 극복했소. 그로서 문신과 같은, 다시 말해 완벽한 양반이 된 거요. 전쟁이 끝나고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는 자신을 끝까지 보필한 문무관이 열일곱 명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힘겨웠던 피난길을 끝까지 동행한 공을 인정해 나를 공신에 책봉하고 종1품 숭록대부 벼슬을 내렸소. 1606년 오랫동안 앓고 있던 숙환이 호전되자 선조는 감격에 겨워 내게 최고관직인 정1품 보국숭록대부를 내리려 했지만, 신분 질서를 어지럽힌다며 완강히 반대하는 사간원과 사헌부의 반대에 부딪쳐 이루어지지는 않았소. 당시 나는 양반계급의 질시를 한 몸에 받고 있었소. 서얼출신에, 기술관인 의관한테 정 1품이라니.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상투를 풀 일이었지.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던 선조는 내 실력과 우직한 충성심에 신뢰를 아끼지 않았지만 양반네들한테는 눈엣가시였거든. 양반에게 굽실거리지 않으며, 임금의 총애를 믿고 교만을 떤다는 게 그들의 평이었지.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순종하고 싶진 않았소. 다만, 내 일과 내 의술이 필요한 사람들에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생각했지.
◆ 백성 중심의 의술의 꽃, 『동의보감』.
인터뷰어 : 그렇다면 시공간을 넘어선 스테디셀러『동의보감』은 언제 어떻게 집필하신 겁니까?
허준 : 전쟁이 끝나고, 강화회담의 진행으로 인해 잠시 숨을 돌리고 있던 1596년 선조가 나를 불러 다음과 같이 명했소. “요즘 중국의 방서를 보니 모두 자잘한 것을 가려 모은 것으로 무지한 백성들이 참고하기에 부족함이 있다. 너는 마땅히 온갖 처방을 덜고 모아 하나의 책으로 만들어라.”라고. 그 무렵 중국의 신의학이 조선에 유입되어 이전의 전통의학과 섞이면서 잘못된 정보가 판을 치고 있어서 이를 정리할 필요성이 있었고, 전쟁 중에 기근과 역병이 발생해 제대로 된 의서가 절대적으로 필요했었소. 무능하긴 했어도 머리가 나쁘지는 않았던 선조는 그 책의 방향을 명확히 제시했소. 첫째, 질병은 본래 스스로 잘못 관리해서 생기므로 예방을 먼저 권하고 다음으로 적절한 약물치료를 제시할 것. 둘째, 질병마다 처방이 매우 다양하고 번잡하므로 꼭 필요한 처방 위주로 요점을 간추릴 것. 셋째, 민간에서 흔히 쓰이는 국산 약재의 이름을 적어 백성들이 쉽게 알고 구할 수 있도록 할 것 등이었소. 어명을 받은 나는 당시 뛰어난 의관으로 이름이 알려진 몇 명과 함께 편찬 작업에 들어갔소. 그러나 이듬해 정유재란이 발발하면서 작업이 중단되었소. 설상가상으로 1608년 선조가 죽자, 그 책임을 나한테 물었소. 노망이 나서 탕약을 잘못 써 임금을 죽게 했다는 죄명으로 나는 의주로 위배를 떠났소. 광해군은 내 억울함을 알고 감쌌지만, 그들은 막무가내였소. 결국 나는 1년 8개월간 귀양살이를 하면서 홀로 『동의보감』을 완성했소. 사간원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광해군은 당시 71세였던 나를 내의원에 복귀시켜 제 건강을 돌보게 했소. 한양으로 돌아온 나는 광해군에게 완성된『동의보감』을 바쳤고, 이후에도 역병에 대해 저술한 『신찬벽온방』, 『벽역신방』 등의 책을 차례로 편찬했소. 1615년 내가 마침내 77세를 끝으로 생을 마치자, 나에게 정1품 보국숭록대부 작위가 추증되었소.
인터뷰어 : 끝으로 『동의보감』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주신다면?
허준 : 『동의보감』은 의관들만 보는 전문의학서가 아니었습니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말 쉽게 쓴, 백성들을 위한 대중의학서였지요. 백성중심의 의술, 그것이 내 의술의 뿌리이자 기둥이었소.『동의보감』은 일반백성들 사이에서 부모를 모시는 자식들의 필독서로 통했소. 중국에서 수입하는 약재가 워낙 고가여서 양반조차 약계를 들어야 아픈 부모님께 약 한 첩이라도 올릴 수 있는 게 당시 상황이었어요. 일반 서민들은 몸이 아파도 그냥 속수무책이었지요.
『동의보감』은 목차 2권, 의서 23권의 총 25권으로 이루어졌소. 「내경편」(6권)·「외형편(外形篇)」(4권)·「잡병편(雜病篇)」(11권)·「탕액편(湯液篇)」(3권)·「침구편(鍼灸篇)」(1권)으로 이루어졌는데, 특히 탕액편에서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흔히 사용 가능한 약재 1천여 종에 대한 효능, 적용 증세, 채취법, 가공방법, 산지 등을 자세히 밝혀놓았으며 약재의 이름 아래에 민간에서 보편적으로 쓰에는 지역사투리 이름을 한글로 달아놓기도 했지요.『동의보감』으로 인해 조선의 의학이 중국으로부터 비로소 독립했다는 자부심에 감회가 새로웠소.
인터뷰어 : 감사합니다. 대감님.
<글 : 홍지화/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