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빛낸 과학자들 가상인터뷰 3>
화약으로 고려와 조선의 바다를 지키다.
--화약의 아버지, 최무선 장군
홍지화(소설가)
영화 <신기전>을 보면 어마무시한 무기 하나가 등장합니다. 바로 ‘신기전’이라는 무기인데요. 조선시대 당시에는 매우 획기적이고, 최첨단 신무기였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로켓병기와 비슷한데, 이 신기전의 밑바탕에는 한 위인의 필생의 노력과 열정이 담겼습니다. 바로 우리 역사상 최초로 화약을 발명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이용해 여러 무기를 만들어서 자주국방의 쾌거를 이루고, 왜구로부터 우리 바다를 지킨 고려의 명장이자 과학자 최무선(崔茂宣,1325~1395)장군입니다. 최장군님을 이 자리에 모시고 여러 말씀을 청하겠습니다.
◆왜구를 소탕하고자 화약의 국산화를 외치다.
인터뷰어 : 안녕하십니까. 최장군님.
최무선 : 안녕하소. 나 고려의 장군 최무선이라 하오. 후대양반들 반갑소.
인터뷰어 : 고려 말과 조선 전기로 명맥을 잇는 동안 장군님의 가문은 3대가 모두 획기적인 무기 개발로 나라에 큰 공을 세웠지요. 그 시발점은 바로 화약을 발명한 장군님이셨고요.
최무선 : 그렇소. 무릇 화약은 대량 살생용 무기 제조에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었소. 간단히 말하면 전쟁의 판도를 바꾸는 것이오. 칼과 활로는 바글바글 떼로 덤비는 적들을 제압하기에 한계가 있지 않겠소?
인터뷰어 : 화약을 발명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무엇이었나요?
최무선 : 내가 화약을 만들고자 집을 몇 채나 태워 먹었는줄 아시오? 걸핏하면 불장난이나 한다며 부인 심기를 어지럽혀서 집에서 쫓겨난 적도 여러 번이오. 특별한 계기가 없는 발명품이 어디 있겠소? 내게도 화약개발에 일생을 걸만큼 절박한 것이 있었소.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의 지리적 특성상 왜구가 자주 쳐들어왔소. 상거지 떼처럼 나무배타고 우르르 몰려와 육지로 올라와서 우리 백성들을 죽이고, 쌀을 훔치고 노략질을 일삼았소. 나는 그것을 어려서부터 많이 봐왔소. 그러나 아무도 백성들을 구하지 않았소. 고려 말 조정은 그럴만한 힘이 없었고, 정치인들도 요즘처럼 자기 잇속 챙기기에만 급급했었거든. 무릇 역사란 반복되는 것이오.
인터뷰어 : 어려서부터 왜구의 약탈로 고통 받는 백성들의 피폐한 삶을 많이 목격해, 마음이 아프셨군요. 그래서 무인이 되기로 결심하셨고요?
최무선 : 그렇소. 나는 경상북도 영천시 오계동 마단에서 광흥창사를 지낸 최동순의 아들로 태어났소. 부친이 재직했던 광흥창은 당시 관리들의 녹봉을 맡아 관리하는 관청이었소. 당시 관리들의 녹봉은 화폐가 아니라, 곡식이었소. 그렇다 보니, 광흥창사는 예성강 하구를 통해 개성을 비롯해서 전국 각지로 운반되는 곡식을 책임지는 자리이기도 했소. 당시 왜구는 이 예성강을 통해 운반되는 서해안의 여러 항구의 쌀과 곡식을 노렸소.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때는 바야흐로 고려왕조의 운명이 마치 바람 앞의 촛불 같았소. 지배층은 권력에 눈이 멀어 정쟁만 일삼았고, 백성들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었지. 전라도와 경상도 해안 지방을 중심으로 왜구가 자주 출몰하여 우리 백성들을 상대로 약탈과 살인 등 많은 피해를 입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철저히 외면했소.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예성강을 통해 들어오는 화약을 처음 보게 됐소. 그것을 보는 순간, 저것이다, 하고 묘안이 떠올랐소. 저것으로 무기를 만들어 왜구를 격파해야겠다는 생각 말이오. [태조실록]에도 기록돼 있듯이 내가 본래 천성이 밝고 방략(方略: 일을 꾀하고 해 나가는 방법과 계략)이 많으며, 병법에 대해 말하는 것을 좋아한, 적극적이고도 긍정적인 인간이었소. 한마디로 말하면, 실천력 하나는 끝내줬지.
인터뷰어 : 그럼 그 때 이미 중국은 화약을 가지고 있었군요?
최무선 : 화약과 나침반, 종이, 인쇄술은 고대 중국의 4대 발명품이요. 화약은 대략 850년경에 연단술사들이 단약을 제조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명됐다 하오. 8세기부터는 군사무기로 사용되었는데, 11세기에는 화약을 이용한 일종의 화염방사기와 유사한 무기가 개발되었소. 13세기에 이르러서는 실크로드를 타고 서방으로 전파되었지. 이후 서방에서 화약무기가 널리 보급되면서 전쟁의 성격이 공격 중심으로 전환되었소. 까만색 분말가루가 가진 힘이 실로 무섭고도 대단했지.
그런데 화약의 제조기술은 최고의 군사기밀이었소. 중국은 제조기술이 세어나가는 걸 원천적으로 차단했기 때문에 알 길이 없었소. 이웃 나라 고려는 비싼 가격에 전량 수입해야 하는 처지였소. 그렇다보니 고려로서는 항상 화약이 부족했소. 무기 제작은 엄두도 못냈지. 나는 화약 무기의 막강한 화력을 믿어 의심치 않았소. 나는 무인으로 조정에 들어간 후, 여러 차례에 걸쳐 왕에게 화약을 국산으로 제조해, 최신무기를 만들어서 왜구를 소탕하자고 건의했소. 하지만 매번 내 건의는 묵살 되었소. 친원세력이 주류였던 조정의 대신들은 하나같이 중국에서 수입하면 되는 것을 굳이 만들 필요가 있느냐며 되러 나를 사기꾼으로 몰았소.
인터뷰어 : 그럼 장군님이 국산 화약 제조를 직접 완성시킨 것은 언제였나요?
최무선 : 나는 필시 한다면 하는 사람이오. 좌절이나 포기 따위는 내 사전에 없었소. 내 오랜 꿈이 이루어진 것은 1377년(우왕 3년) 10월이었소. 지겹도록 거듭된 내 청에 우왕이 감복하여 화약 제조 및 화통도감 설치를 허락하였소. 그 때의 기쁨이란, 세상을 다 얻은 듯 했소.
솔직히 그동안 화약 제조에 번번이 실패했소. 이유인 즉, 재료배합비율이 안맞았던 거오. 하지만 나는 꼭 성공하리란 확신이 있었고, 실패에 굴하지 않았소. 먼저 나는 화약제조 비법을 알고자 벽란도에 자주 드나드는, 원나라 출신의 염초장인 이원과 가까이 지냈소. 물론 국가 기밀인지라, 그 자도 비법을 순순히 알려주지는 않았지. 같은 마을에 살면서 요리조리 꼬드겨도 보고 자주 어울렸더니, 그도 내 애국심에 탄복해 어느 날엔가 비로소 보따리를 풀더군. 그리하여 나는 화약의 국산화를 실현하게 된 거오.
◆ 강한 조선 수군의 밑거름이 되다.
인터뷰어 : 그렇군요. 그럼 화약을 이용한 무기개발도 직접 하셨나요?
최무선 : 그렇쇼. 화통도감을 맡은 후 나는 곧장 화포 제작에 착수했소. 언제 다시 왜구가 쳐들어와 깽판을 부릴지 몰라 한시가 급했소. 나는 곧 대장군포, 이장군포, 삼장군포, 육화석포, 화포, 신포, 화통, 화전, 철령전, 피령전, 질려포, 철탄자, 천산오룡전, 유화, 주화, 촉천화 등 다양한 화포들을 개발해내 왕과 대신들을 놀라게 했소.
인터뷰어 : 그 결과가 진포대첩과 관음포대첩에서 거둔 대승이었군요.
최무선 : 그렇소. 진포대첩에서 우리 고려군은 고작 1백척의 배로 500척의 왜구를 한방에 무찔렀소. 화약을 이용해 제조한 신무기 덕분이오. 1380년 8월, 왜구는 500여 척의 배를 이끌고 전라도 진포(현 충청남도 서천군)를 거점으로 삼아 내륙에 침입했소. 고려 조정에서는 내가 그동안 개발한 화기를 시험해볼 절호의 기회라며 나를 부원수로 임명해 참전토록 했소. 나세 장군과 함께 내가 지휘하는 고려의 수군은 왜선에 비해 5분의 1밖에 안 되었소. 하지만 우리 고려군은 화포로 무장해, 왜군을 향해 막강한 화포공격을 가해 곧 적선 500척을 모두 불살랐소. 살아남은 왜군은 내륙으로 퇴각하였으나, 이를 추격한 이성계 장군에게 지리산 일대에서 모조리 섬멸되었소. 진포대첩은 고려군이 자체 제작한 화기로 거둔 통쾌한 첫 승이었고, 군선에 화포를 정착해 함포공격이 감행된 최초의 해상전투였으며, 함포전술이 가미되어 고려가 해상방어를 적극적으로 하는 계기를 이뤄냈다는 데에 의의가 크오.
관음포대첩 또한 마찬가지오. 고려 말 1383년(우왕 9년) 5월 정지의 함대가 남해 관음포 앞바다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해전으로, ‘남해대첩’으로도 알러졌소. 진포대첩에 대한 보복으로 왜구는 120척의 군선을 이끌고 남해에 침입해 합포(현 마산)를 공격하였소. 당시 고려군의 화포 책임자가 바로 나였소, 관음포해전은 움직이는 적선에 화포를 정확하게 명중시킨 매우 훌륭한 해전이었소. 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정지 장군이 “내가 일찍이 왜적을 많이 격파하였으나 오늘같이 통쾌한 적은 없었다.”고 말할 정도로 왜선을 철저히 격파한 해전이었소.
관음포대첩은 왜구들이 고려 수군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하고, 세계 해전사상 함포로 적을 물리친 전투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니고 있소. 이 전투는 최영의 홍산대첩, 나세와 나의 진포대첩, 이성계의 화상대첩과 함께 왜구의 세력을 크게 약화시킨 승전이었으며, 관음포대첩으로 얻은 자신감으로 고려군은 대마도정벌을 추진하였소. 후에 조선의 이순신의 거북선 등 강력한 수군의 기반에는 내가 만든 화포가 밑바탕이 되었소.
인터뷰어 :그런데 그리 많은 공을 세운 화통도감이 고려 창왕 때 갑자기 철폐되고, 군기시에 흡수통합되었어요. 화통도감이 사라진 이유가 불분명한데, 왜구를 성공적으로 소탕한 뒤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진 것인가요? 아니면 고령이 되신 최장군님을 대신할 후계자가 없어서인가요?
최무선 : 글쎄올시다. 그에 대해서는 나도 별로 할 말이 없소. 다만 [태조실록]에도 나왔다시피 나는 1395년 4월 19일에 세상을 떠나기 전, 당시 열다섯살이던 외동아들 최해산(崔海山, 1380-1443)에게 물러주라며 부인에게 화약제조비법이 적힌 책을 남겼소. 내 아들이 다행히 내 유언을 받들어 화약 제조법을 습득하고, 이후 1401년(태종 1년) 군기시에 특채되어 화포와 화차 개발에 주동적 역할을 했소. 워낙 늦게 얻은 아들이라 내가 살았을 당시에는 글도 못깨우쳤는데 말이오. 참 기특하오. 손자인 최공손도 화약제조와 화포무기 개발에 공을 세웠소.
인터뷰어 : 고려사에는 장군님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이에 대해 어찌 생각하십니까?
최무선 : 나는 고려인으로 살았지만, 정작 [고려사]에는 기록이 없소. 다만 [태조실록]의 졸기에서 찾을 수 있소. [태조실록]에 자세한 기록이 남은 이유는 고려 말, 왜구의 노략질을 막는데 이성계와 내가 뜻을 함께 했기 때문이오. 내가 죽자, 태조는 나와 함께 전장을 누볐던 추억을 회상하며 내 죽음을 애도했다 하오.
인터뷰어 : 끝으로 후대인들에게 남기실 말씀을 한마디만 부탁드립니다.
최무선 : 한마디면 되는 거요? 자주국방이 무엇보다 매우 중요하오. 나라를 잃는 것은 곧 나를 잃는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