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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은 나의 것, 내가 그리는 한 폭의 그림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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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인물의 가상인터뷰]

내 인생은 나의 것, 내가 그리는 한 폭의 그림이니라.

   
--신사임당 VS 허난설헌

홍지화(소설가, 프리랜서 작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핫(hot)한 여성예술인 두 사람을 꼽으라면 신사임당(1504~1551)과 허난설헌(1563~1589)일 텐데요. 이 두 분은 동시대를 살았다는 공통점뿐만 아니라, 사대부가의 여인으로서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었다는 점, 글과 그림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조선 최고의 예인(藝人)으로 칭송받고 있다는 공통분모를 가졌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두 분을  모시고 여러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신사임당 : 난설헌 동생 왔는가? 자네를 한번 만나고 싶었는데 이제야 만나는구만. 우리는 같은 강릉 사람인데다가 서로 통하는 것도 많지. 내가 반세기를 먼저 살았으니 말을 놓겠네. 괜찮지?
허난설현 : 그럼요. 저도 언니의 영민함과 재능을 어릴 적부터 전해 들어 알고 있어요. 우리는 같은 동향 사람들이지만 집안끼리는 가까이 하기엔 먼 사이죠. 특히 언니 아들 율곡선생은 서인의 수장이었고, 우리아버지 허엽선생은 동인의 영수였으니 만나면 서로 으르렁거렸겠죠. 결국 우리 오라버니 허봉은 율곡선생을 탄핵하려다가 오히려 역풍을 맞아 위배를 가 객사까지 했고 우리집안은 몰락했지요. 율곡선생이 조금만 봐주지 그러셨어요.

신사임당 : 나는 그런 것에 관심없다네. 붕당정치의 ‘붕’자만 들어도 골이 쑤셔. 그냥 그림 그리고, 시 쓰고 그런 것만 생각한다네. 우리 아들 이이가 성품이 대쪽 같긴 해. 걔 열여섯 살에 내가 세상을 떠나와서 한참 사춘기 때라 상처가 많았을 걸세. 머리 아픈 남정네들 이야기일양 접어두고 우리들 이야기를 하자고. 남정네들의 세상에서 여인의 몸으로 재주를 억누르고 사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고.
허난설현 : 혀 깨물고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어요. 스물일곱 꽃다운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게 아깝긴 하지만, 모진 시집살이를 떠올리면 그나마 일찍 죽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신사임당 : 에구, 시집살이가 모질었구나. 아버지 허엽선생, 두 오빠 성과 봉, 그 유명한 「홍길동전」의 작가 막냇동생 균, 그리고 자네 허초희. 이렇게 다섯을 가리켜 허씨 다섯 문장가라 칭송이 자자하던데 어쩌다가…… 시집을 잘못갔나보네. 어떤 집안이었어?
허난설현 : 그 시절 여인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아버지가 찍어주는 대로 갔지요. 뼈대만 있는 안동김씨 문중으로. 동인 중에서도 북인계에 속했던 우리 집안은 학문의 가르침에 아들딸 차별을 두지 않죠. 우리 집은 모든 게 정말 자유로웠어요.
근데 시집은 완전 딴세상이었어요. 남인 보수 꼴통집안이라 가부장적이고 여인네들은 서책 근처에도 가면 안되고 그랬어요. 결국 나는 기가 드세고 남정네들의 전유물인 글을 탐한다는 이유로, 멍청해서 과거급제 못하는 남편의 앞길을 막는 요물로 낙인찍혀서 10년동안 무식한 시어머니한테 말로 다 못할 정도로 모진 갈굼과 핍박을 받았죠. 진짜 그런 거지같은 집안으로 시집을 왜 갔는지, 그 집 귀신 된 게 지금 생각해도 가장 억울해요.

신사임당 : 그랬구나. 나는 시집살이는 별로 안했는데. 자네 아버지만큼 우리 아버지도 깨인 분이셨거든. 우리 아버지는 당신 딸들뿐만 아니라, 조카딸들한테도 유교의 4서6경을 가르칠 만큼 개화된 분이셨지. 우리 집이 아들 없이 딸만 다섯이었거든.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 같은 사위를 얻길 바라셨어.
특히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주가 많던 나를 유독 아끼셔서 시집보내기 싫어하셨지. 과년한 딸 시집 안보낼 수는 없고, 궁리 끝에 편모슬하에 독자인 남편한테 가라셨지. 말하자면 데릴사위 비스무례했는데 남들은 보잘것없는 집안으로 시집을 보낸다고 수군거렸지만 우리 아버지 생각은 다르셨어. 내가 마음 편히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환경과 이해심을 갖춘 사람을 고르는 게 우선이었지. 자네처럼 명문세도가로 보내면 시집살이를 해야 할 테니까. 그래서 나는 친정에서 오래 엄마를 모시고 살 수 있었지.
허난설현 : 부러워요. 언니. 시집살이, 마음고생 같은 것 모르고 사셨겠네요. 

신사임당 : 그것도 아니라네. 나도 자네만큼이나 결혼생활이 순탄치 않았다네. 결혼 초에만 잠시 평안했을 뿐, 이름값 제대로 한 남편 이원수 때문에 속깨나 끓였다네. 오죽하면 내가 속을 끓이다 못해 심장병으로 세상을 떴겠나. 이원수 저원수 속으로 참 많이도 욕했다네.
허난설현 : 언니 남편 이름이 이원수에요? 이름이 의미심장하네. 그 시대 남자들이란 게 떡판으로 찍어낸 듯 비슷비슷했나 봅니다.

신사임당 : 원수가 따로 없었네. 친정살이를 허락해준 것만 빼고, 나와는 모든 게 안맞았지. 사람이 순하기만 했지, 무능하고 우유부단하고, 융통성도 없고. 카운슬러노릇 하기도 지겨웠다네. 입신양명에 뜻이 전혀 없는 못나터진 위인이었거든.
한번은 내가 과거급제 할 때까지 10년 동안 별거하자며 한양으로 올려 보냈더니 나약해 내가 보고 싶다며 대관령도 넘지 못하고 돌아오기를 세번이나 반복하더라. 어찌나 속상한지 내가 특단의 조치로 내 머리칼을 싹둑 잘라 보이며, 남자로 태어나 출세도 못할 못난 지아비랑 사느니 내 차라리 머리를 빡빡 밀고 절에 들어가서 비구니가 되겠다고 협박까지 했지. 그래도 소용없었다네. 3년만에 과거준비 때려치웠네.
허난설현 : 우리 지아비도 마찬가지였어요. 차라리 말이라도 고분고분 잘 듣는 바보온달을 데리고 사는 편이 나을 뻔했어요. 시어머니는 당신 아들 그릇은 생각도 않고 내가 요물이어서 그 사람 앞길을 막는다고 닦달을 했는데, 내가 죽은 해에 겨우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가 됐다더군요.
자기 말로는 내가 8세 때부터「광한전백옥루상량문」을 지은 신동이라 아내로서 매우 부담스러웠다고 합디다. 결국 내 친정 몸종과 바람이 난 그 허름한 안목에 할 말을 잃었죠. 내 아우 균이 그 사람에 대해 이런 말을 했죠. ‘문리는 모자라도 능히 글을 짓는 자. 글을 읽으라고 하면 제대로 혀도 놀리지 못하는 자’라고요. 균이 잘 봤어요.

신사임당 : 자네 남편 취항이 어쩜 우리 남편 이원수랑 비슷할까. 우리 남편도 술주정뱅이 주막집 마담이랑 뒹굴고 다니는 걸 내가 현장을 잡았지. 내 생애 그런 굴욕은 처음이었네. 홧병으로 드러누워, 내가 죽거든 재혼할 생각을 아예 하지 말라고 했네.
중국 옛 경전에 등장하는 성인들을 예로 들며 아들딸을 일곱이나 뒀는데 무슨 자식이 더 필요하냐고 제발 애들을 생각해서 재혼하지 말라고 두 손 잡고 부탁까지 했네. 그랬더니 이 웬수가 요목조목 반박하더니 내가 죽은 지 얼마 안돼 나보다 스무살이나 어린 주막집 마담 권씨랑 덜컥 재혼해버렸네. 우리 아들 이이가 금강산으로 가출까지 하고. 정말 찌질이가 따로 없지,
허난설현 : 그랬군요. 언니도 지아비 때문에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겠네요. 우리가 너무 똑똑해 남정네들이 되려 우리를 시기하고 부담스러워 했죠. 그 시대 남정네들은 다들 백치미 취항이었잖아요. 나도 밤마다 독수공방 처지에 어렵게 얻은 두 아이를 돌림병으로 모두 잃었어요. 뱃속 아이마저 유산하고, 더 이상 세상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죠. 언니의 넘치는 자식 복이 부러워요..

신사임당 : 내가 남편복은 없어도 자식복은 좀 있지. 나를 닮아 소사임당이라 불릴 만큼 그림에 재능이 남달랐던 화가 이매창이 우리 큰 딸이고, 셋째아들 이이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이이의 아우 이우도 시와 글씨, 거문고, 그림 등에 능해 4절로 불렸지, 하지만 나는 걔들을 끼고 가르치진 않았네. 양떼 방목하듯 키웠네.
단지, 스스로 깨닫는 교육법으로 훈육했을 뿐이네. 내가 뜬 이유? 당시에도 유명했으나, 잘 키운 아들 이이 덕분이라고 할 수 있네. 노론의 수장 송시열영감을 비롯해 이이의 추종자들이 별볼일없는 아버지 대신 어미인 나를 추켜세워 가히 신격화한 까닭이라네. 내 이미지는 결국 실제와는 달리 현모양처 이미지로 5백년동안 굳어져 버렸지. 나는 지아비에 순종한 적이 없네. 늘 동등한 위치에 있었지.    
 허난설현 : 언니도 나만큼 파란만장했네요. 그러나 우리의 고통과 노력이 헛되지 않았죠.
 신사임당 : 그렇지. 우리는 남정네들 중심의 세상에서 여인들의 역사를 남겼다네. 오늘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 짓고, 다음에 또 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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