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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고갱과 김환기: 시뮬라크르와 숭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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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고갱과 김환기: 시뮬라크르와 숭고

sk에너지 에너지정책팀

황정운 대리

올 해의 독서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서울시립미술관 폴 고갱 특별전에 다녀 온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직장 사수가 티켓을 선물해주셔서 전시회가 막을 내리기 며칠 전 와이프와 함께 다녀왔지요. 지난 여름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온 뒤에 어디든 미술관에 갈 때는 꼭 도슨트 설명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현장에서의 설명은 책과는 다른 생동감을 주는 듯 합니다. 그래서 저녁 7 30분 마지막 도슨트의 설명을 기다리며 저녁을 먹고 7시 무렵 시립미술관에 도착했습니다. 정말 사람이 많더군요. 생각해보니 시립미술관 전시회에 다녀온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서울시립미술관의 그 상업적인 모습 때문이었지요. 관객들의 상업적인 관람 태도, 작품의 깊이가 아닌 대표 그림 몇 개로 전시회 전체를 홍보하는 미술관의 상업적인 모습이 싫습니다. 폴 고갱의 그림을 보기란 쉽지 않아 처음 시립미술관을 찾았습니다만, 역시 상업성이 느껴지는 바람에 저와 와이프 모두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습니다. 도슨트를 따라 200명씩 움직이는 관객들은 당연히 그림에 집중하지 못하고 저마다 이야기를 하기 바쁩니다. 관객의 수준이라는 단어를 쓸만큼 저 스스로 예술에 조예가 깊은 것도 아닙니다. 제가 느낀 불편함이 관객이 많아서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여하튼 고갱의 대작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을 직접 본 것은 큰 기쁨이었습니다. 원작은 미국 보스턴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지요. 그러나 그림 이외의 것은 인상적이지 않았습니다. 2층의 샵에서고갱의 그림엽서를 몇 개 사고 정동길을 걸어 경향신문사 방향으로 걸어갔습니다.

 

그 날 저녁 집에 돌아와 핸드폰 메모장에 이런 글귀를 남겼네요. - "폴 고갱과 김환기. 시뮬라크르와 숭고. 작가도 작품도 아닌 미술관 나들이에만 의미를 부여하는 수많은 복제 관객들의 시뮬라크르들. 그러나 김환기의 숭고는 작품에서 나오는가? 작가에서 나오는가? 작품에서 나온다면 하이데거. 작가에서 나온다면 진중권. 하이데거? not 하이데거?" -2013.9.27.

 

지금 읽어보니 폴 고갱 전시회에 대한 실망감이 어지간히 컸던 듯 합니다. 도슨트를 따라 수 백 명이 일제히 움직이는 모습이 꼭 매트릭스에 나오는 스미스 요원, 앤디워홀 그림의 캠벨 통조림과 같이 보였던 듯 합니다. 그렇게 수 많은 관객으로 소란스러운 시립미술관을 보니 부암동 환기미술관이 그리워지는 건 당연했습니다. 올 해 2월 와이프와 함께 찾은 환기미술관은 사람이 아무도 없어 고요했던 터라 그림 하나 하나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집중하게 되니 이 그림이 무슨 뜻일까, 이 그림의 메시지는 뭘까 생각해보게 되고 고민하다 보니 그림이 내게 말을 건네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1970년의 대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를 온 눈으로 감상하다 보니 정말 그런 기분이 들더군요. 마치 고흐의 신발 그림에서 신발 주인 아낙의 고된 농사일과 삶의 질척함이 말 걸어진다고 말한 하이데거의 숭고미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폴 고갱과 김환기. 시뮬라크르와 숭고." 라고 적어놓은 것 같네요. 물론 폴 고갱 그 스스로는 절대 시뮬라크르도 아니고 절대 무언가의 키치도 아닙니다. 그는 그 자체로 숭고한 아름다움입니다. 다만 그를 접하는 그 날 우리의 모습이 실망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저를 포함해서요.

 

올 해에는 미학이라는 하나의 주제를 두고 다양한 책을 읽었습니다. 기분이 정말 좋았습니다. 지난 수 년 간 철학, 인문, 역사책을 읽은 것이 이 미학의 세계에 들어서기 위해 그 개념의 뿌리를 캤던 기간이라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진중권이 다시 복간한 <현대미학강의>, <앙겔로스노부스>는 울산공장 출장 가는 길에 오고 가며 다 읽었는데 매우 훌륭했습니다. <미메시스에서시뮬라시옹까지>, <미학산책>, <서양고대 미학사 강의>, <예술의 역설:근대 미학의 성립>과 같은 책들은 미학사상의 흐름을 통사 하는 책들인데 확실히 근현대 철학을 접하고 나서인지 한결 편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 뿌리에서 조금 가지로 파생하여 예술의 전반적인 의문들을 심도 있게 다룬 책들도 좋았습니다. 둥지의 철학으로 유명한 박이문 교수님의 <예술과 생태>, 그로테스크에 대한 다양한 연구를 모아놓은 <그로테스크의 몸>과 같은 책들도 훌륭했습니다

 

무엇이든지 뿌리와 개념을 알아야 그 가지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문, 역사, 철학을 알면 예술, 건축을 이해하기가 쉽고 더 재미있습니다. 남이 소개하는 개론서가 아니라 그 저자의 원작을 읽어야 그 사상을 좀더 심도 있게 연구한 전문서적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마음에 9월 중에 그 두꺼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서울도서관에서 빌린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가진 예술에 대한 입장과 하이데거의 생각이 일치하는 것이 참 많았습니다. 정정해서 이야기하면 제가 하이데거로부터 배울 점이 너무나도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작품-작가-관객의 흐름에서 실제 목소리를 내는 것은 작품이고 그 예술작품이 말할 수 있도록 - 언어를 가질 수 있도록 - 도와주는 것이 작가이며, 결국 관객은 그 작품 스스로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라고 하이데거는 이야기합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환기미술관에서 거대한 그의 그림은 제게 말을 거는 것처럼 다가왔고 그 때문인지 하이데거의 원작을 읽으려 노력했지만 50페이지 정도 읽고 자연스럽게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아직 아름다움의 근원적 거대한 개념과 뿌리를 제대로 모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그리고 꾸준히 인문학을 공부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반성하였습니다. 쉽게 말하면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공부하라는 뜻이겠지요

 

동시에 하이데거의 숭고미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간극이 있습니다. 예술작품이 언어의 주인이라면, 작가의 입은 닫히는 셈이 되어 수 많은 예술인들의 독창적인 혼을 설명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이데거일까, 하이데거가 아닐까. 내게 말을 건네는 주체는 예술 작품일까 아니면 예술 작가일까. 그 답을 찾기 위해 미학을 공부하고 현대미술을 견문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느덧 올 해 목표 100권 중 어느덧 90권을 읽었습니다. 나머지 10권은 작년에 읽었던 책 중에 또 읽고 싶은 책 10권을 다시 읽어보려고 합니다. 무엇이든지 복습이 중요한 법입니다. 또 하나 기쁜 소식은 예술에 애정을 갖는 분을 만날 때의 희열을 오랜만에 느낀 일이 있었습니다. 음악가의 음악가 '나디아불랑제'의 피아졸라, 번스타인, 라벨과의 세련된 우정이 떠오릅니다. 제 삶도 예술에 대한 애정을 서로 이야기하고 예술적인 삶, 삶적인 예술로의 경주를 독려하는 그런 세련된 우정이 깊어지길 바랍니다. 그런 분들로부터 많은 것을 겸손하게 더 배우고 싶습니다. 10월의 날씨가 점점 서늘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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