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뿔났다
황정운 SK에너지 에너지정책팀 대리
엄마가 집을 나갔다. 김혜자가 가족의 등살을 못 참고 뿔이 나 집에서 나간 순간 전국의 수 많은 엄마들이 환호성을 외쳤다. 가족과 자신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감정의 곡예를 하던 김혜자가 결국 자신을 택한 건 전국의 수 많은 엄마들을 대신하는 카타르시스이기도 했다. 그러나 환호성을 외친 이들 곁에는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여자가 가족을 버리고 집을 나가냐는 비난도 거셌다. 그렇게 비난의 목소리를 높인 사람들이 순전히 남자만은 아니었고 또 다른 엄마들도 있었던 것은 꽤나 아이러니했다. 엄마를 대표해 한 엄마가 굴레에서 벗어났는데 정작 어떤 엄마들은 그를 불편하게 바라보았던 것은, 이 문제가 그만큼 쉽지 않았음을 말해주었다. 그래서 그 어떤 엄마가 집에서 나가며 혼자만의 시간을 돌보는 순간, 이 현실에는 쉽게 존재하지 않는 엄마 때문에 온 사회가 시끌시끌했다. 그렇게 2008년을 뜨겁게 만든 김수현 작가는 아주 오래 전 <청춘의 덫>에서부터 <내 남자의 여자>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걸쳐 본인만의 세계관을 탄탄하게 구축하며 드라마를 통해 서사의 위대함을 알려주는 몇 안되는 작가 중 하나다. 그런 그녀가 요즘 선 보이는 드라마가 더욱 각광을 받는 이유는 지금껏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것에 대해, 그게 왜 당연해야 하는데? 라고 담담하게 물음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나이 많은 노 작가가 말이다. 당연히 인내하고 헌신하는 것이 이 시대의 엄마라고 많은 이들이 이야기할 때, 김수현 작가는 엄마 이전의 여성으로서의 그녀를, 여성 이전의 한 사람으로서의 그녀를 그려내는데 집중했다. 그건 우리 사회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금기를 슬쩍 건드려보는 것이었는데 늘 이런 새로운 시도는 심심치않은 저항에 직면하기 마련이다.
그런 김수현 작가가 가장 최근에 선보였던 <인생은 아름다워>는 지금껏 그녀가 건드려왔던 사회적 금기 중 가장 논란이 될만한 것을 일부분 담아내고 있었다. 그녀 말대로 특별한 목적을 갖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고 그저 한 가족의 여러 자식 중에 동성애자도 하나쯤 있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려낸 동성애가 여전히 사회적 저항이 이토록 심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한 집안의 장손이 비행기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그 둘이 제주도의 한 성당에서 언약식을 맺는다는 보도가 나갔을 때 여기저기서 비뚫어진 파열음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일부 시민단체는 "'인생은 아름다워'를 보고 '게이'된 내 아들 AIDS로 죽으면 SBS가 책임지라"는 일간지 광고를 실었고, 일부 사람들은 그 광고를 보고 여전히 이 사회가 굳게 경직되어 있음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결국 그 언약식 장면은 촬영을 마쳤음에도 방송에 나가지 못했고 결국 마지막으로 뿔난 것은 김수현 작가였다. 단순히 동성애라는 사회적 코드를 담아낸 순간 가장 더럽고 불결하여 어쩌면 정상적인 인간의 삶을 파괴할 것만 같은, 그리고 그 옆의 사람도 파괴할 수 있는 바이러스가 창궐할 것으로 여겨졌던 것에 예순을 훌쩍 넘긴 작가는 분노했다.
"우리 사회에서 동성애자는 결코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내 형제, 내 자식, 내 손자 중에 충분히 존재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파괴해야 하고 금기시해야 하고 배척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자기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을 리 없다며 동성애자를 무작정 미워하는 사람은 교만한 것이다."
- 조선일보 인터뷰 中, 2010.10.29-
동성애자
많은 사람들에게 동성애라는 것은 여전히 받아들이기 쉬운 것은 아니다. 재미있는 것은 동성애라는 것이 내게 가까이 다가올수록 더욱 그 혐오감이 짙어지고 반응도 과격해진다는 것이었다. 해외의 유명한 아티스트 중 의외의 인물들이 동성애자였음이 밝혀지고 나서도 내 주위의 반응은 크게 엇나가지 않았다. 영국의 엘튼존, 그룹 퀸의 보컬 프레디 머큐리, 고인이 된 장국영이 알고보니 동성애자였고 심지어 그들 중 일부는 당당히 동성애인을 공개하기도 하는데 정도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낀 감정은 신선함이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사회적으로 터부시되는 것들이 내 인생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있을 때 시간과 공간을 두고 찬찬히 그것을 관찰할 수 있었고, 여전히 나의 인생은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동성애가 내 주위의 가까운 이야기가 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극도로 보수적으로 변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처럼 느껴졌다. 정말 그것은 바이러스와 같았다. 마치 저 멀리서 구제역이 발생할 때는 혀를 차며 걱정하지만 무관심했고, 그것이 점점 나의 가정을 파괴하며 가까이 온다고 느껴질 때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고 싶은 것과 같았다. 그리고 동성애를 바이러스처럼 두려워하는 것은 비단 나이가 많은 이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 역시 스무살이 갓 넘었을 때는 세상의 모든 것을 용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동성애자들이 은근히 모여든다는 신촌 창천공원을 밤늦게 찾아 거기서 만난 사람들과 친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종종 그곳을 찾기도 했다. 아마 스스로 어느 정도는 개방적이라는 자의식이 강했다. 그래서 군대를 다녀오고 나서는 대학 내 성폭력상담소에서 봉사활동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곳에서 간접적으로 교내에 일어나는 수 많은 성폭력 문제를 접할 수 있었는데 그 중에는 동성애도 포함되어 있었다. 매 년 봄과 가을이면 캠퍼스에서 크게 부스를 차리고 내 또래 남자애들을 앉혀놓고 직접 모형을 만져가며 남성 피임범을 가르치기도 했고, 여학생들과 함께 대안생리대를 직접 바느질하며 만들기도 했는데 그런 시간을 보내며 나는 이 정도면 내 스스로 완고한 편견을 깨트려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함께 봉사활동을 하는 학생과 함께 수업 후에 근처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하고 있는데, 나와 함께 간 친구가 카페 내 어떤 남자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것이었다. 친구가 자리로 돌아와서 누군지 물어보니 놀라운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방금 인사를 건넨 사람이 동성애자인데 그 사람과 함께 동석한 남자가 그 애인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고개를 돌려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미 가슴은 심하게 뛰고 있었다. 친구의 말을 듣고 나서 그 사람의 행동 하나하나를 보니 과연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곱게 펴서 커피잔을 잡고 있는 것부터 손을 가리고 조심스럽게 웃는 모습, 동석한 사람을 바라보는 그 사람의 눈빛은 그 동안 알고있던 '보통'남자들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동성애자들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니나 대개는 어느 한 쪽이 여자의 역할을 맡는다는 친구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아주 나중이 되어서야 그때 친구가 내게 건넨 그 말조차 커다란 편견으로 가득 차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 날 우리가 그 카페를 나설 때 친구와 그 사람은 다시 한 번 인사를 나누었는데, 그 사람의 고운 미소가 그렇게 불편할 수가 없었다. 열린마음? 이미 그 카페에서 그 사람을 본 순간 여전히 내 마음이 굳게 닫혀있었음을 느껴버렸다.
나는 육체인가 마음인가?
단지 그 존재를 보는 것만으로도 바이러스처럼 내게 퍼져버릴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던 것은 비단 동성애뿐만 아니었다. 성(性)에 관련된 기존의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모든 존재들은 유독 극렬한 저항에 시달려야 했다. 우리는 흔히 처음부터 가지고 태어난 성이 있는데 보통은 서로 다른 이성끼리 매력을 느끼고 사랑에 빠지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분명 있을 것이다. 나와 같은 성기를 가지고 있고 나와 같은 동성임에도 이유없는 끌림을 느낄 수 있다. 많은 사회학자들은 그래서 처음부터 결정지어진 생물학적 성이 아닌, 사회학적 성을 스스로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동성애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동성애자들이 스스로를 합리적으로 변호하는 이유도 이 사회학적 성에 있다. 복잡하고 많은 이론을 간추릴 수는 없겠지만 그 요지는, 사회학적 성이라는 것이 우리가 자라면서 교육되고 강요된 것이므로 스스로 사회학적으로 어떤 존재인지, 어떤 성을 표현할 것인지 결정할 자유가 있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스스로의 성 정체성을 새롭게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동성애는 어느 정도 스스로에게 걸린 제약을 인정하면서 조금씩 성의 자유를 말하는 반면, 트랜스젠더는 조금 더 나아가 처음부터 결정지어진 육체에까지 그 의문을 던지게 된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성적 정체성을 확실히 하기 위해 스스로의 육체 역시 바꾸어나가는데 물론 이 역시 사회적으로 손쉽게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동성애와 트랜스젠더는 사회로부터 격리되어야 할 것, 대화는 할 수 있으나 포옹할 수는 없는 것, 그런 이들이 모든 문을 열고 우리 곁에 다가온다면 겉잡을 수 없이 사회 곳곳으로 바이러스처럼 파고 드는 것으로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아버렸다. 수잔 선택이 말한 은유로서의 질병은 동성애와 트랜스젠더에도 포함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이것처럼 확실하고 빠르게 퍼져버린 은유도 없을 것이다.
동성애와 트랜스젠더를 둘러싸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논쟁을 단순히 생각해보면 결국 나를 정의하는 것이 육체와 마음 중 어느 것에 더 가까운가 묻는 것에 이른다. 다시 쉽게 말해보면 내 몸이라는 것은 단순히 남에게 보여지는 것에서 그치는 것뿐인지 아니면 나의 의식은 결국 몸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인지, 몸과 마음 사이의 치열한 줄다리기와 같은 것이다. 물론 나와 너를 식별할 때 육체는 대단히 확실한 기준이 된다. 겉으로 보여지는 몸을 통해 너는 이런 것이고 나는 이런 것이라는 구분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그렇게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에만 나의 가치, 나의 존재, 나의 많은 것이 결정되는가에 대한 의문은 시대를 거치며 커져왔고 확실히 최근에는 몸 이면의 마음에 더욱 초점을 맞추기도 하고 있다. 이것이 노일초등학교에 위치한 도시갤러리프로젝트 <천개의 꿈> 앞에 서서 문득 들었던 고민이었다. 이 작품은 스스로 단 하나의 육체를 빌어 천 개의 꿈과 마음을 말하려하고 있었다. 궁금했다. 하나의 육체는 왜 하나의 마음만을 가둘 수 없는 것일까? 누구나 손쉽게 육체너머로 지나다닐 수 있다면 나의 몸이라는 건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것일까? 사람들이 기억하는 나의 모습은 겉에 보여지는 살갗인가 아니면 그 속에 감추어진 마음인가? 사실 이런 질문은 다양한 예술 작품 속에서 이미 수 차례 고민되었던 것이기도 하다.
마르셸 뒤샹과 자전거바퀴
마르셸 뒤샹이 1913년 <자전거바퀴>라는 작품을 선 보였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 작품의 조악성과 단순함에 놀라게 된다. 등받이가 없는 의자에 자전거 바퀴를 거꾸로 달아놓은 이 작품을 보고 도무지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작품 어디서 예술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뒤샹이 초기에 보여준 큐비즘의 다양한 실험정신은 같은 입체파로부터도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했는데, 그로부터 수 년 후 그의 존재감을 알리는 여러가지 작품들을 선 보이기 시작한다. <자전거바퀴>는 그렇게 큐비즘으로부터 다다이즘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예술 영역을 개척해나가는 뒤샹 의식의 중요한 전환점을 상징하는데, 이 작품을 출품하기 1년 전 열린 박람회에서 그는 함께 박람회를 찾은 친구에게 이런 말을 남긴다. 거대한 프로펠러를 보면서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프로펠러야말로 어쩌면 인류 역사상 가장 훌륭한 예술 작품일지도 모른다네, 우리 그걸 놓쳐선 안되겠지?" 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뒤샹의 그 말은 무슨 의미였을까?
서양미술사의 개론을 읽어보면, 과거 선사시대에 우리의 선조들이 동굴에 암각으로 남긴 벽화에서부터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 로마를 거쳐 근대 미술로 나아가면서 방법과 사상과 의미의 차이는 분명 존재했지만 한 가지 중요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작품의 외향에 작가의 정신을 담아 그 작품을 통해 작가와 관객들이 서로 교감을 나누었다는 점이다. 이는 다시 말해 작가가 말하려는 바를 어느 정도 예술 작품에 담아내려는 정신이 존재했다는 것이었다, 물론 시대마다 그 방법은 조금씩 달랐지만 말이다.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18세기 후반부터 유행하였던 신고전주의 학파를 돌아보자. 그리스 로마시대의 엄격한 구도, 황금 분할, 고대적 모티브, 냉철한 표현의 완성을 내세웠던 이 학파의 대표적인 다비드의 앵그르의 작품은 지금도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있다. 지금은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다비드의 <나폴레옹 대관식>을 살펴보자 가로 9.3m, 세로 6m에 이르는 이 거대한 작품은 누구의 시선이라도 한 눈에 압도하는데 그 속에는 냉정할만큼 엄격하게 재현된 인물간의 구도와 절제된 색채의 표현이 인상적이다. 이 시기의 회화는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주제를 일부러 사용하여 대중을 교화하고 감화하는데 사용하려는 목적을 어느 정도 갖고 있었는데, 누구라도 이 시기의 그림들을 통해 작가가 지금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즉 작가의 창조 행위를 통해 예술 작품의 외향이 만들어졌고, 또 이런 조형 행위야말로 예술 의도를 관객과 나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시간이 좀 더 지나 낭만주의와 사실주의 화풍이 등장하는 가운데 19세기 후반 인상주의가 등장했을 때에도 서양미술사에는 또 한 번의 변화가 일어난다. 프랑스 지베르니 정원의 아름다운 수련을 보며 그 정원에 피어난 수련을 끊임없이 스케치했던 클로드 모네(Claude Monet)를 생각해보면 이미 작품의 주제, 인물의 구도와 같이 기존의 예술 요소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이 때의 작가들은 빛에 의해 시시각각 변하는 한 사물의 다양한 모습을 담으려 노력하였다. 그 다양한 모습은 참으로 순간적인 것이라, 그에게는 짧은 시간내에 빛이 만들어내는 사물의 다양한 색과 명암의 조화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였고 그 결과 루앙대성당, 수련의 연못과 같은 일련의 연작 작품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는 또 한 번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인 르누아르(Renoir)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믈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1876년> 작품을 통해 그는 인상주의의 진정한 선언을 하게 되는데, 그 당시 무도회와 야외 술집의 즐거운 분위기를 풍부한 색채와 빛의 조화 그려내는데 집중하였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신고전주의 화풍에서 인상주의를 지나 고흐와 고갱의 후기 인상주의에 이르기까지 그 당시 작가들이 어느 것에 집중하는가는 정도의 차이는 있었으나, 그 중요한 시대정신을 작품의 외향을 통해 그려내고, 조각하고, 색칠하는 창조의 행위로 인식했다는 데에는 그 맥락이 이어져 있었다. 즉 여전히 작가들의 예술의식은 작품을 통해 구현되었고, 조금 더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오직 한 가지의 목적과 한 가지의 정신이 그 작품에 연결되어 표현되었던 것이다. 그 연결 고리는 그다지 자유롭지 않았고, 어떤 것이 캔버스 위에 표현되든 작가의 정신은 예술 작품의 외향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뒤샹이 <자전거바퀴>를 선보였을 때 그것은 기존의 조형행위와는 다른 창조를 가져왔다. 등받이가 없는 의자와 거꾸로 세워진 자전거바퀴 모두 주변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것이었고, 뒤샹은 단지 기존에 만들어진 사물들을 재조합하여 이어 붙였을 뿐이다. 흔히 <레디메이드>라 불리는 이러한 경향은 뒤샹이 서양미술사에 커다란 전환점을 가져온 예술정신이기도 했다. 예술가가 자신이 직접 제작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그것을 선택하고 전시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생각을 투영하고 표현할 수 있었다면, 세상의 어떤 것도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은 20세기 초의 예술 풍조에서는 파격적인 첫걸음이었다. 이는 기존의 예술 창조행위에 반기를 드는 행위이기도 했다.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작품은 진지한 고찰이 결여되어 있으며, 단순히 기존에 만들어진 사물을 연결하는 것만으로 어떻게 예술 작품이라고 명명할 수 있겠느냐고 반기를 들었다. 그래서 레디메이드에는 반 예술적 성격이 두드러졌지만 오히려 그는 이 반예술적인 실험으로 예술이 무엇인지 역으로 사람들에게 묻기에 이른다. 과연 예술이라는 것은 어떤 것을 표현하고 그것을 캔버스 위에 그려내고 만들어내는 행위에 지나지 않은가? 아니면 사물의 이치를 고민하고 그 이치에 대해 의문을 갖고 또 그 의문을 작품을 통해 사람들과 공유하려는 정신에 있는 것인가? 즉 미술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1917년 발표된 샘(Fontaine)에 이르러 정점에 다다른다.
남성용 소변기를 그대로 전시한 뒤샹의 이 작품은 레디메이드 작품의 절정이었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작가의 예술작품들을 감상할 때 얼마나 섬세한 붓터치를 선보였는지, 얼마나 다양하고 생동감 넘치는 색채를 사용했는지, 또 얼마나 독특한 소재를 위트있게 그려냈는지에 집착하지 않게 되었다. 왜냐하면 작가가 가져온 작품은 일상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사물이었고, 이제부터는 무엇을 얼마나 잘 그렸는가 보다는 어떻게 배치되었고 왜 그런 사물들이 선택되었는지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작가 역시 외향에 집착하지 않게 되었으나 그 작품을 받아들이는 관객역시 일종의 해석의 한계를 넘어서는 모험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기존까지의 화풍과 주제의식의 한계에 갇히지 않고 새로운 감각과 공감을 통해 그 속에 담긴 예술적 가치를 발견하는 즐거움을 찾아나서게 된 것이다. 대단한 혁신이었다. 겉으로의 질감에 한계를 두지 않고 그 속에 담긴 작가의 의식과 개념이 보다 자유롭게 춤을 추게 되었고, 이는 1960년대에 등장하는 개념미술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당신이 보고 있는 건 단지 내 몸이 아니다.
뒤샹이 레디메이드 작품을 통해 관객들과 나누고 싶었던 질문의 본질은 형태와 관념의 팽팽한 줄다리기였다. 창조 행위로서 탄생한 예술작품의 형태와 작가의 관념 중에서 예술을 보다 예술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을 두고 지금까지의 서양미술사는 시대를 관통하며 작가의 관념이 물론 중요함을 인정하였다. 어느 작품 하나라도 의미 없이 만들어진 것은 없으며 그 속에는 다분히 작가의 의도와 또 시대 정신, 혹은 개인적인 예술 사조가 담겨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뒤샹 이전까지 어느 정도 그 관념이라는 것이 예술 작품의 형태에 한정될 수 밖에 없다는 생각 또한 존재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는 "관념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형태를 벗어날 수는 없다" 라고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성(性)을 바라보는 기존의 시각과도 어느 정도 일치한다. 관념을 우리 모두의 의식과 영혼으로, 형태를 나의 육체로 바꾸어 말한다면 지금껏 우리는 육체보다 정신이 더 중요할 수 있다고 은연중에 교육 받아왔다. 남성으로서의 어떤 것, 여성으로서의 어떤 것에 있어 보다 고차원적인 인간 세계를 논할 때 단지 육체뿐만 아니라 개인의 의식이 더 넓은 무한대를 지향할 때 그것이 더욱 수준높은 삶임을 인정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한계는 너는 남성, 너는 여성이라는 생각을 벗어나지는 않았다. 즉 스스로 주어진 육체적인 성(性)을 인지하고 또 그것에 수긍한 세계관 속에서 의식을 무한대로 넓히려는 노력을 해왔던 것이다. 적어도 고전적인 성의 관념은 그랬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뒤샹이 "더 이상 형태는 중요하지 않다. 다시 말하면 어떤 형태를 어떻게 표현했느냐 하는 집착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어떤 형태가 아니라, 형태 속에 숨겨진 어떤 관념인 것이다" 라고 레디메이드 작품을 통해 선언했을 때 미술사적으로 이는 예술에 대한 재정의를 가능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졌지만, 동시에 육체와 정신의 줄다리기에도 적지 않은 시사점을 남기게 되었다. 즉 정신은 육체를 초월할 수 없다는 무의식을 벗어나, 그 육체가 내가 가공한 것이든 혹은 처음부터 주어진 것이든 중요한 것은 그 속에 담긴 의식, 관념, 정신, 영혼이라는 것이다. 이는 내가 나를 정의할 때 이제 단순히 어떤 육체를 보여주는지에 대한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였다. 나는 때로 해박하고 박식한 남성일수도 있고, 나는 때로 야만적이고 마초적인 육체미를 보여줄 수도 있으나 그것이 나의 남성성과 나의 존재를 모두 정의할 수는 없다. 나의 존재를 결정짓는 것은 나 스스로가 나를 어떻게 정의하고 그려나가는지에 대한 의식이며, 그 표현 과정에서 반드시 형태의 관념의 일치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다시 동성애로 돌아가보자. 동성을 사랑하는 것이 꼭 스스로의 성에 대한 부정일 수는 없으나, 여기 겉모습은 남성이나 스스로를 여성으로 받아들이려는 어느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우리는 그 사람의 육체와 형태를 보고, 아 이 사람은 남성이다 혹은 여성이다라고 정의하고 그를 이해하지만, 정작 그 사람은 본인의 육체와 몸과는 별개로 스스로를 정의하고 받아들일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의식이며 비록 그 의식이 겉으로 육체적으로 표현될 수는 없으나 그 관념이 분명 육체보다 우위에 있음은 분명하다.
뒤샹은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가? 그가 내세운 레디메이드는 기존의 창조행위가 아닌 작가의 선택행위 역시 예술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음을 선언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 작가의 선택행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작가의 관념이었다. 물론 이는 기존의 형태, 질감, 육체가 중요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육체와 형태라는 표현의 한계에서 벗어나, 독립된 관념과 정신만으로도 충분히 예술작품은 성립할 수 있고 마찬가지 이유로 정신은 나의 피부와 살갗을 벗어날 수는 없다는 고정관념을 바꾸어 놓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는 "과연 예술을 예술답게 성립하는 것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에 이어 "나라는 존재를 나 답게 성립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중요한 질문을 관객들에게 던지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사실 뒤샹이 - 실제로 그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 그의 작품을 통해 선 보이기 이전부터 육체와 영혼, 형태와 관념, 질감과 정신 사이의 끊임없이 전개되는 팽팽한 심리싸움은 오래 전부터 많은 현인들에 의해 연구되어 왔다. 재미있는 것은 그러한 연구가 철학, 신학의 손길을 거치면서 조금씩 관념의 손을 들어주어왔다는 점이었다. 더구나 이러한 경향은 동양과 서양 모두 공통적이었는데, 무겁게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관념과 정신이 단순히 겉으로 보여지는 육체보다 훨씬 아름답고 가치 있으며, 그 관념 속에서 미(美)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해왔던 것이다. 그 믿음은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 속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바로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아름답지만 슬픈 운명이다.
오르페우스는 아폴론과 칼리오페 사이에서 태어났다. 뮤즈였던 어머니의 피를 이어받았는지 그는 어려서부터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었는데, 어느 날 아버지인 아폴론에게서 현악기의 일종인 리라를 선물받게 된다. 신화에 따르면 오르페우스의 리라 연주 솜씨는 정말 훌륭함을 넘어 모든 존재에 감동을 전해주었다고 한다. 맹렬한 야수조차도 그의 리라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곁에 다가와 가장 유순한 동물이 되곤 했고, 나무와 풀잎조차 그의 음악을 더 가까이 듣기 위해 그가 있는 쪽으로 가지와 잎새를 휘었다. 그런 오르페우스가 커서 아르고스호의 원정에 참가했다가 훌쩍 성장하여 다시 돌아왔을 때 그는 아름다운 님프 에우리디케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이윽고 결혼하게 된다. 그렇게 남 부러울 것 없이 행복한 삶을 그려나가던 오르페우스에게 비극이 찾아온 것은 결혼한지 채 열흘이 되지 않았을 때였다. 아내 에우리디케가 친구들과 함께 올림포스 산 기슭으로 꽃을 꺾으러 갔는데, 이곳에서 양치기 청년 아리스타이오스를 만나게 된다. 아리스타이오스는 에우리디케의 미모에 반해 열정적으로 쫓아왔는데, 에우리디케가 그를 피해 달아나다가 독사에게 발꿈치를 물려 결국 숨을 거두게 된다. 오르페우스의 슬픔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더 이상 그의 리라 음악은 아름답지 못했고, 세상 모든 존재가 함께 슬퍼했다. 그러나 오르페우스는 도저히 사랑하는 아내를 그대로 저승에 보낼 수가 없었던지 대지의 여신인 데메테르를 찾아 도움을 청한다. 데메테르는 처음에는 이 청년의 간청을 마다했지만, 결국 저승으로 향하는 비밀 통로를 알려주게 된다.
오르페우스는 그녀가 일러준대로 저승으로 향했고 중간마다 그를 가로막는 이들에게 리라 음악을 들려주며 결국 저승의 왕 하데스와 그의 아내 페르세포네의 앞에 서게 된다. 그러니까 오르페우스의 이야기는 페르세포네가 하데스의 계략에 빠져 일 년의 절반은 저승에 머물게 된 그 후의 일인 셈이다. 재미있는 것은 아내 에우리디케를 살리려는 오르페우스의 집념이 어찌나 강했던지, 저승으로 향하는 아케론 강의 깐깐한 뱃사공 영감마저 리라 음악을 들려주며 감동시켰다는 사실이다. 우여곡절 끝에 오르페우스는 하데스 왕에게 간청하게 된다. "오 지하세계의 신들이여! 제가 여기 저승에 온 것은 다만 꽃다운 청춘에 독사에 물려 뜻하지 않은 죽음을 맞은 제 아내 에우리디케를 찾으러 온 것 뿐입니다. 사랑이 저를 이곳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간절히 원하노니 제 아내를 돌려주십시오. 몇 십 년 늦게 저승에 오는 것은 저승의 신들에게는 보잘 것 없는 시간이나 제게는 영원과도 같은 행복입니다." 이렇게 말하자 저승의 모든 존재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탄탈로스, 다나오스의 딸들, 시시포스, 복수의 여신들과 심지어 페르세포네도 함께 눈물을 흘리자 하데스는 결국 에우리디케를 오르페우스의 곁으로 돌려보내게 된다. 다만 조건이 있었다. 그녀의 손을 잡고 저승을 빠져나가 지상에 도착하기까지는 절대 그녀를 뒤돌아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오르페우스는 이 약속을 충실히 지켰다, 단 지상에 도착하기 바로 직전까지만 말이다. 지상세계로 나가는 출구에 거의 도착했을 때 밝은 빛이 보였고 오르페우스는 기쁜 나머지 에우리디케를 향해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 순간 에우리디케는 다시 지하 저승세계로 끌려갔다.
에우리디케는 두 번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저승의 신 하데스의 관대함에도 불구하고 오르페우스는 아내를 다시 잃게 되었고 다시는 그녀를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아케론 강가에 앉아 이전보다 훨씬 더 슬픈 목소리로 리라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저승의 그 누구도 오르페우스의 편이 되어주지 않았다. 카론 영감 역시 단호하게 그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렇게 칠일동안 리라를 연주했던 오르페우스는 결국 저승의 신들을 원망하고 그들의 잔인함을 매몰차게 비난하면서 지상으로 올라오게 된다. 스스로의 잘못으로 사랑하는 에우리디케를 데려오지 못한 오르페우스의 슬픔은 보통 큰 것이 아니었다. 그 누구도 에우리디케를 대신할 수 없었기에, 트라키아의 처녀들이 끈질기게 그에게 구애했음에도 그녀들의 달콤한 밀어를 단호하게 뿌리쳤다. 그러나 슬픔에 잠겨있던 오르페우스도 이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술의 신 디오니소스 축제 때 오르페우스 역시 참석했는데 술에 몹시 취한 트라키아의 처녀들이 그를 발견하자 큰 분노에 차 오르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구애를 끝내 거절한 오르페우스를 향해 그녀들이 들고 있던 창과 돌을 던졌고, 오르페우스는 이내 피를 쏟으며 죽게 된다. 트라키아의 처녀들은 그가 죽었음에도 분이 풀리지 않던지 그의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 리라와 함께 강가에 버린다. 강물에 떠내려가던 오르페우스의 머리와 리라를 발견한 뮤즈의 여신들은 그가 뮤즈 칼리오페의 아들임을 알고 오르페우스의 몸을 수습하여 무덤을 만들어주었다. 제우스는 이런 오르페우스의 운명을 가엾이 여겨 그의 리라를 하늘의 별자리로 만들어주었는데, 이게 오늘날의 거문고자리다. 과연 오르페우스는 불행했을까? 혼령이 된 그는 저승으로 내려가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케를 만날 수 있었다. 삶과 죽음은 서로 양립할 수 없었고 죽음은 죽음으로 동등하게 나란히 할 수 있었다. 이제 오르페우스는 마음껏 뒤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에우리디케는 어디론가 사라지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것이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슬프지만 아름다운 사랑이며, 신화 속에 등장하는 이야기다.
이 오르페우스 신화는 훗날 영혼의 불멸을 이야기하는 오르페우스교의 창시를 낳기도 한다. 이름 오르피즘이라고도 불렀는데 이들은 본디 인간에게는 순수한 영혼이 있으나 육체에 갇혀 있기 때문에 타락할 수 밖에 없다고 믿었다. 때문에 엄격한 수련과 육체의 제약을 통해 영혼의 순수성을 회복하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오르페우스의 사지가 트라키아 처녀들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 나간 후에야 비로소 저승에서 온전한 행복을 찾을 수 있던 것처럼 그들에게 육체란 단순히 영혼을 타락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고 때문에 형태와 관념의 줄다리기에서 관념이 손쉽게 승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해답으로 좀 더 가혹한 시련을 육체에 가하여 영혼의 해방을 추구하려고 하였다.
미시마 유키오, 그리고 탐미주의
흥미로운 것은 정신이 육체보다 더 우월하며 그 순수성을 회복하여야 한다는 기본 전제는 같음에도 그 해답은 정 반대로 제시한 예술 풍조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오늘 날 일본의 대표적인 극우작가로 잘 알려져 있는 미시마 유키오는 1925년에 태어났다. 본명은 히라오카 기미타케, 그러나 필명인 미시마 유키오로 더 잘 알려져 있는 그는 그의 일본 전후세대의 혼란스러움을 탐미주의의 형태로 풀어내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갔다. 탐미주의라는 것은 훗날 사람들이 이름을 붙였겠으나 간단히 생각해보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아름다움의 극대화를 위해 존재한다고 여기는 풍조이다. 그래서 쾌락, 낭만, 에로티즘이 강하게 드러나게 되는데 그의 장편 데뷔작은 <가면의 고백>과 1956년 발표한 그의 대표 작품 <금각사)를 통해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에로티즘과 쾌락의 탐닉이 얼마나 극으로 향할 수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미시마 유키오는 1960년 <우국>이라는 작품을 선보이면서부터 급진적인 민족주의자의 모습을 보이게 되는데 이 덕분에 동경대 전공투와의 대담 등을 거치며 작가 이상의 사회운동가적인 면모를 보이게 된다. 그런 그가 일본 천황의 복권과 자위대의 부활을 외치며 1970년 육상자위대 건물에 침입하여 자신의 요구사항을 말하다가 끝내 그 자리에서 할복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인생의 끝을 비극적으로 마무리하기도 한다.
미시마 유키오가 말한 탐미주의, 극단의 에로티시즘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 고민은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신화에 드러난 관념과 육체사이의 줄다리기에서 시작한다. 미시마 유키오 역시 오르페우스 사상처럼 육체보다 영혼이 더 순수하며 인간은 일생을 통해 그 순수성을 경험하고 또 회복하려는 과정에 있음을 인지한다. 그러나 그는 약간 독특한 생각을 펼친다. 인간의 영혼이 순수하고 또는 우리가 성취해야 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이는 현실에서는 결코 이룰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죽어야만 영혼이 되며, 결국 완전무결한 순수성이라는 것은 죽음을 맞이한 순간 비로소 얻게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어야만 비로소 완전함을 넘어선 온전함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좀 더 극단적으로 진화하여 그 죽음을 현실로 끌어오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어떻게보면 죽음이라는 것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쾌락과 에로티시즘의 결정체이며 그 정도는 죽음을 앞둔 직전에 가장 극대화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을 앞둔 순간의 쾌락과 에로티시즘을 나의 육체에 아낌없이 주어야 하며 그 과정을 거칠 때 비로소 참된 아름다움을 얻게 된다. 이것이 미시마 유키오가 그의 문학작품을 통해 밝힌 죽음의 미학이다. 실제로 그는 그의 삶 내내 그 죽음의 미학에 따라 육체의 아름다움을 가꾸려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어린시절 병약하고 마른 몸인 것이 콤플렉스였던 그는 청년이 되어 보디빌딩에 심취하였고 수 년간 검도를 하며 육체를 땀으로 가꾸기도 했다. 결국 1970년 자위대의 부활을 외치며 할복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 역시 그가 평소 말한 죽음의 미학의 완성이었던 것이다.
관념은 형태보다 중요하다는 같은 뿌리에서 시작하여, 오르페우스는 결국 엄격한 수련을 통해 형태를 버리고 관념의 손을 들어주었던 반면 미시마 유키오는 관념이라는 것은 죽음 직전에 가장 아름다울 것이며 따라서 죽음에서 얻어지는 쾌락과 에로티시즘을 내가 살아있을 때 육체에 부여하는 것을 중요하게 보았다. 관념과 형태의 대립이라는 큰 줄기 아래 이처럼 다양한 생각들이 예술작품을 통해 저마다 다르게 해석되고 전개되었던 점은 분명 이 줄다리기가 쉽게 매듭지어질 수 없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천 개의 꿈
처음 동성애에 대한 가벼운 생각에서 시작하여 뒤샹의 <레디메이드>, 그리스 로마 신화의 <오르페우스>이야기와 미시마 유키오의 <죽음의 미학>에 이르기까지 예술 작품을 통해 살펴본 다양한 "관념과 형태의 대립"은 그것들이 지향하는 바도 다르며 또 그들 나름대로 정의하는 해답 역시 수 천개로 달라 어느 하나의 선택이 옳다고 볼 수는 없었다.
서울 강북에 위치한 노일초등학교 운동장을 가로지르면 뒤 편에 도시갤러리프로젝트 <천 개의 꿈> 작품이 조성되어 있다. 지금껏 살펴본 다른 프로젝트에 비해 이 작품은 상당히 간단한 구조를 취하고 있다. 콘크리트로 벽을 세워 놓아 그것이 하나의 벽면임을 알게 하고 철골 기둥을 세워놓아 그것이 전체적으로 집의 형태를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왜 작가는 집도 아니며 집이 아닌 것도 아닌 작품을 생각했을까? 작품의 이름처럼 이 집을 드나들며 다양한 행사와 액티비티가 열리길 작가는 의도했다. 즉 이 조형물은 어느 목적을 지닌 것이 아니며 이 곳에 터를 잡은 그 누구라도 각자의 의도와 목적에 맞게 다양한, 수 천개의 공간을 연출할 수 있다. 실제로 <천 개의 꿈>은 다양한 용도로 활용된다. 초등학교 어린이들이 이 곳에 앉아 음악회를 열기도 하고, 사생대회를 열기도 하고 때로는 삼삼오오 모여서 숨박꼭질을 하기도 한다. 실제로 이 집은 여기저기 숨고 뛰어다니며 즐기기에 아주 적합하다. 그리하여 수 많은 초등학생들이 저마다 이곳에서 저마다의 꿈을 키워나가서 천 개의 꿈이 이 집에서 무럭무럭 자라난다. 그래서 이 작품이 다른 조형물들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점이 바로 최소한의 형태를 통해 최대한의 관념을 허용하게 하였다는 점이다. 어떤 예술 작품을 만들었을 때, 그 탄생의 순간 이후부터 관객들과 호흡하고 서로 해석되고 이해되는 과정을 거치며 여전히 작가의 의도와 작품의 형태는 중요하게 자리잡는다. 왜냐하면 작품의 형태를 통해 작가와 관객이 서로 교감을 나누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 개의 꿈>은 그 과정을 과감히 생략했다. 작품의 창조 이후에 끊임없이 해석되고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주체를 온전히 관객들끼리의 몫으로 돌린 것이다. 이 작품이 여기 세워지고나서부터는, 이 작품이 어느 하나로 규정되지 않은 최소한의 형태를 가진 순간부터 셀 수 없는 관객들이 이 작품을 이용하고, 이해하고, 해석하면서 그들 스스로 저마다 가진 관념을 무한대로 확장시켜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예술 작품이라는 형태도, 작가라는 껍데기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 콘크리트 벽과 철골 구조는 단지 운동장을 부유하는 관념의 터를 만들어주며 누구라도 손쉽게 저마다의 꿈을 이 열린 창틀 사이로 넘나들 수 있게 하고 있다.
결국 나는 육체인가, 마음인가?
처음 이 작품을 마주하고 들었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나라는 존재를 정의하는 것은 나의 육체인가 혹은 나의 마음인가? 영화 <트랜스아메리카>의 트랜스젠더 "브리"나, <천하장사 마돈나>의 여자가 되고 싶은 소년 "동구"처럼 우리는 일생을 두고 어떤 것이 나의 진실된 단면인지, 그리고 그 진실된 단면을 찾기 위해서는 육체와 마음 중 어느 것에 더 집중해야 하는지 고민하며 살아간다. 중요한 것은 서로가 공생 관계에 있다는 점이다. 관념은 우리의 생각과 의식의 자유를 가져다 주지만, 타인과의 구분에 있어 육체만큼 나를 확실하게 정의하고 정의내리는 것도 없게 된다. 여기서 우리 모두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곱씹어볼만하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어떻게든 너와 내가 다르다는 구분이 필요하다는 것이며, 육체와 관념의 조화 속에서 스스로에 대한 정의가 내려질 때 우리가 안고 있는 고민의 무게도 조금 덜어질 것이다.
도시갤러리프로젝트 <천 개의 꿈>은 그 고민마저 유연하게 할 것을 말한다. 물론 이 작품은 최소한의 육체를 통해 최대한의 정신을 교류하게 하고 소통하는 목적을 지니고 있지만, 그렇다고 육체와 정신 중 어느 한 편만을 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팽팽한 줄다리기에서 어느 손을 더 힘차게 잡고 어느 손을 슬쩍 놓아버리느냐에 대한 선택은 개인의 몫이 될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꾸는 꿈이 어느 하나가 아니며 수 천 개의, 수 만 개의 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트랜스아메리카에서 자신이 남자였을 때 낳았던 아들을 데리고 미국을 횡단하는 여자 브리가 그의 아들에게 남긴 한 마디는 두고두고 곱씹어볼만하다. "내 몸은 재가공품일지 모르지만 내 영혼에는 아무 문제도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