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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기행] 현저동 서대문형무소, 슬픔도 자라면 꽃으로 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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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저동 서대문형무소, 슬픔도 자라면 꽃으로 피리




황정운
SK에너지 에너지정책팀 대리






뮤지컬 <영웅>

2010년 10월 21일에는 제 16회 한국 뮤지컬 대상 시상식이 여의도 KBS홀에서 열렸습니다. 이 날 오프닝 무대는 창작 뮤지컬 <영웅>에 1막 마지막 뮤직 넘버인 "그 날을 기약하며" 였습니다. 안중근 의사와 애국 열사들이 태극기를 꺼내며 이토 히로부미 저격이 성공하기를 다짐하는 내용인데 이 뮤지컬에 나오는 많은 노래가 큰 인기를 얻었으나 이 노래는 더욱 각별한 사랑을 받기도 했습니다. 2009년 가을 뮤지컬 <영웅>이 처음 초연을 한 이후 최근 막을 내린 2010년 작품에 이르기까지 가장 핵심적인 인물인 안중근 역할을 맡았던 배우 정성화는 조금 독특한 커리어를 쌓아왔습니다. 1990년대에 드라마와 시트콤에 출연하며 다소 코믹한 캐릭터로 사람들에게 인지도를 쌓아왔는데, 그런 그에게 뮤지컬 배우로의 전향은 다소 무모하다고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뮤지컬 성격에 따라 때로는 진중한 역할을 맡기도 해야 하는데 그가 그 동안 구축한 캐릭터는 조금 가벼운 쪽으로 치우쳐 있었기 때문이었죠. 심지어 그는 1994년 SBS 공채 개그맨으로 데뷔한 경력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위의 우려와는 달리 멋지게 뮤지컬 배우로 변신했고 결국 그의 나이 서른 여섯에 한국 뮤지컬 대상의 영예를 얻게 됩니다. 늘 유쾌한 얼굴과 재치 있는 언변으로 유명한 정성화였지만 이 날 그가 보여준 대상 수상 소감은 다소 뜻밖이었습니다. 담담하게 자신이 왜 이 작품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할 수 있었는지 말해주었던 것이지요.
 
"사실 <영웅>이라는 작품이 시작하기 전에 저는 안중근 의사님이 도시락 폭탄을 던진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한심한 이 시대의 젊은이였습니다. 공연을 준비하면서 내가 지금 여기서 왜 이런 분에 넘치는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되었는지, 안중근이라는 이름 석자를 우리가 왜 기억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는 자랑스러운 대한국인이라는 커다란 자부심이었습니다."

- 제16회 한국 뮤지컬 대상 수상 소감 中 -
 

2001년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이 국내에서 초연을 열었던 것이 큰 기폭제가 되었다고 생각될 만큼 2000년대 이후 한국공연 계에서 뮤지컬은 점점 대중적인 인기를 얻어 왔습니다. 브로드웨이의 유명한 작품들이 속속 국내에 소개가 되었고 꼭 규모가 크지 않더라도 실험정신이 가득하고 대중적인 인기도 높았던 다양한 작품들이 국내에 유입되면서 더불어 국내 창작뮤지컬의 수준도 향상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라이선스 뮤지컬에 밀려 국내 창작 뮤지컬은 큰 인기를 얻지 못했던 것이 사실인데, 관객들의 평을 들어보면 그 이유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국내 창작 뮤지컬은 지나치게 민족주의적 정서에 기댄다는 것이 그것이었죠.

가장 한국적인 정서도 때로 과하면 조금 부담스럽게 관객에게 다가갔던 것일까요. 최근의 <남한산성>, <대장금> 등의 창작 뮤지컬이 그 홍보에 비해 큰 내실을 거두지 못한 것은 어쩌면 이런 부담감도 영향을 일정 부분 주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장 뮤지컬을 왕성하게 소화할 젊은 관객들의 외면을 받았는데 뮤지컬 <영웅>은 달랐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이라는 지극히 민족주의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나 오히려 그를 담담한 시선으로 담아내 더욱 호평을 받았던 것이지요. 물론 화려한 화면 구성과 수준 높은 음악이 뒷받침했던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바로 그 순간 진정한 민족주의의 감동이 젊은이들 사이에 퍼져나갔고 더욱 도마 안중근 의사를 알기 위한 젊은이들의 관심이 모아졌습니다. 한 편으로는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아주 가까운 곳에 바로 그 당시의 우리의 슬픈 과거가 고스란히 기억되고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은 듯 합니다. 그것도 아주 생생하게 말이지요. 바로 지금의 서대문구 현저동에 위치한 서대문 형무소가 그 장소입니다.
 
 


 
현저동 서대문 형무소
사실 이날 서대문 형무소를 방문할 계획은 아니었습니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진행하는 <이미지의 틈> 전시를 보고 나서 오랜만에 정동 일대를 둘러보다가 이내 강북삼성병원이 있는 교남동으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이 피격 당했던 경교장을 잠시 들렸다가 사직공원 근처의 서울시립어린이도서관에 가려고 마을버스를 탔다가 잘못 내려서 그만 엉뚱하게 독립문 근처에 내리게 되었던 것이지요. 다시 사직공원으로 가긴 애매했고 마침 눈에 독립문이 들어와서 한 바퀴 가볍게 산책이나 할 겸 독립공원으로 들어갔습니다.

1896년 독립협회가 조선의 영구적인 독립을 선언하기 위해 세운 독립문은 사실 이곳에 있지 않고, 사거리 건너편의 종로 교북동에 위치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1970년대 말에 지금의 현저동에 위치하게 되었는데 독립문 뒤로 서재필 선생의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송재 서재필 선생은 참 위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구한말의 의학자이자 갑신정변을 일으킨 혁명가이기도 했고 또 조선 계몽에도 앞선 교육자이기도 했으니까요. 또 1890년 한국인 최초로 미국 시민권자를 취득한 기록도 가지고 있습니다. 결혼도 미국인과 했더군요. 그래서인지 귀국해서도 미국 이름인 필립 제이슨을 사용하다가 이를 한문으로 읽은 "피제손" 이라는 다소 기괴한 이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서재필의 동상은 미국 워싱턴에도 세워져 있습니다. 그런 서재필 선생의 동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북쪽으로 길게 나 있는 대로를 따라 가볍게 걸어가다 보니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 보였습니다. 처음에는 붉은 벽돌로 세운 벽이 꼭 옛날 영화에나 나올 법한 무시무시한 감옥 벽처럼 생겼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실제 가까이서 보니 정말 서대문형무소의 벽돌 벽이었습니다.

정신이 차려 고개를 들어보니 망루가 있었고 그 너머로 정말 형무소가 보였습니다. 그 광경만으로도 이유 없이 가슴이 옥죄어오는 것이 느껴졌고 입장료 1500원을 내고 얼른 안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구한말이 직면했던 외세 침략과 일제시대의 가혹한 폭정을 생생하게 살린 박물관을 둘러보고는 이내 넓은 형무소 곳곳을 둘러보기 시작했습니다. 그건 정동에 있던 근대 건축물과는 또 다른 일제의 모습을 전해주었습니다. 정동제일교회, 배재학당, 이화여고와 같이 정동 곳곳에 위치한 신식 건축물들을 보며 비록 혼란스러웠으나 이곳이 구한말이 근대화되는 의미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했는데 현저동 서대문형무소의 그것은 좀 더 차갑고 딱딱하며 냉기 서린 느낌을 주었습니다.

흡사 붉은 벽돌이 이곳에 수감되어 있던 애국지사들의 피와 눈물로 번져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 감정의 절정은 서대문형무소 한 편에 위치한 사형대로 향하며 더욱 고조되었습니다. 지금은 원래 규모의 절반도 남아있지 않은 서대문형무소 한 구석에 사형대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는데 그 앞에는 오래된 미루나무가 심어져 있습니다. 그 앞의 설명을 읽어보니 "통곡의 미루나무" 라고 합니다. 왜 통곡의 미루나무일까요? 사형이 집행되고 사형대로 끌려가던 애국지사들이 이 미루나무를 붙잡고 끝내 애국하지 못하고 먼저 죽음을 맞이하는 안타까움을 말하며 통곡하여 이 미루나무의 이름이 그렇게 불려졌다고 합니다. 불과 수 분 후면 자신의 목숨이 다할 텐데 그때의 고통과 감정의 격정이 얼마나 클까요. 더구나 지나가는 방문객조차 가슴을 얼어붙게 만드는 높은 붉은 벽돌 담과 이끼와 먼지가 가득한 창문 너머로 매달린 동아줄을 보며 아무리 담력이 큰 애국지사여도 끝까지 마음을 굳게 먹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통곡의 미루나무를 천천히 올려보며 사형대 입구에 섰습니다. 다른 장소보다 두 배는 더 높은 벽돌 담으로 둘러져 있는 사형대 입구는 좁고 낮았습니다. 마침 습하고 포근한 날씨라 겨울 내내 얼었던 눈이 녹아 사형대 주변은 질척거렸습니다. 그 기묘한 질척거림을 밟으며 한 걸음씩 사형대로 다가가서 그 안을 살펴보았습니다. 단어로 모두 옮겨 적을 수 없는 기묘한 기분이 들더군요. 사형대를 돌아 뒤로 가보니 지하로 내려가는 가파른 돌계단이 보였습니다. 사형을 집행하고 바닥으로 떨어진 시신을 처리하는 공간이 별도로 이어져 있습니다. 다시 눈을 들어보니 사형대에 나 있는 작고 두꺼운 창문은 간간히 금이 가있고 먼지가 가득했습니다. 처음 이 사형대를 지었을 때를 상상하기란 어렵지만 지금 이곳은 새파랗게 날 서있는 죽음의 공간이었습니다. 하여 나는 슬며시 두려운 마음이 들었고 도망치듯 사형대를 빠져나갔습니다.
 
다시 밖으로 나와 만난 서대문형무소는 처음 생각 없이 이곳에 발걸음을 들여놓았던 한 시간 전과는 새삼 다르게 보였습니다. 한창 일제의 악행이 극에 달할 때는 이곳에 2만 명이 족히 넘는 애국지사들이 갇혀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문을 받고 또 많은 사람들이 저 사형대에서 차갑고 어둡게 죽음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이 지나 이곳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라 이름 지어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이런 장소가 여기 있었음을 기억하려 하지만 직접 마주한 서대문형무소는 생각보다 더 많은 생각을 남겼습니다.



 
 
슬픔도 자라면 꽃으로 피리
서울시립미술관 뒤편에 자리잡은 옛 배재학당동관을 둘러보며 이곳이 1916년 건립될 때 남겼던 표지 비석을 오래도록 바라 보았습니다. 그리고 정동극장과 경향신문사 방향으로 길을 돌려 나오며 나는 작은 글귀를 보았습니다. "슬픔도 자라면 꽃으로 피리" 라는 글귀였는데, 우간다 에이즈 아동 후원을 위한 사진전이 세브란스 병원에서 열린다는 포스터였습니다. 그때까지 몰랐던 감정이 서대문형무소를 나오며 새삼 무겁게 생겨났습니다. 우리가 책과 영화를 통해 배운 역사라는 것은 실제로는 생각보다 무거운 시대적인 아픔이었고 또는 그 시대에 희생된 개개인의 슬픔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유독 슬픔과 아픔의 역사가 많았다고 스스로 생각해 왔습니다. 특히 구한말에서 근대를 지나 현대로 넘어오며 우리의 삶은 늘 고달팠고 녹록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서대문형무소는 가깝게는 우리가 일제시대에 어떤 슬픔을 겪었는지, 멀리로는 20세기가 시작되며 물밀듯이 조선에 밀어 닥친 근대의 바람이라는 것이 어떻게 슬픈 역사를 낳았는지 그 일부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겨울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차가운 바람이 잦아들고 아침 저녁의 온도가 올라가기 시작하면 현저동 서대문형무소의 들판에도 새파랗게 잎이 피어 오르고 꽃이 곳곳이 피어날 것입니다. 여기 묻혀있는 슬픔의 기억들이 자라고 자라 꽃으로 피어납니다. 나와 같은 요즘 세대들이 그 꽃이 왜 피어나는지 알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 꽃을 꺾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여전히 현저동에는 슬픈 시간이 느리게 흐르고 있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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