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허용선_여행 칼럼니스트
톨스토이(1828-1910년)는 푸슈킨,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작가다. 톨스토이의 대표작인 <전쟁과 평화>는 1864년부터 5년간에 걸쳐 완성한 작품이다. 세계문학사상 최고 걸작의 하나인 <전쟁과 평화>는 장편소설이라기보다는 웅대한 규모의 서사시다. 5백59명이나 되는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다 독특한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19세기 초의 러시아의 갖가지 인간상과 생활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금년은 톨스토이 서거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둔 모스크바 남부 시골 역인 ‘톨스토이 역(옛 이름 아스타포보 역)에선 해마다 추모행사가 열린다. 작가가 숨지기 직전 기차여행을 할 때 탔던 증기열차가 들어오면서 행사는 시작되는데 톨스토이 후손들과 그를 따르는 많은 문학 동호인들이 참가한다. <전쟁과 평화>, <부활>, <안나 카레니나> 등 많은 걸작을 남긴 톨스토이는 간디와 미국 킹 목사의 비폭력 사상에도 영향을 준 사상가이자 종교가였다. 톨스토이는 항상 인생에 대하여 절박한 고민을 체험하고 그 사상을 실천하려고 노력했던 작가다.
흥미로운 점은 이처럼 훌륭한 톨스토이를 정작 그의 조국인 러시아에선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100주년 추모식에는 어떠한 정부 차원의 행사가 없었고, TV 등에서도 보도가 없었다. 러시아 정교회는 톨스토이를 지금도 파문 중이며 정부 역시 그를 극단주의자로 여긴다. 하지만 톨스토이를 존경하는 사람들은 그가 정치색 없이 순수한 작가정신에서 인간적인 고뇌와 감정을 소설을 통해 표현했으며 바로 이점이 독자들의 심금을 울리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전쟁과 평화>에서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를 점령하고 시가지를 내려다 보았다는 곳이 레닌 언덕이다. 필자 역시 지난 여름 이곳에 서서 바라보니 앞은 광활한 초원지대이고 아스라이 먼곳에 모스크바 시가지가 보인다. 레인 언덕 뒤로는 커다란 고층건물인 모스크바 대학이 자리한다. 러시아의 우수한 영재들이 모여 공부하는 곳이다. 모스크바에서 톨스토이의 문학적 체취가 잘 느껴지는 곳은 그의 기념관이다. 톨스토이가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모스크바로 와서 1882년 하모프니키 거리의 집을 한 채 구입했으며 1901년까지 19년동안 이 집과 야스나야 팔라냐를 오가며 지냈다.
현재 이 집이 톨스토이 기념관이다. 조용하면서도 한적한 이집에서 그는 <전쟁과 평화>,<부활>, <이반 일리치의 죽음>, <예술이란 무엇인가> 등 명작을 저술했다. 집 내부에는 그가 사용하던 책상이나 펜 등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빨간색 나무판자 울타리가 길 따라 길게 늘어선 곳을 지나 정문으로 들어서면 역시 빨간색 2층 짜리 목조건물이 나타난다. 그 뒤쪽으로 넓은 정원이 있다. 톨스토이가 이 집을 선택한 것은 뒷정원이 넓고 이 지역이 귀족들이 사는 곳이 아닌 서민들의 거주지였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현관홀은 톨스토이가 나와 손님을 맞이하던 곳으로 호두나무 테의 거울이 걸렸고 긴 나무의자가 놓였다. 내부 첫방이 식당인데 식구들도 많고 손님들도 자주 오므로 식탁은 20명도 앉을 만큼 크다. 식탁에는 늘 톨스토이 왼편에 맏딸 다치아나, 오른편에 13번째 자식인 막내아들 이반이 앉았다.
큰 아이들이 쓰던 방을 지나면 톨스토이 부부의 침실이 있고 2층의 맨 끝이 서재다. 큰 창문이 하나, 작은 창문이 둘 있다. 그가 집필하던 진한 밤색의 책상 위에는 벚나무 뿌리로 만든 철필대 2개와 철필촉, 돌로 만든 잉크통, 청동 촛대가 둘, 그리고 톨스토이가 가필한 <부활> 고정쇄 한 장이 놓여있다.
<전쟁과 평화>에 나오는 보로디노 전투가 벌어진 곳은 모스크바 서쪽 110㎞ 지점의 모스크바 강 근처다. 1812년 8월 26일 보로디노까지 쳐들어온 나폴레옹 군을 맞아 러시아의 쿠트조프 장군 휘하의 러시아 군은 치열한 전투를 벌렸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대포 600문 이상의 장비를 갖춘 12만 러시아군을 상대로 13만 병력과 대포 500문 이상을 갖추고 승리하고 모스크바로 진격했다. 러시아 군은 약 4만 5,000명의 희생자를 냈으며 프랑스군은 약 3만 명이 죽거나 다쳤다. 현재 이곳에는 보로디노 전투 파노라마관이 만들어져 당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모스크바에 있던 프랑스 군대가 철군할 때 크레믈린 궁전에 있는 우스펜스키 사원 등의 황금을 모두 떼어가지고 갔다. 나중 300kg 이상의 금과 5톤의 은을 되찾은 러시아 군대는 우스펜스키 사원에 이것으로 화려한 샹들리에 등을 만들었다. <전쟁과 평화>의 작품에 나오는 인물 중 많은 사람은 톨스토이가 직접 알고 있던 사람들이다. 주인공들은 대부분 톨스토이 자신의 가문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다. 로스토프 가는 톨스토이의 아버지 쪽 친가이고, 볼콘스키 가는 어머니 쪽 외가다. 로스토프 노백작은 톨스토이의 조부요, 그의 아들 니콜라이는 톨스토이의 아버지다.
톨스토이의 생애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1828~1910)는 모스크바 남쪽으로 약 4시간 거리에 있는 야스나야 팔라냐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야스나야 팔라냐에서 톨스토이는 농민들의 삶을 보고 흥미로운 러시아의 민요와 민담,설화, 전설들을 들으면서 어려서부터 작가로써 견문을 넓혔다. 나중 이곳에서 그는 <전쟁과 평화> 등을 구상하고 썼다. 야스나야 폴랴나에 있는 톨스토이 기념관에는 가족과 작가가 사용하던 책상, 술잔, 시계 등이 보존되어 있다.
톨스토이는 대학진학을 위해 야스나야 팔라냐를 떠나 모스크바에 머무르다가 카잔으로 옮겨 카잔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다가 2년후 중퇴했다. 23세때는 맏형을 따라 카프카스로 떠나 육군 사관후보생이 되었다. 그가 문단에 등단한 것은 1852년 (24살 때) 코카서스에서 <유년시대>를 익명으로 발표하면서였다. 작가로 유명해진 것은 1855년 27세의 포병 중위로 <12월의 세바스토폴리>, <5월의 세바스토폴리>, <1855년 8월의 세바스토폴리> 등 일련의 세바스토폴리 시리즈를 발표하면서 부터이다. 그는 “나의 천직은 문학이다” (1855년 10월 20일 일기) 하고 작가가 되기를 결심했다. 이해 페테르부르그(레닌그라드)로 잠시 나왔을 때 톨스토이는 네크라소프, 투르게네프 등 대가들과 어울렸다.
톨스토이가 군적을 떠난 것은 이듬해인 1856년이었다. 36세에 <전쟁과 평화>를 썼으며 45세에 그의 최대 걸작 <안나 카레리나>를 발표했다. 52세에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요약 복음서> 등을 출간하고 71세에 <부활>을 완성했다. 톨스토이는 99번 교열을 보았다면 99번 고쳤을 것이다”라고 사람들이 말했을 만큼 그는 원고를 고치고 또 고쳤다. 82세의 나이로 죽어 고향인 야스나야 폴랴나에 묻혔다. 그는 외갓집 재산을 상속받아 부유한 작가였으며 소설가·사상가. 문명비평가로 활동했다. 또한 그는 인간해방운동가로서 자신이 물려받은 농노들을 해방시켰으며 그들이 해방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를 이해하지 못한 가족들로부터도 버림받은 채 시골역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작품 설명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1805년부터 1814년까지 9년간의 걸친 러시아의 5개 귀족가문의 역사를 다루고 있으며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을 배경으로 설명된다. 1864년에서 1869년까지 5년 동안 쓰인 작품으로 4편과 에필로그로 이루어져 있다. 소설 전반부에는 중심인물인 귀족들 생활과 외국에서 전투, 후반부에서는 국내에서 전투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사상적 문제가 다루어져 있다.
이 소설에 나오는 두 가문은 작가의 친족으로 주인공 나타샤는 처제인 티냐 베르스다. <전쟁과 평화>를 읽으면 보로디노 벌판에서의 러시아와 프랑스 양군의 전투,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점령, 모스크바의 대화재, 프랑스군의 퇴각 등 역사적인 대사건을 잘 알 수 있으며 전쟁의 참혹함과 피해 상황이 느껴진다. <전쟁과 평화>는 출간 당시 러시아에선 보기 드문 폴리포닉로망(다향적 소설) 형식으로 발표되었다. 즉 여러 명의 중심인물을 설정하고 그 주변에 다시 몇 사람의 주요인물을 배치하고 몇 가지 주제를 동시에 발전시켜가는 소설구성이다. 역사소설과 예술소설이 잘 조화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