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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스카니의 태양’ 촬영지 이탈리아 토스카나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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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스카니의 태양 촬영지 이탈리아 토스카나 여행

이동진 | 네이버영화평론가

한 번 보고 나면 작품 속 공간에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작품들이 있다. 이탈리아 관광청이 제작비를 대서 할리우드 제작진이 만든 홍보영화라고 해도 믿을 법한 다이언 레인 주연 투스카니의 태양(2003년작)을 처음 보았을 때, 언젠가 이 영화의 흔적을 좇아 이탈리아 곳곳을 누비리라고 결심했다. 소망은 몇 년 뒤에 이뤄졌다. 토스카나(투스카니는 영어 명칭) 지방의 피렌체와 코르토나에서 남부의 포시타노까지 자동차를 몰고서 누빈 봄 여행. 로마와 베네치아를 몇 차례 방문한 뒤 이젠 이탈리아를 알게 됐다고 여겼던 이전의 판단은 경솔한 착각이었다.

1. 피렌체의 햇살

기이한 날씨였다. 불과 두어 시간 남짓한 사이에 빗줄기를 뿌렸다가 다시 맑아지기를 두 차례나 반복했다. 피렌체 두오모(대성당) 앞에 도착했을 때는 돌풍이 거리를 휩쓸어 흡사 바람으로 샤워를 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파스텔 톤의 다양한 색상이 섞인 외벽에 붉은 돔을 지닌 이 성당은 웅장하면서 동시에 아기자기하게 예쁜 흔치 않은 매력을 지녔다. 유럽의 이름난 성당들을 꽤 많이 다녔지만 이만큼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곳은 드물었다.

이곳은 오랜 세월 함께 했던 남편으로부터 당신을 사랑한 적이 없어란 매정한 말과 함께 이혼을 요구받고 삶의 바닥에서 이탈리아로 도망치듯 떠났던 투스카니의 태양의 미국인 주인공 프랜시스(다이언 레인)의 첫 여행지였다.

여행 중 충동적으로 집을 사고서 이탈리아에 정착하게 된 프랜시스는 이곳에서 현지 남자와 사귀다가 다시금 실연의 쓰라림을 맛본다. 그러니까, 너무 크거나 지나치게 강렬한 것은 전모를 파악하기 어렵다. 사랑의 풍경은 언제나 클로즈업 앵글에만 담긴다. 연애는 미세한 감각을 극도로 예민하게 벼리는 대신, 거시적인 조망 능력을 어느새 잃게 만든다. 그래서 연인들은 뻔한 함정에 빠지고 쉽게 어리석어진다. 설혹 그 함정이 눈에 빤히 보이는 것이어도. 심지어 이전에 빠졌던 함정이라도.

한참을 둘러본 후 성당을 나설 때 또다시 비가 쏟아졌다. 이번에는 상당히 굵은 빗방울이었다. 갑작스런 일기의 변화에 당황하고 있자니 아랍계 우산 장수들이 경쟁적으로 내게 달려들었다. 5 유로( 8000)를 치른 뒤 망설임 없이 붉은색을 집어들었다. 단체 투어 버스에서 내리던 프랜시스가 펴든 것도 붉은색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것은 우산이 아니라 양산이었다. 색깔은 흉내낼 수 있어도 용도까지 맞출 수는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시간을 살아간다.

피렌체를 관통하는 아르노 강변을 따라서 천천히 걸었다. 피렌체의 또다른 명소들인 베키오 다리와 우피치 미술관을 지나 갖가지 조각상들로 공간 전체가 야외 미술관 같은 느낌을 주는 시뇨리아 광장에 이르는 사이에 하늘이 다시금 맑게 개었다. 다들 어디에 숨어 있다가 몰려나온 걸까. 비가 올 땐 시 전체가 텅 비고 우울한 느낌이었지만 광장엔 어느새 햇살을 만끽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부채살처럼 퍼져서 광장에 뿌려지는 빛 속에서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 보였다.

날씨가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훨씬 크다. 상상의 낙원 안에서 환희에 젖기도 하고 관계의 지옥 속에서 몸부림칠 때도 있지만, 어쩌면 인간의 내면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프랜시스라면 어땠을까. 그녀는 무엇을 떠올렸을까. 수십년 굳게 믿어오던 삶으로부터 배신당한 뒤 처음 발디딘 피렌체의 이렇게 눈부신 햇살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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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코르토나의 지붕

투스카니의 태양의 주무대인 코르토나는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완전히 다른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길을 묻고 또 물어 밤이 깊어서야 간신히 도착할 수 있었던 산 꼭대기의 소도시 코르토나는 거대한 벽으로 둘러싸인 성채였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작은 성문을 지나 골목길로 차를 몰다보니 요새 같은 구조에 자연스레 위압감이 느껴졌다. 좁은 길들의 급한 경사는 아찔할 정도였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호텔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볼 때부터 느낌이 완전히 바뀌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창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집들의 붉은 기와였다. 저 멀리 탁 트인 평원과 정감 어린 농촌 마을로 이뤄진 원경이, 세월의 더께를 이고서 자연을 닮아가는 기와의 근경과 어울리면서, 잊지 못할 그림 하나를 그려주었다. 피렌체에 이어서 코르토나에 들른 프랜시스가 이 도시의 풍광에 반해 충동적으로 집을 구입할 만도 했다.

한적한 아침의 코르토나는 깔끔하고 다정했다. 숙소 인근의 시뇨렐리 광장에는 영화 속에서 익히 보았던 시뇨렐리 극장이 있었다. 오전의 여유로움 속에서 광장을 거닐다가 극장 앞 가게에서 엽서를 골랐다. 세상의 그 어떤 미사여구도 부족하게 느껴지는 곳. 시장에서 산 포도에선 보라빛 달콤함이 가득하다라고 프랜시스가 적어 넣었던 그림엽서처럼, 해바라기가 탐스럽게 그려져 있는 것으로 샀다. 이메일이나 핸드폰 문자메시지가 아닌, 엽서나 편지를 써서 보냈던 게 도대체 몇 해 전이었던가. 손바닥만한 엽서에는 광장 같은 여백이 있었다.

담장 틈 사이에서 탐스럽게 피어난 들꽃에 한동안 마음을 주다가 영화 속에서 프랜시스가 구입했던 성 밖의 전원주택 브라마솔레를 향해 갔다.코르토나에서 브라마솔레로 가는 4 킬로미터 남짓 산길이 쉽지 않아 도중에 차를 멈추고 몇 차례 물었을 때, 이탈리아의 시골 사람들은 과도하다 싶을 정도의 친절로 안내를 해줬다. 내가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기색을 보였음에도 이탈리아 말로 한참 동안 장광설을 늘어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느 쪽이 지름길인지를 놓고 내 앞에서 영어로 의견 차이를 보이다가 결국 소리 높여 이탈리아 말로 언쟁을 벌이는 커플까지 있었다.

브라마솔레로 가는 작은 산길에서 이리저리 헤맬 때 자동차에서 굼베이 댄스 밴드의 히트곡 Sun Of Jamaica가 흘러 나왔다. 그 노래의 후렴구를 흥얼거리다가 문득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자메이카의 해변에 뜬 강렬한 태양을 상상했다. 이런, 아무리 흐린 날이라고 해도, 토스카나의 태양을 보러 와서 자메이카의 태양을 상상하다니. 어처구니 없게도 환상은 언제나 원심력으로 작용했다. 판타지는 발이 아니라 뇌로만 밟을 수 있는 영토였다.

가까스로 찾은 브라마솔레는 굳게 문이 잠겨 있었다. 주황색 벽과 붉은 기와를 가진 3층 집. 사유지인 그곳은 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고택이었다. 그러나 산 중턱의 멋진 전망을 가진, 잘 단장된 정원 위에 부드럽게 얹힌 그 집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그 집 앞에 머물렀던 잠시 동안에도 날씨가 급변했다. 잠시 해가 날 때는 아늑하고 정감 어린 곳이었지만, 세찬 바람이 불어올 때는 이 집에서 첫 밤을 보냈던 프랜시스의 두려움이 느껴질 정도였다. 브라마솔레라는 이름에는 태양을 갈망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브라마솔레를 산 프랜시스는 인부들을 고용해 대대적으로 손을 본다. 자신의 인생에 다시 빛과 열을 내려줄 태양을 갈망하면서 자신의 집을, 아니 자신의 삶을, 꼼꼼히 고쳐나가려 했던 것이다. 여행이라는 것 역시 나그네에겐 삐걱대는 삶을 수리하는 기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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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산세폴크로의 정적

산세폴크로는 도시 전체가 텅 비어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늦은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서 문을 연 식당을 찾아 헤매다가 간신히 레스토랑 하나를 발견했다. 나는 그 식당의 유일한 손님이었다. 할 일이 없었던 4명의 웨이터들은 내가 식사하는 내내 주위를 맴돌면서 신기한 듯 계속 말을 붙였다.

식사를 마치고 토레 디 베르타 광장으로 갔다. 투스카니의 태양에서 프랜시스의 집을 수리하던 폴란드 청년 파벨은 연인 키아라 앞에서 이탈리아인 이상으로 잘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 광장에서 열리는 전통 깃발 축제에 참가한다.

금요일 오후 세시. 토레 디 베르타 광장은 정적 속에 덩그마니 놓여 있었다. 한복판에 자리잡은 이동철제 화분 10여개가 오히려 처연했다. 지나가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광장을 에워싸고 있는 건물들의 나무 창문들 역시 대부분 굳게 잠겨 있었다. 파벨이 참가한 가운데 화려하게 펼쳐졌던 깃발 축제를 고요한 현장에서 상상하기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주변 건물 3층에서 창을 열고 머리에 화환을 쓴채 연인을 내려다보며 환하게 웃음지었던 키아라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촬영 장소에 가면 오히려 영화와 멀어지는 경험을 가끔씩 했다. 현장이 품고 있는 현재의 리얼리티는 은막이 구현했던 초시간적인 판타지를 종종 무화시켰다. 그렇기에 영화의 궤적을 좇아 떠나는 여행이 결국 기억에서 낭만을 제거하는 역설적 여정인 경우도 없지 않았다.

투스카니의 태양은 초반부터 해바라기 꽃밭을 인상적으로 스케치한다. 8월에 열린다는 토스카나의 태양 축제를 상징하는 것도 탐스러운 해바라기였다. 아닌 게 아니라, 토스카나 곳곳에서 해바라기를 수도 없이 발견했다. 그러나 가정집 베란다와 가게의 문 앞, 자동차 뒷유리창을 장식하고 있는 그 해바라기들은 모두가 조화(造花)였다.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살았던 프랑스 작가 스탕달은 아주 행복해지거나 무척 불행해져야 이탈리아에 갈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스탕달의 말을 들었더라면, 프랜시스도 아마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지금은 봄. 토스카나는 아직 해바라기의 계절을 맞지 못했다. 여름으로 향하는 계절은 아직 여름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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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포시타노의 바다

소렌토에서 시작하는 40 킬로미터의 코스티에라 아말피타나(아말피 해안)는 이탈리아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라고 할 만했다. 해안 절벽을 끼고서 굽이굽이 돌며 감겼다가 풀리는 해안 도로는 탄성이 절로 나올 만큼 탁월한 풍광을 내내 선사했다.

코스티에라 아말피타나에서도 가장 멋진 풍경은 투스카니의 태양에 등장했던 포시타노가 빚어냈다. 색색으로 아름답게 박힌 절벽의 집들은 강렬한 햇살을 조명 삼아 뽀얗게 빛났고, 미로 같은 골목은 천장까지 4면을 둘러싼 꽃 장식과 개성 넘치는 가게들로 눈길을 사로잡았다.

해변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서 걷다가 햇빛을 받아 온통 하얗게 빛나는 산타 마리아 아순타 성당을 지날 때 예식을 끝낸 하객들이 쏟아져 나왔다. 때마침 오후 4시가 되자 맑은 종소리가 성당의 종탑으로부터 흘러나와 마을 전체를 향해 푸르게 퍼져나갔다. 정말이지, 포시타노만큼 결혼식에 잘 어울리는 곳도 없을 것이다.

프랜시스 역시 이곳에서 만난 멋진 이탈리아 남자 마르첼로와의 낭만적인 결혼을 꿈꾸었다. 최악의 상황에서 다시 찾아온 사랑에 중년 여인은 가슴 설레며 달콤한 기대에 젖는다. 포시타노로 프랜시스를 데려온 마르첼로는 그녀에게 지역 특산주인 레몬첼로를 맛보게 하며 감미롭고도 능숙하게 사랑을 속삭인다.

음료수와 술을 전문적으로 파는 상점에 들어가 첼로 모양의 유리병에 담긴 레몬첼로 한 병을 샀다. 한 모금 맛보니 먼저 레몬향이 입천장으로 화사하게 퍼지며 휘발된 뒤 돗수 높은 알코올이 혀를 골고루 찌르며 가라앉았다. 단맛은 먼저 다가와 짧게 머물렀고 쓴맛은 나중에 찾아와 길게 남았다. 프랜시스를 다시금 들뜨게 했던 그 사랑처럼.

영화 속에서 마르첼로는 프랜시스에게 레몬첼로가 25 퍼센트의 설탕과 75 퍼센트의 알코올로 만들어진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삶의 맛도 혹시 그와 같은 게 아닐까. 25 퍼센트의 행복과 75 퍼센트의 불행, 혹은 환희 4분의 1과 권태 4분의 3. 출산을 앞둔 친구 때문에 마르첼로와의 약속을 몇 차례 미룰 수 밖에 없었던 프랜시스는 사랑을 찾아 다시 포시타노에 오지만 그 사이에 마르첼로가 다른 여자와 결혼해버린 사실을 알게 된다. 결국 그녀는 모든 좌절을 이겨낸다. 거듭해서 사랑을 잃고서야 이국의 마을에서 새로운 인생 행로를 발견한다.

그리스의 섬 카스텔로리조에서 뉴질랜드의 도시 크라이스트처치까지, 세계 각지를 다니다 보면 여행을 왔다가 그대로 눌러앉아서 새로운 인생을 사는 사람들과 종종 마주쳤다. 과연 여행을 삶으로 삼을 수 있을까. 그러면 인생이 휴가처럼 느껴질까. 마음만 고쳐 먹으면 정말 달라질 수 있을까. 훌훌 털고 미지의 세계로 떠나면 진정으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걸까.

레몬첼로의 값을 치르려고 가방을 뒤지던 손에 비행기표가 걸렸다. 다음날 오후 230. 내가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거기 적혀 있었다. 갑자기 포시타노의 사랑스러운 거리가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항구에서 인근 도시 아말피로 가는 배를 탔다. 절경의 해안을 따라 배가 달릴 때 처음엔 다른 사람들처럼 육지 쪽을 봤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돌려 망망대해를 바라봤다. 거기엔 모든 것을 침묵케 한 채 홀로 시퍼렇게 빛나는 바다의 실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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