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된 에너지 세금제도, 어떻게 개편할까
동아일보 경제부 이상훈 기자
가짜 석유. 박근혜 대통령이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시절부터 내놓은 ‘지하경제 양성화 정책’의 1호 타깃이다. 가짜 석유만 근절해도 연간 1조7000억 원의 세금 탈루를 막을 수 있다는 게 정부의 논리다. 국세청의 움직임도 빨라졌다. 예전처럼 사후 과세 방식의 소극적 대처가 아닌, 한국석유관리원의 정보를 미리 입수해 거래 흐름을 추적, 가짜 석유 유통을 사전에 막아 세수(稅收) 손실을 차단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박 대통령 취임 이틀 만인 2월 27일, 국세청은 가짜 석유 제조·판매업자 66명을 전격 세무조사하며 가짜 석유를 발본색원(拔本塞源)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세정 당국의 가짜 석유 근절 정책에 반대하는 국민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가짜 석유만큼 대규모 조직적 탈세가 이뤄지는 영역도 없다. 하지만 ‘무차별 때려잡기’ 식의 단속만으로 가짜 석유가 사라질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가짜 석유 업자를 처벌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암시장에서 가짜 석유가 유통되는 것을 차단하려면 ‘세금을 빼 먹겠다’는 유혹을 일으키는 근본 원인인 잘못된 에너지 관련 세금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차 힘을 얻고 있다.
세수 확보라는 정부의 단기적 재정목표에 맞춰져 중구난방으로 짜인 에너지 세제를 바로잡지 않은 채 가짜 석유 단속을 강화하고 에너지 절약을 강조하는 건, 어찌 보면 소비자들에게 ‘비(非)경제적 소비’를 강요하는 것과 다름없다. 조금 과장되게 비유하자면, 전국 곳곳에 카지노를 세운 뒤 ‘도박은 나쁜 것이니 중독되면 안 된다’고 홍보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특정 에너지원에 몰린 소비구조를 바로잡고 ‘친환경’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부합하는 정책기조를 마련하기 위해서도 에너지 세제개편이 필요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단순히 면세유 제도를 찔끔 손보는 것처럼 경제적 약자를 위한 이런저런 누더기 제도를 만들기에 앞서, ‘저탄소 친환경’이라는 중장기 국가적 과제에 맞춰 정밀하게 설계된 에너지 세제 청사진을 정부가 내놔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차 힘을 얻고 있다.
○ 에너지 세제는 ‘누더기(?)’
국제유가가 요동치며 휘발유값이 오를 때마다 정유업체들은 물가인상의 주범으로 지목 받는다. 휘발유값의 절반 가까이가 세금인 만큼 이를 내려야 한다는 목소리도 도처에서 터져 나온다. 정부가 면세유 유통을 엄격히 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치면 농어민들은 “알량한 면세유 갖고 왜 그렇게 짜게 구냐”며 반발한다. 사납금 내기에 바쁜 전국 수만 명의 택시기사를 고려한다면 액화석유가스(LPG) 부가가치세 면세제도는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될 정책이기도 하다. 결국 높은 세금부담은 승용차를 굴리는 샐러리맨, 트럭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업자 몫이다. 이들이라고 세금을 많이 내야 할 이유는 없지만, 빠져 나갈 이유가 마땅하지 않다 보니 본의 아니게 ‘예외 많은 세금제도’의 피해자(?)가 된 것이다.
대체 이들은 얼마나 세금을 내는 것일까. 그 구조가 너무 복잡하고 어려워 내 주머니에서 도대체 얼마가 세금으로 빠져 나가는지를 아는 이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주요 연료에 붙는 세금은 천차만별이다. 한국석유공사에 따르면 소비자가격의 50%가 세금인 휘발유에는 리터당 907.31원, 경유에는 675.94원의 세금이 붙는다. 반면 택시, 장애인 차량에 주로 쓰이는 액화석유가스(LPG)에는 137.14원, 난방용 연료이자 가짜 경유의 원료로 쓰이는 등유에는 206.54원이 매겨진다. 가짜 휘발유 첨가물인 벤젠 등 용제(溶劑)에는 별도의 유류세 없이 부가가치세만 75.76원이 붙는다.
가격 대비 세금 비중은 편차가 더욱 커 경유는 소비자가격의 41%가 세금이지만 LPG는 29%, 등유는 18%만 세금이다. 시내버스 등에 사용되는 수송용 액화천연가스(LNG)는 14%가 세금이고 전기는 용도에 따라 8∼12%에 불과하다. 국세청의 탈세 추징을 각오하고 가짜 석유를 만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세금 차이로 리터당 800원 넘게 남겨먹을 수 있는 장사이기 때문이다. 정부의 ‘에너지 절약’ 캠페인에도 불구하고 시스템 온풍기와 전기장판으로 난방을 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석유보다 전기가 훨씬 싸게 먹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세수 체계는 2000년부터 2007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마련됐다. 애초 취지는 합리적이었다. 세수 확보라는 1차적 목표와 함께 매연 배출의 주범인 경유 소비를 줄이는 것도 필요했다. 신용카드 사용, 현금거래 전산화 등이 확산되지 않다 보니 장애인 차량, 택시 등을 위해 별도의 세금감면 제도를 만드는 것보다 대체연료(LPG)를 허용해 주는 게 여러 모로 합리적이었다. 2002년 한일월드컵 개최를 앞두고 “월드컵 개최국에 매연버스가 왠 말이냐”는 논리는 CNG 버스 보급의 촉매제가 됐다. 휘발유, 경유는 이래저래 천덕꾸러기가 된 것이다.
문제는 이런 논리가 시간이 흐르며 퇴색되고 있다는 점이다. 한때 ‘매연의 대명사’로 지탄받았던 경유는 2000년대 중반 이후 클린디젤 엔진 개발이 가속화되면서 유럽을 중심으로 ‘친환경 연료’로 거듭나고 있다. 자동차에 따라 가장 친환경적 연료가 될 수 있는 게 디젤이지만, 정부는 아직도 경유자동차에 환경개선부담금을 부과하고 있다. 반면 LPG는 승용차나 다름없는 일부 승합차와 배기량 1000cc 미만 경차, 렌터카 등에 광범위하게 쓰이면서 ‘특수 용도에 쓰이는 연료’라는 본래 취지가 퇴색되고 있다. CNG 버스는 매연 배출이 적다는 이점이 여전히 크지만 연료 효율이 낮다 보니 온실가스 배출이 여타 에너지원보다 많다는 문제가 있다. 정부의 환경정책 기조가 매연 저감과 함께 온실가스 감축에 초점을 맞춰 간다는 점을 감안하면 시대적 흐름에 역행하는 모습이다.
전기요금이 낮아 발생하는 문제는 더 크다. 전기의 경우 세금이 낮고, 물가관리를 위해 요금 상승이 제한되다 보니 냉·난방용 소비가 크게 늘어 여름·겨울마다 전력난이 발생하고 있다. 에너지를 둘러싼 글로벌 환경이 바뀌고 환경오염에 대한 인식, 국민 생활수준, 하나 둘 씩 예외를 인정하는 무원칙한 정부 정책 등이 쌓이며 에너지 세금제도는 갈수록 왜곡되는 실정이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교수는 “정부가 왜곡된 에너지 세제와 보조금 제도를 유지하는 바람에 효율이 낮고 해외에서 수입해야 하는 LPG의 소비만 늘어나고 있다”며 “가짜 석유를 단속하자면서 정작 선행돼야 할 에너지 가격정책 재수립에 대해 당선인과 인수위가 손을 놓고 있는 건 말이 안 된다”고 비판했다.
○ 가짜 석유·에너지 과소비 막을 세제개편 필요
선진국을 중심으로 신재생에너지에 대한 관심과 화석연료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지는 최근의 현실을 감안할 때, 에너지 세제에 문제가 있다고 ‘일단 세금을 깎고 보자’는 식의 접근은 바람직하지 않다. 세금 인하에 따른 에너지 과소비와 교통 혼잡 등이 불보듯 뻔한 상황에서 당장의 소비자 부담 경감만을 주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쾌도난마(快刀亂麻)와 같은 해결방식은 없다. 국세청과 석유관리원이 매일 전국의 모든 주유소를 단속하지 않는 한 가짜 석유를 100% 근절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일까. 가짜 석유 관리 강화도 중요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가짜 석유를 만들 유인을 없애고 에너지 과소비를 막을 수 있게 세금정책을 다시 짤 필요가 있다. 단속 강화와 함께 가짜 석유 원료인 등유와 용제의 세금을 높이는 방안은 대안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서민층의 난방비 부담이 커지는 등 부작용이 우려되지만 가짜 석유의 폐해가 크다면 과감한 결단을 내릴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박광수 에너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가짜 석유는 휘발유, 경유의 세금이 다른 에너지에 비해 지나치게 높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며 “틈새시장을 차단하려면 세금 차이를 해소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클린디젤 택시 및 버스의 보급도 생각해 볼 수 있는 아이디어다.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이 발효된 지금, 디젤차 수요가 많은 유럽 자동차시장을 공략할 수 있는 무기가 될 수도 있다. 글로벌 자동차 시장 공략 및 온실가스 감축 등이 고려돼야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인가 클린디젤 논의가 정유업체와 가스업체간, 또 이들을 대표하는 주무 부처(산업통상자원부와 환경부)간의 ‘감정싸움’으로 흐르는 양상이다. 특정 업계의 손을 들어주는 방식의 정책은 지양해야 하지만, 본질적으로 어떤 방향이 소비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지를 감안해 정부와 업계가 머리를 맞대고 생산적 고민을 한다면 의미 있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개인들의 승용차 이용을 줄이기 위해 전체적인 에너지 세율 인상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없지 않다. 휘발유를 담배, 술과 같은 ‘외부 비경제’(다른 사람에게 의도하지 않은 손해를 입혀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키는 것) 항목으로 보고 세금을 높게 책정하는 게 세계적인 흐름이라는 것이다. 인도네시아의 사례는 휘발유에 잘못된 정부 보조가 이뤄졌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산유국이면서도 정제시설이 부족해 휘발유를 수입하는 인도네시아에서는 휘발유에 정부 보조금이 있어 국민들이 리터당 0.5달러에 휘발유를 살 수 있다. 연간 정부 예산의 3분의 1이 휘발유 보조금으로 쓰이는 바람에 정작 사회기반시설 및 복지에 투입할 재원이 부족해 경기가 침체되고 자국 정유산업을 키우지 못하는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있다.
가장 중요한 건 다른 에너지에 비해 지나치게 높지 않으면서도 과소비를 막을 수 있는 ‘적절하고 합리적인’ 수준의 유류세가 매겨져야 한다는 점이다. 최근의 전기 과소비, 가짜 석유 양산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비합리적인 에너지 세제는 지하경제를 양산하고 국가 전체의 에너지 믹스(mix)에도 악영향을 주기 마련이다. 농어민 면세유, 택시연료 비과세 등은 최소화하면서 당초 목적대로 쓰이는 지를 꼼꼼하게 감시할 필요가 있다. 국가산업 발전과 소비자 만족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는, 그러면서도 향후 지속가능한 환경을 유지할 수 있게 할 ‘솔로몬의 지혜’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