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산업이 내수산업이라고?
윤정현 한국경제 산업부 기자
#‘나는 원유입니다’라는 나레이션으로 시작하는 GS칼텍스 광고는 지난해 선보였다. 이 광고는 ‘나의 고향은 중동이지만 제 2의 고향은 한국입니다. GS칼텍스에서 에너지로 다시 태어나 지금 세계로 나아갑니다.’라는 음성으로 이어진다. 마지막은 ‘매출의 반 이상 19조원 수출(2010년 기준), 대한민국에 힘이 되는 에너지’로 장식한다.
#‘산유국에 에너지를 수출하다. 유전을 개발하고 수출하다. 미래 에너지를 수출하다.’ SK이노베이션이 11월부터 선보이고 있는 광고의 카피다. 올해 선보이기 시작한 애니메이션 시리즈 광고 ‘광구개발편’부터 ‘전기차 배터리편’과 ‘창립 50주년편’에 이은 ‘수출편’이다. 이 광고의 마지막 화면엔 이런 문구가 뜬다. ‘112개국 150조원 대한민국의 자존심을 수출하다’
SK이노베이션과 GS칼텍스처럼 한국을 대표하는 정유사들이 이처럼 수출을 강조하고 나선 이유는 무엇일까. 정유는 대표적인 내수 산업이라는 ‘편견’과 기름값을 올려 돈을 번다는 ‘오해’ 때문이다. 석유제품은 올해 국내 수출 품목 중 사상 처음 1위를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거둔 쾌거다. 그럼에도 ‘기름값 상승 주범’으로 정유사들을 겨냥한 정부의 기름값 대책은 갈수록 강도를 더해가고 있다. 최고의 수출 실적에도 불구하고 정유사들은 여전히 ‘공공의 적’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이다.
◆ 한국의 수출 1위 제품군은?
한국의 수출 1위 제품군은 자동차도 아니고 무선통신기기도 아니다. 반도체는 2010년, 선박류는 지난해 1위였다. 그러나 올해는 단연 휘발유와 경유 등 석유제품이 선두다.
석유제품 수출은 국내 수출 증가세를 이끌고 있다. 지식경제부에 따르면 지난 10월 석유제품 수출액(잠정)은 51억9600만 달러로, 2위를 기록한 반도체(46억 달러)를 큰 폭으로 제치고 올 들어 10개월째 1위 자리를 지켰다. 한국 전체 수출액(471억6천1백만달러)의 11%에 해당하는 규모로, 전년 동기 대비 27.7% 증가한 수치다. 수출물량도 전년 동기 대비 12%나 증가한 3820만배럴을 기록했다.
올해 1월부터 10월까지 누적으로도 전년 동기 대비 10%나 증가한 467억 달러를 수출하며 수출효자 역할을 하고 있다. 석유제품이 전체 수출액에서 차지하는 비중 역시 2010년 6.8%에서 지난해엔 9.3%, 올해는 10월까지 10.3%로 점진적인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수출국 별로는 국내 석유제품을 가장 많이 수입하는 중국으로의 수출은 전년 동기 대비 18% 감소했지만 인도네시아 등의 신흥국으로의 수출은 72% 가량 증가했다. 특히 중남미로의 수출이 전년 동기 대비 107% 증가해 정유업계의 수출 다각화 노력이 결실을 맺었다.
정유업계는 이같은 수출 호조세가 지속되면 연간 추정 수출액도 목표도 550억 달러에서 560억 달러로 상향 조정해도 충분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고도화 설비 투자가 가져온 수출 성과
이런 성장을 가능케 한 것은 미래를 내다본 정유사들의 공격적인 투자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불황으로 재원 마련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도 국내 정유사들은 미래를 대비했다. 저급 중질유를 재처리해 휘발유, 경유 등 경질유로 전환시키는 고도화 설비 투자를 통해서다. 일찌감치 정제능력을 늘려 ‘규모의 경제’를 갖춘데 이어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수익성을 높여 ‘지상유전’을 만들어 가고 있다.
‘규모의 경제’를 이룬 경쟁력은 일본의 정유산업 현실과도 비교된다. 일본의 전체 원유 정제규모가 하루 427만배럴에 달하지만 27개 공장으로 뿔뿔이 흩어져 있다. 공장당 정제 능력은 16만배럴 수준이다. 우리나라는 하루 정제량 278만배럴이 공장 5개에 집중돼 있다. 공장 한 곳 당 정제능력은 56만배럴로, 일본의 3.5배 크기다. 세계적으로도 규모 면에서 뒤처지지 않는다. 원유 정제능력 기준으로 SK에너지 울산공장이 세계 2위, GS칼텍스 여수공장은 3위, 에쓰오일 온산공장은 7위 규모다.
국내 정유사들은 2000년대 후반 들어서는 값싼 벙커C유를 원료로 경질유를 생산하는 고도화 설비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석유제품 수출을 늘리기 위해서다. 2007년 이후 SK에너지 등 정유 4사가 고도화 설비에 투자한 돈은 10조원에 이른다. 덕분에 2007년 전체 수출 물량 가운데 75.8%에 그쳤던 휘발유, 경유, 항공유 등 고부가가치 경질유의 비중은 올 상반기 85%로 늘었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정유산업이 단순히 원유를 사서 주유소에서 기름을 파는 단계를 넘어선지 오래”라며 “국내 환경 기준이 까다로워 품질 경쟁력도 세계 최고 수준으로, 사실상 정유산업은 수출 기여도 1위의 부가가치가 높은 첨단산업”이라고 말했다.
◆ 수출산업으로의 도약을 위한 정유사들의 노력
1962년 국내 최초의 정유사인 ‘대한석유공사’로 출발해 올해 창립 50주년을 맞은 SK이노베이션은 올 3분기까지 수출 41조원을 달성했다. 전체 매출 중 수출 비중은 73%에 육박한다. SK이노베이션의 석유사업 자회사인 SK에너지는 3분기까지 수출 누적액 30조를 돌파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국내 시장에서의 성공 경험과 경쟁력을 바탕으로 글로벌기업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과감한 투자를 이끌어왔다. 에너지 수출과 글로벌 비전을 위해 직접 해외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최 회장은 지난해부터 최근까지 스페인, 중국, 태국 등 해외 20여 개국을 직접 돌며 스페인 렙솔과의 윤활기유 합작공장을 추진했고 중국 시노펙과의 석유화학 공장 설립 양해각서를 체결하기도 했다.
GS칼텍스는 지난 1983년 국내 정유업계 최초로 ‘2억 불 수출 탑’을 수상했고 이같은 성과는 지난해 ‘200억불 수출의 탑’ 수상으로까지 이었다. 국내 기업을 통틀어 삼성전자에 이어 2번째, 정유업계 최초로 거둔 성과다. 1990년 초부터 고도화 설비에 본격적으로 투자하기 시작한 GS칼텍스는 1997년 업계 최초로 일본과 미국에 휘발유를 수출하며 품질을 인정받았다. GS칼텍스는 내년 완공을 목표로 제4중질유분해시설도 짓고 있다. 이 시설이 완공되면 GS칼텍스는 하루 26만8000배럴(35.3%)의 능력을 보유해 국내 1위 고도화 역량을 갖추게 된다.
원래 내수보다 수출에 역점을 둬온 에쓰오일은 글로벌 판매망을 활용해 올해 상반기에만 매출액의 64%인 11조4900억원을 수출로 거둬 들였다. 올 3분기에도 석유제품 생산량의 62%를 수출했다. 에쓰오일은 해외에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싱가포르에 이어 중국 상해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지사를 신설하며 수출 물량을 확대해가고 있다.
현대오일뱅크도 지난 2010년 8월 현대중공업 그룹에 편입된 이후 종합에너지 기업으로 방향을 잡고 수출 경쟁력을 높여가고 있다. 값싼 중질유를 부가가치가 높은 석유제품으로 바꿔주는 고도화 설비에 대한 투자를 확대해, 현재 현대오일뱅크는 총 12만 배럴의 고도화 처리능력을 확보하고 업계 최고인 30.8%의 고도화 비율을 기록하고 있다
◆정부는 오히려 석유제품 수입에 나서
이처럼 정유업계의 활발한 투자를 기반으로 정유부문이 한국을 대표하는 수출산업으로 성장했지만 정부는 수출 경쟁력 강화보다는 기름값 잡기에만 급급해하고 있다. 인하 효과도 검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알뜰주유소 확대와 석유 혼합판매 허용으로 정유사를 압박하고 전자상거래 활성화를 이유로 오히려 수입제품에 대한 세제 혜택을 주고 있다. 수입품에 3%의 할당 관세를 제해준 한국 정부의 ‘지원’에 올 초 1%에도 못 미치던 일본산 경유의 시장점유율은 어느새 10%대로 올라섰다. 품질 경쟁력을 바탕으로 국내 정유사들이 아시아와 미국, 유럽까지 수출시장을 확대하고 있는 마당에 정작 국내 경유 수요를 일본에 기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정부는 알뜰주유소 공급을 위해 휘발유까지 일본에서 들여오고 있다. 지식경제부는 한국석유공사를 통해 중국 페트로차이나로부터 직수입한 휘발유 10만배럴이 품질검사와 통관을 거쳐 전자상거래에 공급하고 있다.
정부가 휘발유 수입을 결정한 페트로차이나는 중국기업지만 한국에 공급하는 휘발유는 JX오사카 정제공장에서 나오는 제품이다. 페트로차이나가 JX오사카 정제공장의 지분 50%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중국산 휘발유는 국내 휘발유 품질기준에 맞지 않아 수입할 수 없다. 게다가 이 일본산 제품도 그 자체로는 국내 기준에 적합하지 않아 싱가포르산 납사와 합쳐 대만에서 섞는 작업을 거친 후 한국에 들여온다. 재처리 비용 등을 더하면 기름값 인하 효과도 불확실하다.
정유사들이 품질 경쟁력을 앞세워 국내 수요를 넘어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수출하는 상황에서 정부가 경쟁 촉진을 이유로 석유제품 수입에 앞장서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