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공정거래위원회의 위상
세계일보 안용성 차장
잇달아 패소하는 공정거래위원회
“기업들에게 공정거래위원회는 저승사자와 같다. 물론 기업이 잘못한 게 있으면 얻어맞아야겠지만, 공정위가 무리하게 법을 해석해 무조건 과징금을 때리고 보는 경우도 많다. 그러다보니 이제는 기업들도 ‘과징금 맞으면 소송 간다’는 게 일반적이다.”
‘경제 검찰’ 공정거래위원회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 최근 기업과의 담합 관련 소송에서 잇따라 패소하며 체면을 구기고 있다. 수천억원대의 과징금을 부과했다가 패소해 막대한 이자비용까지 부담해야 할 상황이다. 공정위 내부에서도 정부 정책 등 외부요인에 맞춰 무리하게 조사를 하다보니 발생한 결과라는 자조적인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반대로 패소 사례가 이어지자 기업들 사이에는 과징금 처분을 받으면 “무조건 소송하고 본다”는 분위기가 확산하고 있다.
정부의 경제 활성화 분위기에 잇단 패소까지 겹치면서 공정위의 기능이 위축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와 함께 이번 기회에 공정위의 시스템이 더욱 정밀하게 진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올해 공정위가 과징금과 관련한 소송에서 패소해 기업에 돌려줬거나 앞으로 돌려줘야 할 금액은 2576억원에 달한다. 이는 대법원 및 고등법원에서 확정판결로 취소된 액수다. 하지만 실제로는 과징금을 받은 날부터 돌려주는 날까지의 기간에 대해 이자도 줘야하기 때문에 공정위가 부담해야 할 금액은 훨씬 크다.
올해 공정위의 반환 과징금 대부분은 2011년 주유소 담합과 관련해 정유사들에 부과한 내용이다. 지난 2월12일 대법원은 SK, SK이노베이션, SK에너지 등이 공정위를 상대로 낸 상고심에서 “공정위의 시정 명령과 과징금 처분을 취소하라”고 판결했다. 패소 판결로 취소된 과징금은 무려 1356억원이다.
공정위는 지난 1월29일에도 현대오일뱅크와 에쓰오일과의 소송에서 패해 1192억원의 과징금을 물어줘야하는 상황이다. 업계에 따르면 공정위가 현대오일뱅크, 에쓰오일, SK이노베이션 등에 물어줘야 할 과징금 이자만 3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공정위는 또 지난해 2월 소주업체 9곳과의 소송에서 패해 250억원의 과징금 취소 판결을 받았고, 5개월 뒤에는 생명보험사와의 소송에 져 과징금 3630억원을 돌려줘야했다.
2012년에는 ‘신세계 일감 몰아주기’ 사건도 패소했다. 공정위는 신세계, 이마트, 에브리데이리테일 등 3개 업체가 계열사인 신세계SVN을 부당지원했다며 과징금 40억원을 부과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공정위의 주장을 인정할 만한 자료가 없다”며 신세계 측의 손을 들어줬다.
공정위가 과징금을 잘못 산정해 지나치게 많은 액수를 부과하는 경우는 빈번하다. 2013년 남양유업이 ‘물량 밀어내기’ 논란으로 곤혹을 치를 당시 공정위는 “남양유업이 거래상 지위를 부당하게 이용해 강제 판매나 이익 제공 등을 강요했다”며 과징금 124억원을 부과했다.
남양유업은 공정위 조치가 부당하다며 소송을 진행했고, 서울고법은 과징금 가운데 119억원을 취소하라고 판결했다.
그런가하면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받아야할 과징금을 못 받은 경우도 있다. 2008년 공정위는 포스코ICT가 서울도시철도공사의 지하철 내 IT 시스템을 구축하는 사업 입찰 과정에서 담합했다는 이유로 과징금 71억원을 부과했다. 하지만 공정위가 통보시효인 5년을 하루 넘긴 시점에 과징금을 공지해 문제가 생겼다. 포스코ICT는 공정위를 상대로 과징금 납부명령 취소소송을 제기했고, 제판부는 포스코ICT 손을 들어줬다.
이처럼 공정위가 이런저런 이유로 취소당한 과징금은 최근 5년간 5117억원에 달한다. 올해 공정위 과징금과 관련한 8건의 확정판결 중 공정위는 5건의 사건에서 승소 또는 일부 승소했다. 그러나 이들 8건에 대해 공정위가 애초 부과한 과징금은 2601억원으로 부과액대비 패소액 비율은 99%까지 치솟는다. 주유소 담합 사건의 패소액이 워낙 크기 때문이다.
공정위가 기업과의 소송에서 완전 패소하는 비율도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완전 패소율(일부 패소 제외)은 2012년 4.4%에서 2013년 6.5%로 늘어난 데 이어 지난해에도 2배가량 증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연도별 과징금 부과액 대비 패소액 비율도 2010년 17.2%, 2011년 17.9%, 2012년 7.6%, 2013년 4.9%, 2014년 21% 였다.
공정위는 당장 과징금을 물어줄 여력도 마땅치 않다. 환급금은 패소가 확정된 해에 벌어들인 과징금 수입으로 물어줘야 하는데, 연 초 공정위가 거둬들인 과징금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자칫 공정위가 환급금 연체이자를 부담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잇단 패소로 체면을 구긴 공정위는 변호사를 신규 채용해 법률자문 전담팀을 구성한다는 계획이다. 공정위는 변호사 5명가량을 신규 채용해 송무담당관실 산하에 새로 만드는 법률자문 전담팀에 집중 배치할 계획이다. 아울러 경쟁법에 대한 변호사들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5∼10년 정도로 공정위 장기 근무를 의무화할 방침이다. 또 현재 ‘1사건 1담당자’ 체제를 앞으로는 중요한 사건의 경우 2~3명의 인력을 투입하는 방식으로 업무 시스템을 바꾼다.
‘무리(無理)’가 아닌 ‘공정(公正)’으로
공정위의 이같은 조치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의 소송 분위기와 패소율은 쉽게 개선되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다. 공정위로부터 수백억·수천억의 과징금을 부과받은 대기업들은 대형 로펌에서 일하는 고위 판검사 출신을 변호사를 선임해 소송전에 나서기 때문이다. 반면 공정위는 중소 로펌에서 일하는 젊은 변호사를 대리인으로 내세우는 게 일반적이다. 법률적 판단과 경험에 있어서 밀릴 수밖에 없는 게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공정위 관계자들은 대기업과의 소송을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결국 기업의 위법행위와 공정위의 제재, 법원 소송으로 이어지는 과정의 최종 승자는 거액의 수임료를 받는 대형 로펌 소속 변호사들이라는 얘기가 공정위와 기업 안팎에서 나오는 이유다.
이같은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공정위를 향한 비판은 여전하다. 기업 사이에는 공정위가 무리수를 둘 경우가 많다고 입을 모은다. 한 제조업체 관계자는 “공정위가 조사에 착수하면 회사 전체가 긴장을 할 수 밖에 없고 경영도 위축된다. 그 와중에 과징금이라도 맞게 되면 한꺼번에 큰 돈이 빠져나가 휘청거릴 수 밖에 없다”고 말해다. 또 다른 업체 관계자는 “공정위 과징금이 알려지면 나중에 소송을 통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더라도 기업이미지 등에서 막대한 타격을 받을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A 변호사는 “공정위가 제보나 첩보를 통해 기업들의 위법행위를 조사하다가도 혐의가 뚜렷하지 않거나 잘못이 발견되지 않으면 사건을 포기해야 하는데, 그동안 들인 노력이 아까워서인지 무조건 밀어붙이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공정위 내부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특히 정유업체 담합 사건에 대한 비판이다. 공정위 한 관계자는 “이명박 대통령 당시 강조한 ‘유가 잡기’에 코드 맞추기식 조사를 벌이다 발생한 일”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공정위는 위원회 형식으로 운영되는 독립기관인데도 불구하고 당시 정책에 맞추다 보면 무리한 조사가 나오게 된다”고 말했다.
법원 패소 판결로 공정위가 흔들리면서 대기업에 대한 견제 기능이 위축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실제로 공정위의 과징금 부과에 대해 소송을 제기하는 기업 수는 갈수록 늘고 있다. 2010년 48건이던 소송은 2012년 88건, 2014년 120건으로 증가했다.
공정위 관계자는 “대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력·자금력이 부족한 공정위가 통상 3년가량 걸리는 대법원 소송을 끌고 가기가 사실상 쉽지 않은 상황”이라며 “최근에는 과징금을 받은 기업들은 무조건 소송을 하는 추세여서 더욱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픽>
공정위 과징금 부과-패소액 현황
연도 - 부과액 - 패소액
2010년 - 2413억3400만원 - 417억3400만원
2011년 - 2357억300만원 - 423억3400만원
2012년 - 1453억9400만원 - 110억7800만원
2013년 - 2241억원 - 110억7800만원
2014년 - 7052억8100만원 - 1478억-5600만원
2015년(3월) - 2601억1000만원 - 2576억3400만원
자료:공정거래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