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러코스터 유가에 흔들린 '2008 세계'
글 | 신삼호_연합뉴스 산업부 부장 신삼호
정유업계 종사자는 물론이고 조금이라도 국제원유 동향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라면 아직까지 롤러코스터 유가에 흔들렸던 현기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도 국제유가는 과거에 볼 수 없었던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배럴당 150달러를 넘어설 듯 아찔한 고공행진을 거듭했던 국제유가가 세계경기 침체 본격화와 함께 급락, 40달러대로 떨어지며 낙하쇼를 펼치고 있다.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해 가며 급격히 올랐다가 갑자기 수직으로 떨어지고 있어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 조차 어지러울 정도다.
유가가 올해 이처럼 극에서 극으로 움직인 배경에는 세계경기 변동과 함께 국제투기세력이 도사리고 있다는 게 정설이다. 중국 등 신흥국들의 성장세가 이어지면서 석유수요가 증가세를 이어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여기에 달러화 약세가 지속되자 헤지펀드 등이 달러화 약세에 대비하고 새로운 수익원을 찾아 대거 원유선물 투기에 나서면서 유가가 정상적인 수요 공급 곡선에서 벗어나 급격하게 치솟았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세계경제 침체가 예상보다 더욱 심각해지면서 중국 등의 고속성장에도 제동이 걸리고 이에따라 석유수요 증가세가 둔화되자 투기세력이 썰물처럼 빠져 나가면서 유가가 급락하고 있다는 분석에 대부분 동조하고 있다.
유가가 가파른 사이클을 그리며 급.등락하자 기업과 소비자들은 큰 혼란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특히 기업들은 주요 경영요소중 하나인 유가가 예측불허 상태에 빠지자 경영활동을 수행하는 데 크게 애를 먹었다. 또 유가 예측을 잘못해 상당한 피해를 입기도 했다.
아울러 유가 급등으로 기업들의 제조 및 물류 비용이 크게 늘어나면서 글로벌 실물경기 위축을 더욱 가속화했다는 점은 국제유가 관리에 대한 국제적 공조 필요성을 일깨워주는 계기가 됐다.
지금은 유가가 하락추세를 이어가고 있지만 워낙 예측불허의 상황이기 때문에 언제 또 방향을 틀 지 아무도 짐작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고공행진을 하던 유가가 이렇게 갑자기 떨어지리라고는 거의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유가하락 추세가 계속 될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는 것은 매우 위험천만한 일이라는 것이다.
올해의 국제유가 급등락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난 사실들이 있다. 이는 우리 경제나 기업들에도 매우 의미심장한 사안들이기 때문에 다시한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우선 세계 경제가 여전히 석유의 영향권 아래에 있고 석유와 글로벌 경기가 밀접하게 결부돼 서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이 재차 확인 됐다는 점이다. 그동안 세계경제는 에너지를 거의 쓰지 않는 IT(정보기술) 혁명, 금융부문의 급성장 등의 변화를 겪었음에도 불구, 석유의 영향력은 그다지 줄지 않았다는 점이 드러났다. 이는 최근 석유값과 세계경제의 흐름을 보면 명확히 드러난다.
최근 2-3년전부터 중국 등이 고공성장을 지속하면서 석유수요가 많아지자 석유값이 급격히 올랐다. 그러나 과도하게 오른 국제유가는 결국 세계경제의 성장을 가로막게 됐고 경제성장이 둔화되면서 유가는 급격한 내리막을 걷고 있다. 이는 중국 등의 경제가 다시 과열 될 경우 석유값이 또다시 급격히 오르면서 경제성장에 브레이크를 걸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영향력의 정도는 다르겠지만 철광석, 곡물, 석탄 등 여타 원자재 등도 유사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분석된다. 인구가 많은 중국, 인도 등의 경제수준이 일정수준 올라오면서 원자재가 국제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다는 점은 원자재 빈국인 우리에게는 상당한 악재로 작용할 수 밖에 없어서 서 매우 걱정되는 부분이다.
다음으로는 국제 투기세력들이 얼마든지 국제원유가격을 흔들 수 있다는 점이다. 가격은 기본적으로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되지만 원유공급의 가격 탄력성이 상당히 제한돼 있어 수요쪽이 조금만 흔들려도 가격급등락을 불러올 수 있다는 시장특성이 이번에 드러난 것은 매우 안타깝지만 꼭 짚고 넘어가야 할 현실이다. 국제원유가가 배럴당 150 달러에 근접했음에도 국제석유 공급량은 거의 늘어나지 못했다. OPEC를 필두로 공급확대를 공언했지만 실제 공급은 거의 늘어나지 못했으며 국제투기 세력은 이 같은 OPEC의 한계를 돈벌이에 철저히 활용했다.
현재의 산유국들이 공급을 크게 늘릴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점이 드러난 만큼 앞으로 원유 수요가 다시 늘어날 기미가 보이면 헤지펀드 등의 투기세력이 원유 선물시장에 더 많이 뛰어들 공산이 크다. 투기세력이 많아질수록 원유가격의 변동성은 커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유가 변화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밖에 없는 우리 기업들의 피해도 많아질 것으로 우려된다.
또 하나 안타까운 점은 우리를 비롯 세계 각국이 태양 에너지, 풍력 에너지, 바이오 에너지 등 이른바 대체에너지 개발에 주력했지만 아직은 석유가 차지하는 역할중 일정부분 이상을 대체할 만큼 성장하지 못했다는 현실이다. 대체 에너지가 충분히 성장했다면 석유값 급등 압력을 어느정도 해소하는 데 기여했겠지만 이 부분에서 이렇다할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대체에너지의 잠재력에 대한 의구심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른바 그린에너지 또는 대체에너지를 개발하고 확충해야 한다는 것은 경제적 측면에서 뿐 아니라 환경이나 인류의 미래를 감안할 때 가야할 방향 자체는 맞다는 점은 누구나 인정한다. 하지만 과연 그린.대체에너지가 석유의 대안이 될 수 있는지는 또다른 문제다. 아직 그린에너지나 대체에너지는 경제성이나 효율성 측면에서 석유에 비해 경쟁력이 뒤진다는 것은 모두가 인식하는 사실이다. 이번 석유위기 때 이런 대체에너지가 언젠가는 석유를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잠재력을 보여줬는지도 의문이다.
세계가 날마다 고공행진을 펼치며 기업들과 소비자들에게 공포감을 안겨줬을 때 우리 정유산업의 숨겨진 힘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나마 큰 위안거리가 됐다. 전세계가 고유가에 놀라고 있는 상황에서 SK에너지를 위시한 한국의 정유업체들은 막대한 양의 석유제품을 수출, 에너지 수입에 따른 무역적자 확대를 방어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올들어 9월까지 석유제품 수출액은 313억3천400만 달러로 선박을 제치고 수출품목 1위에 올랐다. 물론 유가가 하락하면서 역마진이 날 정도로 석유수출 채산성이 악화됐지만 이런 수출실적은 우리 정유산업을 얼마든지 수출산업으로 키울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 주는 데 충분하다고 평가된다.
한국 정유산업이 제1위의 수출산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꾸준한 투자를 통한 설비확충과 고도화 시설의 역할이 컸다. 한국의 석유정제능력은 하루 285만 배럴로 세계 5위 수준이다. 내수를 충족하고도 충분한 여유분의 석유제품을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은 석유제품 수요가 커질 경우 상당한 무기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
세계경제가 고유가 때문에 홍역을 겪었지만 에너지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우리는 더 큰 시련을 겪어야 했다. 또다시 국제유가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세계경제를 위협할 경우 조금이라도 피해를 줄일 수 있도록 사전대비가 필요하다는 점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다행히 최근의 저유가 상황은 고유가에 대비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가져다준 것으로 보인다.
석유공포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려면 무엇보다도 석유자원을 많이 확보하는 게 지름길이다. 그동안 우리 기업들은 중앙아시아, 남미, 아프리카를 비롯한 세계 각지를 누비며 광구를 개발하고 유전 지분을 매입하고 있지만 석유.가스자급률은 현재 4.2% 수준에 그치고 있다. 세계경기 침체로 석유가격이 하락하면서 덩달아 유전가격이 떨어지고 있다는 점은 석유확보를 위한 호기다. 세계 유전 가격은 대부분 30% 정도 떨어졌으며 절반 가격으로 시장에 나온 매물도 적지 않다고 한다. 앞으로 가격이 더 떨어질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 기업들은 지금이 기회를 최대한 현명하게 활용해 질좋고 유망한 광구를 가급적 많이 확보해야 한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물론 세계경제의 침체가 앞으로도 상당기간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도 많다. 또 한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경제전망이 불투명할 때 유전을 산다든지 하는 적극적인 투자는 너무 리스크가 크다는 주장도 새겨들을만 하다. 하지만 최근의 저유가 상황은 결코 정상이 아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유전개발이나 유전확보를 위한 리스크는 감당할 가치가 있다고 평가된다. 또 원유공급 부문에서 어느정도 위상을 확보해야 메이저의 횡포나 투기세력의 장난에 일방적으로 휘둘리는 것을 피할수 있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아울러 에너지 저감 노력도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그간 석유값이 올라가면 성력화(省力化)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각계에서 강력하게 제기되다가도 석유값이 떨어지면 슬그머니 꼬리는 감추는 일이 반복돼 왔다. 그 결과 2007년 기준 우리의 에너지원단위는 0.339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 0.195의 배가 넘는다. 이번에도 유가가 급격히 하락하자 고유가 파고를 넘어야 한다며 제시했던 각종 에너지 절약 목소리들이 어느새 사라졌다.
고유가로 상황이 어려워 지면 산업구조자체를 저에너지 산업으로 바꿔야 한다는 둥 높은 목표만 내걸고 막상 해놓은 일 없이 세월을 보내는 일은 이제는 그만두고 저유가 상황일 때 미리 에너지를 덜 쓸수 있도록 설비와 장치를 개선해야 마땅하다. 산업현장의 성력화에는 상당한 비용이 들기 때문에 경기부진이 심화되는 지금 상황에서 기업들에게 적지않은 부담이 될 수 있겠지만 이미 확인된 것처럼 `석유의 힘'이 여전히 경제를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만큼 공장 설비, 가동, 제품생산, 소비 등에서 석유를 수 있도록 성력화 노력을 지속적으로 펼쳐나가는 게 바람직하다고 본다.
원유값이 떨어지면서 대체에너지에 대한 관심이 다시 줄어든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물론 고유가 상황에서도 대체에너지 자체가 미래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충분한 잠재력을 보여주지 못했지만 에너지의 중심이 그린에너지나 대체에너지쪽으로 일정부분 이동해야 하는 것도 피할 수 없는 추세라고 판단된다.
바이오 에너지는 환경문제, 비용 등이 심각한 걸림돌이 되고 있으며 자연의 힘을 이용한 에너지 개발은 효율을 더 높이고 비용을 더 낮춰야 하는 과제가 있다. 모두 쉽지않은 현안들이지만 주변상황에 흔들림 없이 차근차근 준비해 간다면 적지않은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올해 우리의 주요기업들은 내년 사업계획을 세우는 데 무진 애를 먹고 있다. 무엇보다도 내년 세계경제 전망이 극히 불투명하고 이에따라 환율이나 유가 등 주요 경영변수를 예측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이런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은 내년에도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다만 유가든 환율이든 변하게 된다면 그 변동폭은 올해 못지않게 클 것이라는 전망이 적지 않다. 골이 깊기에 산도 깊다는 논리가 바탕에 깔려 있고 또 미국 등 세계 각국이 금융경색을 해소하게 위해 쏟아붓듯이 집어넣은 막대한 국제금융 자금도 어떤 파급효과를 가져올지 알 수 없다.지나치게 폭락한 국제유가는 조금만 수요가 늘어나는 기색만 보여도 폭등할 수 있으며 또 오른 뒤에도 다시 급락할 수도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붙투명성도 커지고 변동성이 확대되면 외생변수에 취약한 우리경제나 기업이 뜻하지 않은 피해를 입을 우려도 커진다. 불투명성이 커질수록 기업들은 원칙에 입각한 경영을 펼쳐야 한다고 한다. 가급적 모험을 피하고 특히 정상적인 영업활동외에 투기적인 거래를 통해 이익을 취하려는 행동은 절대 금지해야 한다고도 한다. 이 때문에 내년 상당수 기업들이 극히 보수적인 경영을 펼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기업들이 너무 위축되서는 곤란하다고 본다. `위기는 기회'이고 `미래는 준비하는 자의 몫'이란 말이 있듯이 힘든 와중에서도 미래를 내다보고 기회를 노리는 적극성도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