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에너지정책 변화를 바라보며
허은녕_자원환경경제학박사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에너지시스템공학과 부교수
드디어 국제유가가 80달러 선을 넘어섰다. 2000년 20달러 부근에 머물러 있던 국제유가가 네 배나 오른 것이며 물가를 고려하더라도 1, 2차 석유위기나 걸프전 때의 고유가를 넘어선 사상 최고가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재미있게도 이번 국제유가의 상승은 부시 현 미국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시작하고 있다. 안 그래도 미국 내 석유대기업들과 관계가 깊었던 부시 대통령은 부임하자마자 부통령을 의장으로 삼아 국가에너지정책발전위원회를 구성하여 9‧11 사태 직전인 2001년 5월에 이미 중장기 국가에너지정책(National Energy Policy)을 수립하였으며 사태가 나자 곧바로 그 국가정책의 주요제안 중 하나였던 ‘중동질서 재편을 통한 국제유가 안정’을 행동에 옮기기 시작한다.
부통령의 이름을 따 일명 체니 보고서라고도 불렸던 이 국가에너지정책 보고서는 21세기 초반 에너지를 둘러싼 국제정세의 변화방향을 보여주고 있다. 이 보고서의 주요내용들은 중동질서재편, 해외유전개발 적극 진출 및 원자력발전 재개 등 미국이 매우 ‘보수적인’ 에너지정책을 실시할 것임을 시사하고 있으며 최근 6-7년 동안 미국 연방정부가 취한 에너지정책의 기조 역시 신‧재생에너지 보다는 석유와 가스 등 기존 기반에너지의 공급확대를 중심으로 하며, 관련기술개발에는 집중하되 기후변화협약 등 미국 내 에너지산업에 충격을 줄 국제협약은 피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그러나 중국의 급성장으로 인한 수요확대와 미국의 중동개입이 장기화됨에 따라 국제유가는 안정이 되기는커녕 고공비행을 지속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드디어 작년 말 미국선거에서 민주당이 압승하여 상원과 하원에서 다수당이 되자 올해 초부터 미국의 에너지정책에 상당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부시 대통령과 연방정부가 미국석유산업이 반대하던 연료인 에탄올의 사용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그 동안 연방정부의 도움 없이 조용히 신‧재생에너지 사업을 진행해 오던 주 정부들이 본격적으로 사업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으로 흥미로운 것은 기존에는 일어나지 않았던 에너지 분야와 다른 산업분야와 연계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미국 정부의 에탄올 장려정책이 발표되자 에탄올은 제조하는 원료인 주정의 가격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주정은 탄산음료를 만드는 원료이기도 하여서 탄산음료산업의 대표회사인 코카콜라사가 아예 새로운 원료로 전환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으며, 주정을 만드는 옥수수나 사탕수수들의 시장 가격이 크게 올라 이들을 원료로 사용하는 업계들이 대비책을 찾느라 고심하고 있다. 기존에는 에너지 정책의 영향이 석유, 석탄, 가스 등의 전통에너지산업에 머물러 있었다면 이제는 농업, 식음료업, 생물산업 등 다양한 분야로 정책의 파급효과가 전달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또한 미국의 에너지관련 국제협약에 대한 태도도 바뀌고 있다. 민주당이 장악한 하원 및 상원에서는 기후변화협약에의 참여를 심각하게 이야기 하고 있으며, 지구온난화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는 전도사로 활동 중인 고어(Gore) 전 부통령이 출연한 지구온난화 관련 다큐멘터리 영화가 인기를 얻는 등 지구온난화에 대한 미국 국민들의 인지도가 급상승하고 있다.
미국의 휘발유 가격 변동 역시 새로운 분위기에 일조하고 있다. 미국은 한국과 달리 휘발유 등 석유제품에 붙는 세금이 매우 적어 국제원유가격의 변동에 대하여 미국 내 휘발유 가격이 한국에 비하여 훨씬 크게 변동한다. 지난겨울 미국의 휘발유 가격은 갤런 당 2달러 선이었으나 올 여름에는 지난해 여름에 이어 4달러에 육박하였다. 한국 내 휘발유소비자가격이 연간 10~20% 변동하는데 반하여 미국 내 휘발유소비자 가격의 변동 폭은 거의 매년 100%에 달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미국 소비자 가격의 변동 폭은 국제유가의 변동정도 보다도 더욱 심한 것인데, 상당수 전문가들은 그 이유로 미국 내 정유사들이 최근 30년간 정유시설에 대한 투자가 거의 없었다는 점을 들고 있다.
덕택에 미국은 이제 자국 소비 석유제품의 60% 이상을 수입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국민의 불만, 즉 정유사가 휘발유 소비자가격의 변동을 조절하여 이윤을 남길 것이라는 국민들의 의심은 비록 미국이 한국보다 더욱 심하나 아직까지 불공정행위 판정이 법원에서 인정된 바는 없는 것으로 안다. 또한 이러한 큰 가격변동 폭 덕택으로 미국 내 하이브리드 자동차의 판매가 급상승하고 에너지절약형 기기나 건축자재의 판매가 늘어나는 등 에너지절약을 위한 대한 소비패턴 변화가 확실히 나타나고 있다. 재미있게도 한국의 정유산업은 투자가 활발한 편이며 소비자 가격의 변동폭이 매우 작은 편인데도 정유사들의 가격담합에 대한 비판은 상당히 높은 반면, 실제 소비자들이 소형차나 연비 좋은차, 하이브리드 자동차를 구입하는 등의 실제 에너지절약이나 에너지전환의 움직임은 매우 미미한 상태로 있어 자원빈국의 에너지정책이 가져야 하는 실효성 측면에서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미국의 에너지관련 변화 중 가장 관심을 끌었던 부분은 바로 에너지 분야 기술개발에 대한 투자의 증가이다. 기후변화협약에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수조원 규모로 지구온난화 관련된 기술개발에 지원하였었으며 이는 이라크 전쟁에도 불구하고 계속 증가하고 있다. 또한 이미 2000년대 초반부터 기존의 에너지 분야와 농업 및 생물산업 분야와의 협동연구개발에 대한 연구비도 증가시키고 있다. 이와 더불어 전통적인 에너지투자인 해외자원개발이 특히 텍사스 지역 기업들을 중심으로 크게 붐을 이루고 있으며 관련 대학 학과의 연구비와 장학금도 크게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에너지분야 기술개발에의 적극적인 투자는 미국과 EU를 비롯한 전 세계 전진국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20세기의 에너지정책이 석유가 부존된 지역에 대한 국제정치적 정책을 중심으로 형성된 이른바 지정학(geopolitics)적 에너지정책시대였던 반면, 21세기에는 신‧재생에너지개발기술이나 에너지절약기술 등의 신에너지확보기술은 물론 석유, 석탄, 원자력 등 전통에너지 분야에서도 발달된 탐사 및 생산기술의 확보가 가장 큰 수입을 보장하는 이른바 기술중심 에너지정책의 시대이기에 이러한 전환을 준비하고 또한 박차를 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기존의 에너지기업이 기술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음은 물론 상당수의 중소규모 기술전문기업들 역시 새로이 탄생하고 있다.
석유를 중심으로 한 화석에너지가 21세기에도 계속해서 중요한 에너지원이 될 것이라는데 추호의 의심도 없다. 그러나 아마도 20세기와 같은 절대적인 위치를 계속 유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원이 절대로 부족한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에너지정책의 패러다임이 지정학 중심에서 기술경쟁력 중심으로 변화하고 있는 이때가 바로 절호의 기회이다. 에너지경제연구원 이복재 박사가 최근 기고에서 언급하였듯이 이제 에너지산업의 개념을 새로이 정립하고 생산-전환-사용의 전과정에 결쳐 보다 효과적이고 국제경쟁력있는 기술개발에 앞장서야 한다. 국내부존자원이 없다고 에너지분야의 세계적인 기술전문기업이 없으라는 법은 없다. 고부가가치의 기술서비스이 제공을 중심으로 하는 에너지전문기술서비스 업종의 육성은 그러한 면에서 좋은 시발점으로 보인다. 디지털 기술의 개발로 정보통신분야 선진국에 들어섰듯이 보다 진취적인 사고로 국제적인 기술 경쟁력을 갖춘 에너지산업을 육성하여 우리도 선진에너지강국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꿈꾸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