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스완의 빈번한 출현.. 기로에 놓인 정유산업"
서울경제신문 양철민 기자
“지금과 같은 석유업계 상황은 사상 처음인 듯 합니다.”
석유업계 관계자들이 최근 기자를 만나면 종종 한숨과 함께 내뱉는 말이다.
실제 최근 몇 년 가량 석유업계는 ‘블랙스완(기존의 경험으로 예측 불가능하며 경제나 사회에 파급력이 큰 사건)’의 잇따른 출현으로 지금과는 전혀 다른 경영 환경에 처해져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정유 산업은 ‘땅 짚고 헤엄친다’ 라는 평가를 받았다. 원유 수입선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규모의 경제’를 갖춘 뒤 LPG, 나프타, 휘발유, 경유, 등유 순으로 정제해 관련 제품을 팔면 되는 단순한 사업구조라는 질시 어린 분석도 많이 받았다. 국내 주요 산업 중 정부 공적자금을 받지 않은 유일한 산업군이라며 자부심을 갖는 이들을 찾기도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시절이 바뀌었다. 지난 몇년간 수 조원을 들여 지은 고도화 시설은 석유제품 가격의 이상 현상으로 예상을 밑도는 수익을 내고 있으며 몇몇 곳에서는 ‘정제시설을 가동할 수록 손해를 본다’는 푸념까지 나온다.
이유는 석유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수백 년간 산업용 에너지원은 효율성 및 채산성 등의 요인에 따라 나무-석탄-석유로 바뀌었으며 최근 100여년 동안 석유를 위협할 만한 에너지원은 없었다. 하지만 글로벌 산업 구조의 변화와 각국의 환경규제 강화 흐름 등이 맞물리면서 석유의 위상이 예전 같지 않다. 특히 계속되는 블랙스완의 출현은 이 같은 석유업계 종사자들의 불안을 부추기고 있다.
지난해 말 석유업계를 가장 당황스럽게 만들었던 블랙스완은 벙커C유 보다 낮은 휘발유 가격이었다. 페트로넷 등에 따르면 지난해 11월부터 넉 달 가량 벙커C유 가격은 휘발유 가격 대비 배럴당 1달러 가량 높거나 비슷한 수준에 머물렀다. 선박용 원료 정도로 쓰이는 ‘계륵’ 같은 존재인 벙커C유가 고부가가치 석유제품의 대명사로 불리는 휘발유 보다 비싸다는 것은 수년 전만 해도 예측이 불가능했다. 정유사들이 최근까지도 벙커C유 등을 넣어 휘발유나 경유 등을 생산하는 고도화 설비에 수조 원을 투자한 것이 그 방증이다.
정유사들은 이 같은 블랙스완의 출현을 일시적인 현상으로 보고 지난 연말 가동률을 낮추기도 했다. 실제 SK이노베이션·GS칼텍스∙에쓰오일·현대오일뱅크 등 정유 4사는 지난해 4·4분기 정유 부문에서 모두 합쳐 1조원 가량의 영업손실을 기록한 바 있다. 당시 정유사 관계자는 “수조 원을 들인 고도화 설비에 비싼 벙커C유를 넣어 싼 휘발유를 만들어 낸다”며 한숨을 내쉬었지만 상황이 금세 반등될 것이라 기대했다. 물론 지난 3월 이후 휘발유 가격은 벙커C유를 추월했으면 최근에는 벙커C유 대비 10달러 가량 높은 가격을 유지중이다. 하지만 가격 차가 20달러 가량 차이 났던 수년 전과 비교하면 수익 하락 추세가 두드러진다.
벙커C유와 휘발유 가격 역전이라는 블랙스완 출현에 대해 아직도 제대로 된 진단이 나오지도 않았다. 전문가들은 당시 겨울철 드라이빙 수요 감소와 경질유 위주인 미국산 셰일오일 공급과잉 등을 이유로 제시했다. 반면 최근 휘발유와 벙커C유 간 가격차가 벌어진 것은 봄철 드라이빙 시즌 개시와 미국 정유업체들의 공장 가동률 조절 등이라는 분석을 내놓는다. 다만 드라이빙 시즌 도래에 따른 휘발유 수요 증가는 매년 되풀이되는 변수라는 점, 미국의 정제공장 가동률 또한 올 6월 93% 가량으로 지난 연말 대비 3~4%포인트 정도만 하락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 어떤 전문가도 지난해 11월부터 넉 달간 이어진 휘발유와 벙커C유간 가격 역전 현상에 대해서 명확한 설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이 때문에 언제든 벙커C유와 휘발유 가격 역전이라는 현상이 예상치 못한 시점에서 되풀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또 다른 블랙스완은 2달러대를 맴돌고 있는 정제마진이다. 정제마진은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당시 배럴당 1달러대 수준으로 떨어진 이후 올 초 10년만에 다시금 1달러대로 떨어졌다. 10년전 블랙스완이 다시 한 번 등장했다고도 볼 수 있지만 문제는 금융위기 당시에는 한 달여 만에 정제마진이 4달러대로 반등한 반면 올해는 수개월째 2~3달러대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업계에서는 미·중 무역분쟁에 따른 정유제품 수요 감소와 미국의 셰일오일 생산에 따른 공급 과잉 등을 이유로 꼽지만 문제는 예상보다 이 같은 변수의 여파가 강하다는 점이다.
물론 이 같은 블랙스완의 잇따른 등장이 석유업체들의 몰락으로는 이어지지 않을 전망이다. 정유 부문 수익 악화라는 전망은 예전부터 꾸준히 제기된 탓에 국내 석유관련 업체들이 석유화학업 진출이나 업종 전환 등을 통해 내성을 어느정도 키워 놓았기 때문이다. 실제 정유업체의 석유화학 분야 업종 확장은 어느정도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석유화학부문은 ‘석유화학의 쌀’이라고도 불리는 에틸렌의 스프레드가 최근 300달러 대로 떨어지고 전형적인 ‘싸이클 산업’이라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유부문 대비 진입 장벽이 높고 신규 수요도 꾸준해 마진율이 높기 때문이다.
글로벌 정유사들의 잇따른 석유화학 산업 진출 또한 이 같은 국내 업체의 선택이 나쁘지 않았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실제 미국의 엑손모빌과 아람코의 자회사 사빅은 100억 달러를 들여 미국에 대규모 화학공장을 짓겠다고 최근 발표했다. 미국의 셰브론은 150억 달러를 들여 화학사인 노바 케미칼을 인수해 정유와 화학 부문의 수직계열화에 힘을 쏟을 방침이다. SK이노베이션이 전기차 배터리 부문에 진출하거나 GS칼텍스가 전기차 충전이나 유통 등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또한 블랙스완 출현이 빈번해지고 있는 경영 환경에 대응하기 위한 조치다.
최근 완성차 업계의 움직임 또한 정유사들로서는 호재다. 메르세데스 벤츠는 디젤 엔진 개선을 통해 최근 질소산화물 배출을 획기적으로 줄였다는 데이터를 내놓는 등 독일 완성차 업체들은 전기차 급부상에 대응해 내연기관 차량 효율 개선 및 친환경 강화에 나서고 있다. 반면 전기차 업체의 대표 주자로 불렸던 미국의 테슬라는 최근 주가가 1년전 대비 반토막 나는 등 ‘전기차 거품론’이 제기된다. 내연기관차 보급량 감소에 다른 휘발유 및 경유 수요 감소 우려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정유업계로서는 완성차 업체들의 활약이 반가울 수밖에 없다. 이외에도 태양광, 풍력, 수소 등의 재생 에너지원도 최근 에너지저장장치(ESS) 화재에서 나타났듯 확실한 대체에너지로 자리잡기에는 갈 길이 멀다.
다만 이 같은 우연적 요소에 의존해서는 정유사들의 미래를 장담하기 힘들다. 자율주행차와 공유경제 등장에 따른 신규 사업 모델 등장, 글로벌 무역 전쟁에 따른 경기 변동성 확대 등으로 정유산업을 둘러싼 불확실성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석기시대가 돌이 없어서 끝난 게 아니듯 석유시대 또한 석유가 없어서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무엇보다 최근 몇 년간 나타났던 블랙스완의 등장 빈도 또한 더욱 높아질 가능성이 높다.
결국 정유사 경영진들에게는 두 가지 대응책이 놓여져 있다 하겠다. 블랙스완이 등장할 때마다 매번 신규 대응책을 마련하든지, 아니면 경쟁우위 확보 전략을 통해 블랙스완에 대한 내성을 끌어올리든지. 지금과 같이 급변하는 경영 환경을 감안하면 이들 경영자들의 선택에 따른 결과는 10년도 채 되지 않아 판가름 나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