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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이야기]구한말 시대의 석유수입과 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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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시대의 석유수입과 유통

 

산업통상자원부

경제자유구역기획단 개발지원2팀장

여영섭

 

머리말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처음 석유가 사용된 시기는 매천야록의 기록과 구한말 개화승려 이동인이 일본에서 귀국하면서 석유를 가져왔다는 기록에 근거하여 1880년부터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나마 구체적 수입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필자는 구한말의 여러 자료를 조사하고 1877년부터의 석유가 수입되었다는 것과 구한말의 석유유통에 관한 기록을 발견하여 이를 소개한다.

구한말의 석유 수입에 관한 내용의 전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조선에서 발행한 자료 외에도 일본이나 중국에서 발행된 자료에까지 폭을 넓혀야 한다. 필자가 확인한 자료는 조선에서 발행한 것으로는 조선해관이 1885년부터 1893년까지의 수출입내용을 기록하여 중국해관연보의 부록으로 발행한 조선해관연보, 1901년 이후 일본의 영향력을 받던 조선의 탁지부 및 통감부, 총독부에서 발행한 통계연보가 있다. 그 이전의 조선의 수입내용이 기록된 자료는 일본에서 발행한 것으로 부산, 원산, 인천에 파견된 일본영사의 영사보고, 일본 농상무성 상무국의 자료, 요코하마세관의 출장보고서 등이 있다.

자료마다 통계수치가 제각기 다른 경우도 있는데, 이 글이 자료 소개에 의미를 두고 있는 만큼 무리하여 하나의 숫자로 통일시키지 않고 확인된 그대로 모두를 소개한다. 다만, 대부분의 자료가 물량과 수입액을 모두 기록하고 있으나, 초기의 일부는 물량이 없이 수입액만 기록된 경우도 있고 간혹 수치의 오류도 있는데 이 같은 경우는 전후년도의 실적과 비교하여 물량을 추산하고 오류를 수정하였다. 또한, 일부 자료에서는 , 등 척관법에 의한 단위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는 갤런으로 환산하여 자료단위를 통일하였다.

초기의 자료에서는 석유를 석탄유로 표기한 경우도 있었다. 이는 영국의 James Young이 석탄을 건류하여 처음으로 등유를 얻는데 성공하여 이 방법을 특허등록하고 상업생산하면서 Coal Oil로 이름을 붙인 것에서 기인한다. 일본에서는 처음에 이 의미를 받아들여 이시자카 슈조우가 1871년 설립한 일본 최초의 석유회사도 나가노석탄유회사로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이후 석유와 석탄유는 조금 성질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Petroleum의 번역어로 석유라는 말을 사용하였고, 1872년에는 회사이름도 나가노석유회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초기의 일본통계와 일본인들이 작성한 조선무역통계도 석탄유와 석유가 같이 쓰였다. 석유제품이 휘발유 등으로 다양화된 이후에도 등유와 석유는 여전히 구분하지 않고 이후에도 등유와 석유를 큰 구별없이 자료에 따라 등유 또는 석유로 표기하고 있다. 본 문에서도 당시의 방법을 따라 석유로 부르기로 한다.

 

석유수입 확인자료

 

조선해관연보1883.11월 조선해관 설립이후 1885년부터 청일전쟁 발발직전인 1893년까지의 조선의 대외무역상황을 기록한 자료인데 중국해관연보의 부록으로 발행되었다. 임오군란이후 조선이 청국의 실질적인 예속국으로 전락됨에 따라 조선해관도 사실상 중국해관의 일부로 통합된 결과였는데, 청일전쟁이후에 일본의 요구로 더 이상 조선해관연보를 중국해관연보와 함께 발행하지 않게 되었다. 뒤에서 설명하는 일본의 영사보고중 1900.6.16. 보고한 한국외국무역통계에서도 1894년 이후 조선해관과 청국해관의 관계가 분리된 이후 조선해관에서 통계를 발행하지 않고 있다고 하면서 참고상 편의를 위해 1894-1899년간의 무역통계를 집계하여 보고한다고 소개하고 있다. 조선해관연보가 독립적으로 발행되지 않고 중국해관연보의 부록으로 발행된 것이 아쉽다는 것은 별도로 하고 내용 자체는 조선해관에서 기록하였으니 조선의 수출입에 대한 내용으로는 가장 정확한 자료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일본영사의 영사보고는 해외 각지에 주재하는 영사가 일본정부에 월간 또는 연간단위로 정기보고한 것으로, 그 내용은 현지의 통상경제정보, 무역상황, 상업, 공업, 수산, 농업, 광업, 교통, 화폐 및 금융, 관세, 전보, 시사, 잡보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있다. 우리나라에는 강화도 조약으로 1876.10월 부산을 개항하면서 영사업무를 수행하는 일본관리관이 파견되었고 같은 해 12.18일부터 부산의 영사보고가 이루어졌다. 뒤이어 개항된 원산과 인천에도 영사가 파견되어 연간단위 또는 월간단위로 영사보고를 하였는데, 주요 품목의 수출입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이들의 무역보고서를 통해 석유의 수입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일본 영사보고 통계중 1877년부터 1884년까지는 일본외국무역 18개년 대조표(1868-1885)의 부록으로 실린 조선구무역 8개년 대조표를 통해 확인하였는데, 이 통계는 우리나라에 석유가 수입된 사실을 나타내는 최초의 기록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석유가 최초로 수입된 것은 1877년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개항 이전부터 부산에는 왜관무역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일본에는 석유가 1868부터 본격적으로 수입되면서 사용이 확대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나라에의 석유도입 시기는 이 자료에서 확인된 1877년보다 더 거슬러 올라갈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1881년 이헌영이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 속칭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세관제도를 담당하여 일본에 파견한 기간중 기록한 것으로 1880.7.1.부터 12.31.까지 부산 및 원산항을 통하여 수출입된 물량의 수량 및 원가, 출입선박에 대해 기록한 조선국 수출입 반년표가 있는데, 이 자료의 내용은 조선구무역 8개년 대조표상의 1880년 수출입내용과 동일하고, 심지어는 일본의 연호, 엔화로 표기된 수출입액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점에서 보면 이헌영이 일본의 영사보고자료를 옮겨 적은 것으로 보인다.

영사보고 연간단위중 1881, 1883년과 1884년의 상반기 및 하반기, 1885년 상반기의 수입은 일본 외무성이 영사보고 내용을 편집하여 발행한 통상휘편(通商彙編) 1-6권을 통해 확인하였고, 1887년에서 1891, 1894년은 일본관보에 게재된 부산항, 원산항, 인천항의 각 항별 연도별 무역상황 보고내용 중에서 석유항목을 발췌하여 합산하였다. 1895년에서 1899년까지는 앞에서 설명한 1900년 영사보고 한국외국무역통계, 1900년은 1901년 영사보고인 한국외국무역개황에서 확인하였다.

월간단위 보고는 1889년에서 1896년까지의 기간 중 매 월별로 부산항, 원산항, 인천항의 무역상황을 자세히 보고하였는데 여기에서 확인한 석유의 수입물량과 수입금액의 각 항별, 월별 실적을 합산하여 연간 실적을 산출하였다.

일본 요코하마세관에서도 1901(추정), 1904, 1906년 세 차례에 걸쳐 한국의 수출입여건, 수출통계 등을 출장조사하고 보고서를 남겼는데 이중 석유수입에 관한 사항은 1897년에서 1900년까지의 통계를 기록하고 있고, 특히 1904년의 출장보고서는 당시의 조선의 석유유통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유통현황과 원산석유동업조합규약을 담고 있다.

일본 농상무성 상무국의 자료는 1880년의 상황연보(商況年報), 1905년의 한국사정조사자료(韓國事情調査資料)가 있다. 상황연보는 일본의 무역상황 등을 기록한 자료이고, 1905년의 한국사정조사자료는 상무국 직원이 190410월 조선에 출장을 다녀온 후 한국의 여러 상황을 조사하여 기록한 것인데 이를 통하여 1880, 1901년에서 1903년까지의 석유수입량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외에도 구한말 재무행정을 관장했던 탁지부에서 발행한 탁지부 통계연보, 통감부 및 조선총독부의 통계연보 및 조선수이출입품 15년 대조표를 통해 1901년 이후의 수입량을 확인하였다.

 

조선의 석유수입량

 

앞의 자료들에서 찾은 석유수입량을 [1]로 일괄하여 정리하였다. 이 중 조선해관연보의 통계가 가장 정확할 것이라고 보며, 다른 자료의 수입량 통계중 누락되거나 오류로 의심되는 부분은 다음과 같이 추정 또는 수정하였다.

조선구무역 8개년대조표1877년은 하반기, 1884년은 1월분만 반영된 내용이며, 1880년은 1년분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하반기실적만 반영한 이헌영의 조선국 수출입 반년표와 수입물량이 동일하다. 그리고, 이 물량은 뒤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일본의 농상무성 상무국의 자료 상황월보(1880)를 이용하여 추정한 수입량과 비교하면 큰 차이가 있다. 1877, 1878, 1879, 1881년은 수입량 없이 수입금액만 표기되어 있어서 1877, 1878, 1879년은 1880년의 수입단가를, 1881년은 1880년과 1882년의 수입단가 평균치를 적용하여 수입물량을 추정하였다.

또한, 영사보고 연간단위중 1885년은 상반기 분만, 1887년은 원산항 실적만 반영되어 있어 온전한 연간실적으로 보기 어렵다. 수입물량 표기없이 수입액 실적만 나타나 있는 1888, 1889년 부산의 수입량은 원산과 인천의 수입단가를, 1890년 부산과 인천, 1891년 부산, 원산, 인천, 1894년 원산은 당해년도 각항의 월간단위의 월별 평균 수입단가를 각각 적용하여 수입물량을 추산하였다. 또한 1894년의 수입량이 1900년 영사보고 한국외국무역통계에는 220,800갤런인데 반하여, 1894년의 연간 무역통계를 보고한 영사보고의 부산항, 원산항, 인천항의 수입량 합산규모는 1,209,543갤런(부산 343,270갤런, 원산 240,490갤런, 인천 657,690갤런)으로 두 자료에 큰 차이가 있다. 그러나, 전후년도의 수입량 추세(1893925천 갤런, 1895970천 갤런), 같은 해 월간단위 보고의 합산량이 1,241,450갤런인 점을 감안하면 220,800갤런보다 1,209,543갤런이 타당해 보여 이를 반영하였다.

영사보고 월간단위중 1889년은 부산항, 원산항, 인천항 모두 주요상품 실적만 기록되어 있고 석유는 일부 월에만 반영되어 있어 온전한 실적으로 보기 어려우며 수입금액만 표시되어 있으나 단순참고를 위해 각항의 연간단가를 적용하여 물량을 산출하였다.

일본 농상무성 상무국의 자료 상황월보(1880)에는 부산항 수입액만 표기되어 있어서, 부산항 영사보고 연간단위의 1881년 수입량 및 수입액으로 산출한 평균단가를 적용하여 6,610갤런으로 수입물량을 추산하였다.

이 같은 상황을 감안하면서 수입량을 비교하면 자료에 따라 약간씩의 차이가 있지만 수입량 증가추세를 짐작하기에는 큰 문제가 없는 모습을 보인다.

1877년 하반기 80갤런을 수입한 이후 189039만 갤런, 1900200만 갤런, 1910720만 갤런을 나타낼 정도로 수입량이 폭발하듯 증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 1 ] 조선의 석유 수입량

(단위 : 갤런)

 

조선해관

연보

영사보고

요코하마

세관

출장보고서

일본

농상무성

상무국

탁지부

통계연보 

통감부

통계연보 

수이출입품

15년대조표

조선구무역

8개년대조표

연간단위

월간단위

1877

 

80

 

 

 

 

 

 

 

1878

 

276

 

 

 

 

 

 

 

1879

 

1,296

 

 

 

 

 

 

 

1880

 

620

 

 

 

6,610

 

 

 

1881

 

10,669

10,670

 

 

 

 

 

 

1882

 

10,480

 

 

 

 

 

 

 

1883

 

8,420

13,288

 

 

 

 

 

 

1884

 

1,810

39,575

 

 

 

 

 

 

1885

187,240

 

79,960 

 

 

 

 

 

 

1886

101,207

 

 

 

 

 

 

 

 

1887

160,824

 

43,750 

 

 

 

 

 

 

1888

204,275

 

184,917

 

 

 

 

 

 

1889

397,830

 

303,245

114,349

 

 

 

 

 

1890

385,875

 

365,325

351,304

 

 

 

 

 

1891

543,440

 

520,411

539,054

 

 

 

 

 

1892

734,543

 

 

657,193

 

 

 

 

 

1893

954,710

 

 

924,970

 

 

 

 

 

1894

 

 

1,209,543

1,241,450

 

 

 

 

 

1895

 

 

880,690

970,820

 

 

 

 

 

1896

 

 

1,620,770

1,510,270

 

 

 

 

 

1897

 

 

2,314,830

 

2,331,780

 

 

 

 

1898

 

 

1,814,370

 

1,814,370

 

 

 

 

1899

 

 

2,448,365

 

2,490,365

 

 

 

 

1900

 

 

2,020,360

 

2,020,360

 

 

 

 

1901

 

 

 

 

 

2,482,891

 

 

2,484,011

1902

 

 

 

 

 

3,462,740

 

3,462,740

3,465,010

1903

 

 

 

 

 

2,568,157

 

2,568,157

2,591,087

1904

 

 

 

 

 

 

 

3,800,841

3,835,931

1905

 

 

 

 

 

 

 

4,235,670

4,245,355

1906

 

 

 

 

 

 

4,756,415

4,683,843

4,756,415

1907

 

 

 

 

 

 

5,110,596

5,110,596

5,110,596

1908

 

 

 

 

 

 

6,651,286

6,651,286

6,651,286

1909

 

 

 

 

 

 

 

4,822,047

4,822,047

1910

 

 

 

 

 

 

 

7,196,288

7,196,288

참고 : 음영처리된 부분은 통계가 일부만 반영되는 등의 이유로 전체 실적으로 보기 어려운 부분

자료

1. 조선해관연보 : 중국해관연보의 부록으로 발행된 조선해관연보(1885-1893년간 각년도 판).

2. 영사보고중 조선구무역 8개년대조표 : 일본외국무역 18개년대조표(1868-1885)의 부록으로 발행된 조선구무역 8개년대조표, p.12.

3. 영사보고중 연간단위

. 1881, 1883-1885 : 일본외무성 발행 通商彙編1-6

. 1887-1891, 1894 : 일본관보에 게재된 부산항, 원산항, 인천항의 각년도 영사보고(무역상황)내용을 합산하여 산정

. 1895-1899 : 한국외국무역통계, 일본관보 1900.8.29, p.444-447.

. 1900 : 한국외국무역개황, 일본관보 1901.5.18, p.341-343.

4. 영사보고중 월간단위 : 1889-1896년간 일본관보에 게재된 부산항, 원산항, 인천항의 매월별 영사보고(무역상황)내용중 석유수입량을 합산하여 산정

5. 일본 세관월보부록 요코하마세관 출장보고서(1901년 추정), p.49.

6. 일본 농상무성 상무국

. 1880: 商況年報, 농상무성 상무국, 1880, p.243.

. 1901-1903: 韓國事情調査資料, 농상무성 상무국, 1905, p.105.

7. 탁지부 통계연보 : 2회 탁지부 통계연보, 탁지부 관방통계과, 1908, p.93.

8. 통감부 통계연보 : 통감부 통계연보각 년도판. , 1909, 1910조선총독부 통계연보(1913), p.284.

9. 수이출입품 15년 대조표 : 조선 수이출입품 15년 대조표, 조선총독부, 1916, p.44.

 

조명용으로 석유가 도입된 이후 이 때까지 사용해오던 식물유나 어유에 비해 가격이 낮고 편리하다는 장점을 내세워 빠르게 그 수요가 확대되었고, 국민들의 생활필수품으로 자리잡았다. 1896년에는 독립신문의 생활물가 소개코너에서 매일 석유의 시세를 소개할 정도가 되었다. 1898년에는 한성부에서 집 앞에 장명등을 내걸고 달이 없는 밤에는 이를 밝혀 도적을 예방하도록 고시하였다. 조선의 석유수입량의 증가추세를 보면 과대한 평가로 보이긴 하지만, 이 조치에 대해 러시아 대장성에서는 조선의 석유수요에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가을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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