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기후협정과 트럼프노믹스, 한국의 에너지 안보는?
김명자 한국지속가능발전기업협의회(KBCSD) 회장, 한국과총 차기회장, 전 환경부장관(1999-2003), 국회의원(2004-08)
인류문명사와 에너지의 변천
인류문명사의 기본 동력은 에너지였다. 북반구에서 남향으로 집을 앉힌 것은 에너지 기술의 원조 격이었다. 기원전 3세기 그리스 시라큐스의 아르키메데스는 햇빛을 집광한 ‘거울광선 무기’를 만들어 로마군 함대를 불태웠다. 2005년 미국 MIT의 교수와 학생들은 이 장면을 재현했다 한다. 중세까지 인류문명은 에너지를 나무에 의존하다가 땔감이 고갈되자 영국에서 해변가에 뒹굴던 석탄(sea coal)을 때기 시작한다. 그러다 석탄 맥을 찾아 땅속 깊이 파고든다. 19세기 석유자원 탐사의 성공은 화석연료 시대의 개막이었다. 이후 석유화학산업은 천연 소재를 대체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의 잿더미로부터 산업문명을 재건하는 데 공신이 된다.
태양 에너지는 백 년 전에 실용화될 뻔했었다. 1878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프랑스의 오거스트 무쇼(A. Mouchot)는 태양 에너지 기술로 금메달을 땄고,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관객들에게 나눠줬다. 1913년 프랭크 슈만(F. Shuman)은 이집트에서 태양 에너지로 작동되는 관개수로를 건설해 사하라 사막을 경작지로 바꾸는 신천지를 꿈꾼다. 그러나 원유 보급이 늘고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그의 꿈은 몽상이 되고 만다.
에너지 환경변화의 최대 동인, 기후변화
21세기 지구촌은 유례없는 에너지 환경의 격동기를 맞고 있다. 최대 동인은 기후변화다. 2014년 UN IPCC(정부간기후변화기구)의 제5차 보고서는 인간 활동이 기후변화의 주된 원인일 확률이 95% 이상으로 ‘지극히 높다(extremely likely)’고 결론지었다. 세계경제포럼(WEF)의 연례 글로벌 리스크 보고서도 경제·환경·지정학·사회·기술 부문의 리스크 평가에서 계속 기후변화를 최대 리스크로 꼽고 있다. 이대로 간다면 21세기 안에 지구는 지난 1만년 동안 겪었던 것보다 더 큰 피해를 입게 돼, 생물종 멸종, 흉작, 질병, 사회경제적 갈등 등 전면적 위협에 직면할 거라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기후변화를 아직 ‘오지 않은 미래’라 여기고, 글로벌 차원의 거대 담론에 참여한다는 데 대해 무기력하게 느낀다.
그동안 기후위기가 문명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하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번지면서 국제사회는 참으로 어렵사리 2015년 파리 기후변화당사국총회(COP21)에서 196개국(EU 포함)이 참여하는 신기후체제를 출범시켰다. 이제 개도국까지 합류해 온실가스 감축의 국가 목표와 수단을 제시하고 실천에 옮기게 된 것이다. 파리 기후협정은 예상보다 빨리 ‘비준국이 55% 이상이고 그 나라들의 총 탄소 배출량이 55% 이상’이라는 조건을 충족시킴으로써 2016년 11월 4일에 발효됐다. 이산화탄소 배출의 상위 2개국은 중국(28%)과 미국(16%)이다. 그 뒤를 인도(5.8%), 러시아(4.8%), 일본(3.8%), 독일(2.2%), 한국(1.8%), 캐나다(1.7%), 이란(1.6%), 브라질(1.4%), 인도네시아(1.3%)가 따르고 있다(Statista 2016). 이들 11개국의 배출량이 세계 총량의 68%를 넘는다. 중국은 기후 협상에서 줄곧 선진국 책임을 역설해 왔다. 하지만 2005년에 자국의 연간 배출량이 미국을 앞지르고, 2015-2016년엔 누적 배출량이 미국을 앞지르게 되자, 태도가 바뀌었다. 대기오염 등으로 매일 200건 이상 시위가 벌어지는 것도 발등의 불이다.
기후변화 협정 발효, 트럼프노믹스와 불확실성
글로벌 차원의 참여, 이제 시작이고 불확실성도 크다. 파리 협정이 성사된 것은 미국과 중국의 리더십이 있어 가능했다. 그런데 트럼프의 당선으로 비상등이 켜졌다. 그는 기후변화가 실체라는 과학적 근거 자체를 부정한다. 심지어 미국의 제조업 경쟁력을 떨어뜨리기 위한 중국의 사기극(hoax)이라 했다. 기후변화 관련 연구개발과 기술 투자 예산 1000억 달러도 삭감해 경제 살리기에 쏟겠다고 한다. 힐러리 클린턴이 국무장관 시절에 제안한 녹색기후기금(GCF)의 사무국은 4년 전 우리나라에 유치됐지만, 트럼프의 등장으로 IPCC를 비롯한 국제기구의 활동에 영향을 줄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그는 EPA(환경보호청) 청장에 기후변화 정책 반대의 선봉장인 스콧 프루이트 오클라호마주 검찰청장을 임명했다. 그런가 하면 대선 캠페인에서 파리협정 탈퇴를 공약한 것과는 달리 당선 후 NYT 본사 방문에서는 “기후협정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고 있다. 인간 활동과 기후변화 사이에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다고 본다"며 한발 물러선 듯해서 어디로 튈지 알 수가 없다.
트럼프노믹스에서 분명한 것은 기후·에너지 정책의 역행이다. 그의 ‘미국 우선 에너지 계획(America First Energy Plan)’은 전통 에너지 산업에 대한 규제 철폐를 예고했다. 탄광 개발을 활성화하고, 셰일 에너지의 수압파쇄 공법에 대한 규제도 풀고, 미국 연안과 대서양 공공지역에서의 석유·가스 채굴 기술에 대한 메탄 규제 등도 철폐된다. 오바마 정부가 불허한 키스톤 송유관 사업도 재추진한다. 탄소세나 탄소배출 총량제는 일자리 죽이기라고 반대하고 있어, 오바마의 핵심 환경정책인 청정전력계획(Clean Power Plan, 2014.6)은 물 건너갔다. 2030년까지 발전소의 탄소 배출을 2005년 대비 1/3 감축한다는 이 규제가 발효되는 경우 화력발전소는 폐업 위기에 몰리게 돼 있었다. 현재 위법성 여부를 놓고 소송이 벌어진 상황에서, 트럼프는 백지화를 선언했다. 그리 되면 미국의 탄소 배출은 오바마 계획에 비해 2024년까지 16% 늘어나게 된다. 하지만 이미 몇몇 주정부는 에너지 신산업에서 일자리와 경제성장의 효과를 상당히 거두고 있다. 트럼프의 정책 역주행의 영향이 제한적일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미국발 셰일 혁명의 향방
당초의 예상과는 달리 화석연료는 신공법 개발로 해서 가채 기간이 늘고 있다. 극적인 변화가 미국발 셰일 혁명이다. 2008년 이후 미국의 셰일 필드는 세계 석유 생산량 증가 물량의 절반을 생산해 미국의 생산량을 두 배로 늘렸다. 이들 비전통 에너지는 미국과 석유수출국기구(OPEC) 간의 치킨 게임을 유발시켜 수급 변동과 가격의 급등락을 불러왔다. 2000년대 초반 배럴당 20달러이던 유가는 2008년에 150달러까지 치솟다가 2009년 40달러 대를 거쳐 80 달러대를 유지하다 2014년 50달러로 내려갔다가 2016년 12월 50달러 초반에서 마감됐다.
셰일 혁명은 기존의 수직굴착에서 수평정 시추기술과 수압파쇄법(hydrolaulic fracking) 개발 덕분에 가능했다. 중국은 수압파쇄에 필수적인 수자원 부족으로 손을 댈 수가 없고, 유럽은 환경 관련 규제로 발이 묶여 있다. 저유가가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고 셰일혁명이 일자리를 창출한 것은 긍정적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려도 만만치 않다. 물과 모래와 함께 독한 화학물질을 투입하기 때문에 수자원 오염 등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대수층의 물을 빼냄으로써 지반 약화로 지진 발생 빈도가 높아진다, 극심한 가뭄을 겪는 지역을 보니 셰일가스 개발 지역 근처다, 셰일 파쇄 과정에서 메탄가스가 방출되므로 기후변화 관련 규제가 불가피하다 등의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물을 쓰지 않는 기술을 개발한다는데 십여 년은 걸릴 것이다.
에너지 안보, 장기적인 에너지 외교력이 열쇠
지구상 200여 개국의 에너지 믹스 설계에서는 기술, 제도, 인프라 등 변수에 따라 차이가 클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는 원자력 포함해서 에너지 자급도가 15%도 못된다. 에너지 산업이 수입·정제·변환·공급·소비의 다운스트림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러니 에너지 탐사·채굴·생산의 업스트림으로의 진출이 필요하다. 하지만 전문성 부재의 방만한 공기업 독점체제에다가 정책·관리의 부실로 정치적 스캔들로 추락하는 게 암담한 현실이다.
셰일혁명으로 촉발된 저유가 사태를 보며 보다 근원적이고 장기적인 차원의 에너지 외교력을 절감하게 된다. 통계상 중국·일본·한국·대만이 수입하는 LNG는 세계 총 수입량의 61%나 된다. 아시아 국가의 석유 수입은 전 세계의 22%다. 한중일 3국의 석유 수입은 전 세계의 19%다. 그럼에도 이들을 잇는 천연가스나 기름의 파이프라인이 구축되지 못해 유럽·북미에 비해 훨씬 비싼 값을 지불하고 있다. 그렇다면 3국이 연대하여 대규모 수입국으로서의 레버리지를 가질 수 있어야 하는데 결실을 본 게 없다. 북한 변수는 에너지 인프라망 구축에서도 걸림돌이 되고 있다. 글로벌 에너지 패권의 정글에서 에너지 안보를 해결하고 에너지 신산업을 창출하는 역량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을까, 명분을 살리고 실리를 챙기는 에너지 외교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을까가 열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