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후장대, 브릭스 황금시대 저무나?
아시아경제신문 산업부 오주연 기자
‘중후장대’산업의 위기
최근 '중후장대(重厚長大)' 산업이 경기부진 등의 영향으로 한파가 불고 있다. 철강업계는 수요감소와 오너이슈 등으로 안팎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고, 조선업계는 조(兆) 단위 적자로 사상 최악의 위기상황에 내몰리면서 급기야 사장단이 급여 전액을 반납하겠다고 외친 상태다. 화학업계 역시 중국발 공급과잉으로 선제적 대응차원에서 사업재편이 논의되고 있다. 여기에 업종을 가리지 않고 사업 구조조정 가능성까지 언급되면서 온통 우울한 소식밖에 없다.
중화학 출입을 맡은 담당기자로서 매번 '어렵다'는 얘기를 하게 되니 답답할 노릇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번 지면을 통해서도 또 한번 힘든 상황을 언급해야 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중후장대 업계가 국내시장에서 벗어나 해외시장에서 활로를 모색하려고 바둥대고 있지만 그 여건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중후장대 업계는 일찍이 신흥국으로 발판을 넓혀왔으나, 최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이마저도 녹록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녹록치 않은 브릭스(BRICs) 국가
중후장대 업종은 브릭스(BRICs, 브라질ㆍ러시아ㆍ인도ㆍ중국) 국가에서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철강ㆍ정유ㆍ화학ㆍ기계 등으로 대표되는 이를 산업군은 1990년대 이후 신흥국 중에서도 고성장을 거듭했던 브릭스 지역에 투자를 집중했지만, 이들 나라들의 성장이 정체되면서 수익성이 악화일로다. 여기에 글로벌 업체들의 경쟁까지 치열해지면서 공급과잉, 가격하락 등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양새다.
철강산업
국내 대표적인 뼈대산업인 철강부터 살펴보자. 지난해 중국에서 철강재를 생산ㆍ가공ㆍ판매 중인 포스코의 경우, 중국현지 법인 18곳 중 30%가 넘는 6곳이 적자를 기록했다. 전기강판을 생산ㆍ판매하는 '포스코(광동)스틸'은 2012년과 2013년 각각 78억원, 209억원의 손해를 봤으며 지난해에도 24억원의 순손실을 기록했다. 자동차용 고급강판을 생산하고 있는 '포스코(광동)오토모티브스틸' 역시 최근 2년간 100억원에 가까운 손실을 봤다. 또한 포스코의 중국내 스테인리스스틸(STS) 생산 거점인 '장가항포항스테인리스스틸'의 경우 2013년 한 해 동안 790억원이 넘는 순손실을 기록하기도 했다. 중국 법인들의 실적이 악화되자 포스코의 중국내 지주회사 격인 '포스코차이나홀딩스'의 이익 규모도 2011년 145억원에서 지난해 8억8000만원으로 급감했다. 인도, 브라질에서의 사업도 별 반 다르지 않다.
포스코는 2012년 인도 자동차 산업의 중심지인 인도서부 마하라슈트라주(州)에 총 4200억원을 투자해 연산 45만t 규모의 자동차 및 가전용 강판 생산 공장을 준공하고 신흥시장 공략에 나섰지만, 아직까지 적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포스코 인도법인 중 가장 규모가 큰 '마하라슈트라(POSCO Maharashtra Steel)'는 2013년 415억원의 손실을 낸 데 이어 지난해에도 267억원의 순손실을 기록했다. 포스코 브라질 법인 또한 3개 중 2개 법인이 손실을 보고 있는 상태다.
현대제철의 중국 청도 법인인 청도현대기계유한공사(청도현대)도 주력 제품의 판매량과 수익이 크게 줄었다. 지난해 청도현대는 516억원의 매출과 6억4000만원의 순이익을 기록했다. 이는 4년 전인 2010년 매출(1984억원), 순이익(61억원) 규모와 비교하면 매출은 4분의 1, 손익은 10분의 1로 줄어든 셈이다. 업계에서는 중국의 품질력 향상, 가격경쟁력 우위 등을 이유로 꼽는다.
그동안 중국산 철강재는 가격 측면에서 '저가'를 내세우며 경쟁력을 가져왔지만 품질은 한국, 일본에 비해 크게 떨어졌던 것이 사실. 그러나 최근 이마저도 급속도로 따라잡고 있는 상황이다. 국내 업체들이 '저품질의 싸구려 제품'이라고 괄시했던 중국산 제품들이 어느새 GM, 도요타 등 글로벌 완성차 공장에도 강판을 공급할 정도로 품질력까지 갖추게 된 것이다. 이에 국내 철강사들의 판매환경은 더욱 악화되고 있다.
정유ㆍ화학산업
정유ㆍ화학업종도 브릭스에서 맥을 못추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한국석유공사 페트로넷을 통해 지난 2011년부터 2014년까지 최근 4년간 브릭스 4개 국가와의 석유제품 수출물량 및 금액을 분석한 결과, 거래량이 눈에 띄게 감소했다. 석유제품 대중수출 물량은 2011년 9191만배럴에서 2012년 8445만배럴, 2013년 7615만배럴로 감소하다가 지난해에는 6977만배럴까지 고꾸라졌다. 같은 기간 수출액은 2011년 102억6600만달러에서 지난해 69억533만달러로 30% 이상 감소했다.
인도로 수출된 석유제품 물량 역시 2011년 664만배럴에서 지난해 484만배럴로 줄었고, 수출액은 10억5682만달러에서 6억3003만달러로 40%나 급감했다. 브라질 수출 물량은 최근 4년새 10분의 1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2011년 948만배럴이 브라질로 수출됐지만 지난해에는 84만배럴에 그친 것. 금액으로 따지면 12억236만달러에서 1억725만달러까지 떨어져 겨우 명맥만 유지했다. 러시아의 경우 2012년까지만 해도 101만배럴 정도를 수출했지만 2013년과 작년엔 수출 물량이 전무한 상황이다.
중장비 산업
굴착기 등 중장비 사업도 중국에서 고전하고 있다. 건설기계부문이 전체 실적의 75% 가량을 차지하는 두산인프라코어는 중국 정부의 지원을 등에 업은 로컬기업 싼이중공업에 밀려 중국 굴착기 시장 점유율이 2010년 15% 수준에서 최근 7~8%로 밀려났다. 같은 기간 싼이중공업의 시장 점유율이 6.6%에서 17%까지 올라섰다.
중국에 건설장비인 휠로더 생산법인을 두고 있는 현대중공업 역시 올 상반기 134억원 규모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했다. 중국 현지업체들 사이에서는 이미 본인들이 가격과 기술력 측면에서 한국제품을 따라잡았다고 여긴다고 한다. 여기에 엔화약세까지 겹쳐 국내 업체들이 설 땅이 점차 좁아지고 있다.
불황을 타개하는 방법
이를 타개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로는 '신기술 개발'이 아닐까 한다. 고부가가치 제품을 통해 저가 중국산과의 경쟁에서 이기고 불황을 타개하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중후장대 업계는 고강도 긴축경영을 실시하면서 미래 투자까지 줄이고 있는 상태다. 비핵심자산 매각 등 '줄일 수 있는 것은 다 줄이자'는 식의 구조조정이 이뤄지는 과정에서 연구개발비까지 축소하고 있는 것.
일례로 국내 빅3 조선업계는 올 3분기까지 연구개발투자비가 지난해 같은기간 대비 577억6600만원 줄었다. 잇단 구조조정 속에서 연구개발에 적극 몰입하기가 어려워진 것으로 보인다. 포스코도 올 3분기 연구개발비가 3454억100만원에 그쳐 지난해 같은기간 5245억1200만원에서 34%나 감소했다. 그러나 연구개발은 회사의 미래 먹거리를 위해 장기적인 안목으로 투자하는 것이기 때문에 향후 매출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지속적으로 연구개발에 투자한 기업의 매출은 업계 평균치보다 2배 이상 높았다는 조사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4년 기업활동조사'에 따르면 2006년부터 지난해까지 최근 9년간 존속한 기업 중 지속적으로 연구개발에 투자한 기업의 기업당 매출액은 5190억원으로 전체 기업 매출액 평균(1840억원)의 2.8배에 달했다. 글로벌 시황 악화는 대세적인 흐름이기 때문에 개별 기업들이 노력한다고 개선될 수 있는 사항은 아니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투자는 게을리 할 수 없는 일. 중국이 국내 기술을 바짝 추격하고 있는 상황에서 제때 투자를 놓치게 되면 성장동력까지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빠른 시일 내에 '그때 한창 힘들었지'라며 비교 기사를 쓰게 될 날을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