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석유산업 발전의 시대적 변천사
이문배 박사
우정석유가스전략연구 CEO
전) 에너지 경제연구원 에너지 시장연구실장
1. 60년대 : 세계 석유시장 메이저 시대에 국내 석유산업의 태동
- 유공과 호남정유 설립 -
가. 국내외 시장 여건변화
60년대 말까지 세계 석유시장은 7개 석유메이저들의 시대였다. 즉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에 진출한 석유메이저들은 유전탐사와 개발에서 원유생산, 정제 및 석유제품 판매에 이르기까지 세계 석유산업 전반을 장악하였다. 한편 우리나라는 60년대 초 제3공화국 시절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추진하면서 자립경제의 기반 구축과 수입대체산업 육성이라는 정책목표 하에 정유공장 건설을 추진하였다. 정부는 1962년 정부투자기관으로 대한석유공사(약칭: 유공)를 설립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울산 정유공장 건설을 추진하였다. 그 이전까지 국내 석유제품 공급은 해방 이후부터 1949년에 체결된 한미석유협정에 근거하여 설립된 KOSCO(대한석유저장회사)와 미국계 3개 메이저 회사(스텐다드 석유회사, 칼텍스, 쉘)가 전국 10개 지역에 설치한 34개 대리점과 주유소 및 부판점을 통해 이루어졌다.
나. 국내 석유산업 태동과 발전
정부는 당초 유공을 설립하고 순수 국내자본만으로 울산 정유공장 건설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건설과정에서 미국계 석유메이저 Gulf가 참여하게 되었다. 이는 정유공장 건설 추진과정에서 부족자금에 대한 외자도입을 결정하였으나 외자조달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어려운 상황에서 Gulf사가 유리한 장기저리 차관을 제공하였고 원유공급 보장 및 25% 주식인수를 통한 경영참여 등 조건을 제시하였으며 우리 정부가 이를 받아들여 성사되었다. Gulf의 유공에 대한 투자 및 경영참여는 Gulf사의 투자이익을 위한 것이었으나 당시 정유공장 건설 및 운영에 대한 기술이나 경험이 전혀 없었던 우리나라로서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해결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Gulf가 국내 최초의 외국투자기업으로 이후 외국기업들이 한국 투자진출에 길을 열어주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
1962년 9월에 착공한 울산 정유공장은 당초 정제능력 2만5천 b/d로 계획되었으나 추진과정에서 상압증류시설의 정제능력이 3만5천 b/d로 재조정되었다. 정유공장은 1963년 12월 완공되어 이듬해인 1964년 2월부터 45일간의 시운전을 거쳐 4월1일부터 정상 가동에 들어갔다. 유공은 이후 제품 저장과 판매를 맡고 있던 KOSCO까지 인수함으로써 저유소와 판매망까지 확보하여 생산과 함께 직판체제도 구축할 수 있었다.
1964년 본격 가동 이후 1970년까지 6년 동안 울산 정유공장의 정제능력은 35천 b/d에서 115천 b/d로 무려 3배 이상 확장되었다. 정제능력 확장은 1967년과 1968년에 사이에 이루어졌는데 1967년의 증설은 제1차 상압증류탑의 부분적인 시설추가와 개조로 정제능력을 55천 b/d로 확장하였고, 1968년에는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기간 중 필요한 석유화학공업의 원료공급을 확보하기 위하여 6만 b/d 규모의 제2 상압증류시설을 완공하였다. 한편 가동률에 있어서 울산 정유공장 가동 초년도 제품 수급구조 불균형으로 설비 가동률이 50%대에 그쳤으나 이후 줄곧 평균 90%대의 가동률을 유지하였다. 이는 1차와 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영향으로 같은 기간 동안 국내 석유수요는 1964년 약 2만 b/d 수준에서 1969년 14만 b/d로 연평균 48%의 높은 소비증가율을 기록하였다.
1966년 4월 정부는 계속해서 늘어나는 석유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민간기업을 대상으로 제2정유공장 건설에 대한 실수요자 공모를 실시하였다. 여기에 당시 럭키를 포함하여 롯데, 한국화약계열 등 6개 기업들이 사업계획서를 신청하였으나 최종적으로 럭키가 조건부로 제2정유공장 사업자로 선정되었다. 정부가 제시한 조건은 외국기업과의 차관조건을 정부안에 맞추는 것이었는데, 럭키는 칼텍스와의 협의에서 합작투자에 원만하게 합의하고 11월17일 정부로부터 제2정유공장 실수요자로 지정되었고, 이듬해 5월에 호남정유를 설립하게 된다. 민간 정유회사 호남정유는 1967년 2월 전남 여천군 삼일포지역에 6만 b/d 규모의 정유공장 건설을 착공하여 1969년 3월에 완공하고 시운전을 거쳐 동년 6월3일 본격 공장가동에 들어갔다.
이외에 민간회사로 극동석유가 1965년 12월 부산에 정제능력 3천 b/d의 소규모 상압정제시설을 완공하고 이어서 2천 b/d의 감압증류설비와 관련 시설을 도입하였다. 동사는 일본 석유회사를 통해 원유를 도입하여 상압공정에서는 나프타와 경유를 감압공정에서는 윤활유와 아스팔트를 생산하였다. 또한 1968년에 메이저 로얄더치쉘과 합작투자에 합의하고 이듬해 초 회사명을 극동쉘석유(주)로 변경하였고 기존 3천 b/d의 상압정제시설을 2만 b/d로 증설하는 사업계획을 확정하였다. 그러나 동 증설계획은 주변 여건 변화로 실패로 돌아갔다.
2. 70 - 80년대: 오일쇼크 파고 속에 국내 석유산업 발전 지속
- 경인에너지, 쌍용정유 설립과 ㈜선경의 유공 인수 -
가. 국제유가 동향 및 국내외 시장여건 변화
70년대에 2차례 발생된 오일쇼크는 세계 석유시장에 커다란 변화를 자져왔다. 우선 1973년에 발생된 제1차 오일쇼크는 이스라엘과 중동국가들 간에 벌어진 제4차 중동전쟁이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중동 산유국들은 미국의 이스라엘에 대한 무기지원에 반발하여 원유감산과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서방국가에 대한 금수조치를 발표하였다. 세계 석유시장은 물동량 부족과 함께 유가 폭등에 직면하게 된다. 이후 중동 산유국들의 석유자원 국유화가 가속화되었으며, OPEC이 기준원유 가격을 결정하고 공시하는 시대가 1980년대 중반까지 지속되었다. 제2차 오일쇼크는 1978년 말 발생된 이란혁명의 결과로 이란이 원유 대외수출을 전면 중단함으로써 야기된 것이다. 특히 제2차 오일쇼크 이후 석유시장에서 메이저들의 영향력이 급속하게 위축되었으며 원유 현물시장과 선물시장이 발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70년대 2번의 오일쇼크 발생으로 국제유가는 매번 큰 폭으로 상승되었다. 1972년 원유가격은 배럴당 연평균 $1.90를 기록하였으나 이후 1973년과 1974년 각각 $2.83과 $10.41로 사태발생 이전대비 최대 5배 이상 급등하였다. 1차 오일쇼크는 1975년 이후부터 산유국들의 경제개발 영향으로 오일머니가 서방국가로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유가안정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란의 회교혁면 이후 유가는 OPEC의 공시가격에도 불구하고 공급물량 부족으로 현물시장에서 배럴당 $40 이상까지 무섭게 치솟았다. 특히 2차 오일쇼크는 1980년 9월에 이란 이라크 전쟁으로까지 이어지면서 고유가 상황은 1981년까지 이어졌다. 세계경제성장률은 연 2%대로 위축되었고 물가는 연 10%대의 상승률을 기록하였다. 특히 우리나라는 고유가의 영향으로 1980년 경제성장률 -1.5% 성장과 연 20%가 넘는 물가상승률을 기록하였다.
2차 오일쇼크 이후 줄곧 오르기만 하던 유가 상황은 1982년부터 하락세로 반전되었다. 이는 소비국을 중심으로 고유가에 대응하여 석유대체에너지원을 개발하고, 비OPEC 국가들도 적극적으로 유전개발에 나서면서 원유 생산량이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에 원유 현물시장과 선물시장이 발달되면서 원유가격의 결정구조가 OPEC에서 점차 시장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이 같은 영향으로 1983년 이후에 국제유가는 빠르게 하락하는 추세를 보였다. 급기야 OPEC은 1985년 12월 총회에서 비OPEC에 맞서 시장점유율 경쟁을 선언하였고, 사우디아라비아는 원유 생산조절자(swing producer)의 역할을 포기하였다. 결국 국제유가는 급락하기 시작하였으며 1986년 상반기에는 배럴당 $10 수준까지 폭락하였다. 이후부터 유가는 전적으로 시장 수급상황에 따라 결정되는 시스템으로 정착되었다.
한편 우리나라 경제는 1973년 제1차 오일쇼크 발생에도 불구하고 고도성장을 지속할 수 있었다. 이는 정부가 주도하는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계속 이어짐에 따라서 경제규모가 급격하게 팽창하였고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산업구조 고도화정책은 국내 에너지소비의 빠른 증가를 가져왔다. 특히 산업용 연료로 가장 효율적이었던 석유는 제1차 오일쇼크의 위기에서도 소비물량이 빠르게 증가하였고, 전체적인 에너지 수요 구성면에서도 1975년 석유비중이 47%를 기록하는 등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70년대 경제성장률은 75년 불변가격 기준으로 연평균 9.5%를 기록하였으며 같은 기간 동안 석유소비 증가율과 에너지소비 평균 증가율은 각각 13.8%와 8.0%의 높은 수준을 기록하였다. 1차 오일쇼크의 영향으로 전년대비 1.6%의 낮은 소비증가율을 기록한 1974년을 제외하면 70년대 기간 동안 매년 10% 이상의 석유소비 증가율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제2차 오일쇼크 발생 이후 국내 석유 수요 증가율은 크게 둔화되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특히 1981년과 1982년도에는 고유가와 경기침체의 영향으로 석유 수요가 마이너스를 기록하였다. 정부는 2차 오일쇼크 이후 원유수입 다변화 정책과 함께 LNG 도입 등 에너지원 다변화 정책도 병행하였다. 고유가로 인한 석유소비 둔화 추세는 80년대 중반까지 유지되다가 80년대 하반기부터 점차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벙커-C와 경유 등 산업용 및 수송용 수요를 중심으로 큰 폭의 증가를 보였다.
다. 국내 석유산업의 확장과 발전
1970년대 석유제품의 급격한 소비 증가는 국내 석유산업에 정유시설의 확장을 유도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특히 1978년에 들어서면서 국내 석유수요가 예상보다 빠르게 늘어나는 상황이 전개되자 정부는 석유수요 증가에 대응하기 위하여 신규 정유공장 건설의 필요성 이외에 기존 정유회사들의 설비확장도 조심스럽게 검토하였다. 70년대 후반에 정부는 유공 15만 b/d, 호남정유 15만 b/d, 경인에너지 10만 b/d 등 기존 정유회사의 약 40만 b/d규모의 증설이 필요성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1970년 22만 b/d 규모였던 국내 정제설비능력은 1975년 44만 b/d, 1978년에는 58만 b/d로 확장되었다. 그러나 제2차 오일쇼크 발생 이후 소비둔화 등의 영향으로 80년대에 정제설비 증설은 없었으며, 80년대 후반에는 중질유 분해시설과 탈황시설에 대한 투자가 일부 진행되었다.
한국화약은 1969년 Union Oil과 합작투자로 1969년 경인에너지를 설립하고, 1971년 정제능력 6만 b/d 규모의 인천 정유공장을 건설하였다. 이후 동사는 1979년 1월 정제시설을 10만 b/d로 확장하는 사업을 정부로부터 허가받았으나 2차 오일쇼크의 영향으로 Union Oil측이 신규투자를 지연시키면서 확장계획이 중단되었다. Union Oil은 결국 1984년 경인에너지에서 철수하게 된다. 경인에너지는 이후 상호를 한화에너지로 변경하였다.
쌍용정유는 시멘트산업을 주축으로 하는 쌍용그룹이 1차 오일쇼크의 상황 속에서 이란 국영석유회사 NIOC(National Iranian Oil Company)와 한국에 정유공장 건설을 위한 투자협상을 진행하였다. 1973년부터 시작된 양측간의 투자협상은 우여곡절 끝에 1975년 10월 합작투자협상을 마무리하고 동년 12월 정부로부터 석유정제사업 승인허가를 취득하여 1976년 1월 한·이석유를 출범시켰다. 온산 정유공장 건설이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은 1977년 봄부터였다. 그러나 건설 과정에 상압증류탑 공사가 최종 설치과정에서 도괴되는 사고 등으로 공기가 상당기간 지연되었다. 1979년 8월에서야 상압증류탑 복구로 정제능력 6만 b/d의 온산 정유공장이 준공되었다. 그러나 이란 회교혁명의 영향으로 이란 측으로부터 원유공급의 문제 등이 제기되었으며, 1980년 6월 NIOC측이 한·이석유에서 최종 철수하고 쌍용이 이란측 지분을 인수하는 대신 이란은 원유를 연간 단위계약에 따라 공급하기로 합의함으로써 타결되었다. 결국 한·이석유는 이란이 철수한 가운데 1980년 6월 “쌍용정유주식회사”로 사명을 변경하여 순수 민간자본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한편 기존 유공과 호남정유, 극동정유 등도 생산능력 확장과 사세 확장을 계속 이어갔다.
유공은 1970년대 우리나라 경제가 고도성장을 지속하는 동안 늘어나는 석유 수요를 안정적으로 충족시키기 위하여 정제시설의 확장을 꾸준하게 진행하였다. 또한 정제설비 확장과 더불어 석유화학시설의 건설도 추진되었다. 설비 확장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1972년 10만5천 b/d 규모의 제3상압증류시설을 건설하였고, 1974년에는 제2상압증류시설을 11만 b/d로 확장하였다. 1972년 10월 석유화학 기초 원료 에틸렌 생산을 위한 연산 10만 톤 규모의 납사크래커 설비를 완공하고 1973년 3월부터 가동을 시작하였다. 우리나라가 석유화학공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는 계기가 된 유공 납사크래커에 대한 투자 뒤에는 1970년에 동 투자에 필요한 추가 외자조달을 위하여 정부가 Gulf사에 대하여 유공 주식 25%의 추가인수를 승인하는 조치가 있었다. 이로써 Gulf사가 유공 주식의 50%를 갖고 Gulf가 우리나라에서 철수하는 1980년 8월까지 약 10년 동안 유공의 경영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동 납사크래커 설비는 이후 1978년 에틸렌 기준 155천 톤 생산 규모로 확장되었다. 미국계 석유메이저인 Gulf사는 중동지역에서 주로 쿠웨이트와 이란지역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었으나 1978년 말 이란의 회교혁명과 함께 몰아닥친 2차 오일쇼크 발생 이후 중동지역에서 원유 확보에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급기야 1980년 3월 유공에 대한 원유공급도 중단되는 사태를 맞게 되자 Gulf사는 유공에서 전면 철수키로 결정하였다. 1980년 Gulf사의 철수는 우리 정부의 유공 민영화 방침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선경이 1980년 8월 Gulf사 소유주식 50%를 인수하고, 동년 12월 정부의 민영화 방침에 따라 정부지분까지 인수함으로써 유공의 경영권을 확보하였다. 이로써 당초 정부투자기관으로 출범했던 유공은 메이저 경영시대를 거쳐 순수민간 기업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선경은 1982년 7월 사명을 “대한석유공사”에서 “주식회사 유공”으로 변경하였다. 민간 기업으로 탈바꿈 한 ㈜유공은 80년대 후반에 제2차 납사크래커(연산 40만 톤)를 추가로 건설하였고, 예멘의 마리브 유전개발 투자를 통해 유전개발에 참여하는 등 자원개발 사업에도 진출하였다.
호남정유는 6만 b/d 규모의 1차 상압증류설비를 가동한 지 1년이 지나지 않아서 1970년 3월에 곧바로 10만 b/d로 확장하는 공사에 착수하여 동년 10월에 완공하였다. 동 확장공사는 당초 증류탑의 설계규모가 10만 b/d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열로와 열교환기 등만을 개조 또는 교환함으로써 비용과 공기를 단축할 수 있었다. 호남정유측은 확장 공사가 끝나자 곧바로 6만 b/d 규모의 제2 상압증류설비 건설에 착수하였다. 동 정제설비 확충공사는 1972년 8월에 완공되었으며 2개월 동안의 시험가동을 거쳐서 동년 10월에 정상가동에 들어갔다. 이로써 호남정유는 공장 준공 3년 만에 정제능력 16만 b/d의 대단위 정유공장으로 발돋움하였다. 이후 우리나라는 1976년까지 정부의 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추진으로 경제의 양적 확대와 질적 개선을 이룩하였다. 특히 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기간(1972 ~ 1976) 동안 1차 오일쇼크 발생의 악영향에도 불구하고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였다. 또한 핵심 에너지원으로 자리 잡은 석유수요는 연평균 10% 수준의 소비증가율을 기록하였다. 이에 따라 호남정유는 1977년 2월 7만 b/d 규모의 3차 정제설비 증설을 추진하게 되었다. 동 증설공사는 1978년 11월 준공되어 정상가동에 들어갔다. 동사는 1977년부터 장기수급예측에 따라 적정규모의 증설규모를 15만 b/d로 산정하고 4차 확장사업계획서를 정부에 제출하여 1978년 10월 증설허가를 받았다. 동 4차 증설공사는 1979년 4월에 착공하여 1981년 6월에 완공함으로써 호남정유는 정제능력 38만 b/d를 갖추었다.
극동정유와 쉘의 2만 b/d 증설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기존설비의 증설을 통해 1972년 상압증류시설을 5천 b/d로 확장하였다. 이후 1977년 쉘측의 지분을 현대가 인수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이에 따라서 1977년 5월 쉘측 공동대표이사가 사임하고 회사명을 “극동석유공업주식회사”로 변경하였다. 이로써 극동석유는 처음처럼 다시 100% 국내 민간자본으로 환원되었다. 1977년 4월 정부로부터 정제능력을 5천 b/d에서 1만 b/d로 증설하는 증설허가를 받아 이듬해 8월에 설비 증설을 완료하였다. 그러나 1만 b/d 규모의 생산능력으로는 국내시장에서의 경쟁력은 미약한 상태였다. 특히 2차 오일쇼크 이후 원유가격이 폭등하자 원유조달의 어려움과 함께 막대한 고정비용의 부담으로 적자규모가 누적되면서 대규모 설비증설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에 극동석유는 6만 b/d 규모의 증설계획을 수립하고 1979년 정부에 증설허가를 신청하게 된다. 그러나 제2차 오일쇼크의 여파로 국내경제가 급격하게 위축되고 석유소비도 격감하여 정유업계의 가동률이 떨어지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이에 정부는 설비증설을 허가하지 않았고 극동석유의 증설계획은 수포로 돌아가는 둣 보였다. 극동석유 경영진은 적극적으로 증설의 불가피성과 함께 동사의 기술력과 입지조건 등을 당시 동력자원부 고위층을 대상으로 브리핑하였고, 1981년 초 정식으로 6만 b/d 증설허가를 받았다. 또한 당시 남아도는 중질유를 경질유로 전환시키는 3만4천 b/d 규모의 중질유분해시설 설치에 대한 사업승인을 별도로 정부로부터 받았다. 6만 b/d 증류시설 증설과 중질유분해시설까지 포괄하기위하여 증설입지를 재검토한 결과 극동석유는 새로운 정유공장 입지로 충남 서산군 대산면 일대 해안지역을 선정하였다. 결국 증설 프로젝트는 신설 프로젝트로 바뀌었고, 정부는 부산의 기존 공장시설을 타용도로 전환하라는 조건이 부가되었다. 대산정유공장 건설은 2년 1개월의 공장부지 조성공사를 거쳐 1986년 7월 착공하여 1989년 10월에 완공되었다. 동년 11월부터 상압정제시설이 정상가동에 들어감으로써 정부의 증설허가 이후 7년 10개월 만이었다.
3. 90년대: 국제유가 안정기, 국내석유산업 자유화와 개방화의 흐름
- 유가 자유화 및 석유산업 규제완화 -
가. 국내외 시장여건 변화
90년대 국제유가는 배럴당 $15 전후로 전반적인 저유가 수준이었다. 석유시장은 OPEC과 비OPEC 사이에 시장점유율 확보 경쟁이 지속되었다. 즉 OPEC은 적정유가 수준 유지를 위한 비수기 감산과 성수기 증산을 반복해왔으나 비OPEC 산유국들의 증산으로 별다른 효과를 발휘할 수 없었다. 따라서 국제유가는 석유수요의 계절적 변화에 따라 등락이 이어졌다. 90년대 첫해인 1990년 8월초 이라크가 전격적으로 쿠웨이트를 침공함으로써 수급상황이 악화되자 유가는 급등하였고 9월에는 최고 배럴당 $40까지 치솟았다. 그러나 사우디 등 중동 OPEC 산유국이 증산에 참여하고 주요 석유소비국들이 IEA 규정에 의거하여 전략비축유를 방출하게 되면서 석유시장은 빠르게 안정을 찾았다. 결국 위기대응을 위한 전략비축유의 유용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97년에는 아시아 외환위기 사태로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태국과 인니 등 국가들이 환율 급등으로 물가폭등과 경기 불황의 어려움을 겪었다. 1998년 말 OPEC 총회에서 대규모 증산을 결정한 이후 석유시장은 공급과잉 우려로 약세를 이어갔다. 1999년 1월 - 2월에 유가는 약세를 지속하며 배럴당 $10 이하로 급락하는 사태로 발전하였고, 그 결과 OPEC은 1999년 3월 총회를 앞두고 대규모 감산을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OPEC의 감산발표 이후 국제유가는 점차 회복되었다. 그러나 90년대 기간 동안의 전반적인 저유가 상황은 다국적석유기업(International Oil Companies)와 비OPEC 산유국들의 상류부문 투자를 위축시키고, 그 결과 비OPEC이 원유공급 잠재력을 약화시켜 2000년 이후 유가상승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국내 석유수요를 살펴보면, 1990년 976천 b/d에서 1999년 1,971천 b/d로 기간 동안 거의 2배 증가되었다. 이는 기간 중 연평균 소비증가율 8.1%로 GDP 증가율 5.8%를 크게 앞서는 수준이었다. 특히 1997년 말에 닥친 외환위기의 결과로 3배 가까이 폭등한 환율 영향으로 1998년도 석유소비량이 1,836천 b/d로 급감하여 전년대비 15.6%나 줄어든 것을 감안할 때 90년대 석유소비 증가율은 경제성장률을 크게 뛰어넘는 매우 높은 수준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90년대에는 경제성장과 소득증가의 영향으로 휘발유, 등유, 경유 등 경질제품의 수요가 빠르게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대기환경에 대한 정부의 오염물질 배출규제 강화 등의 정책적 요인으로 환경 친화적인 석유제품의 공급과 정제시설 고도화에 대한 투자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정부는 석유공급 안정과 석유산업 효율화라는 정책목표를 세우고 석유시장 자유화, 대외개방을 추진하였다. 또한 석유유통산업에 대한 규제 완화 및 철폐를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다.
나. 자유화, 개방화 추세와 석유산업 발전
이 시기에 국내 정유회사들의 인수합병이나 상호변경 등도 이어졌다. 특히 1997년 말 외환위기 이후 경영권의 변동이 많았다. 쌍용정유(주)는 1991년 8월 사우디 국영석유회사 Aramco와 지분 35% 자본참여에 합의하고 합작법인으로 전환되었다. 동사는 이외에도 Aramco사와 20년 장기 원유공급 계약을 체결함에 따라서 원유도입의 안정성도 확보할 수 있었다. 극동정유(주)는 1993년 7월에 정유사업 진출을 선언한 현대그룹으로 인수되면서 현대정유(주)로 새롭게 탄생되었다. 호남정유(주)는 1996년 5월 엘지칼텍스정유(주)로 ㈜유공은 1997년 10월 “SK주식회사”로 각각 상호를 변경하였고, 경인에너지(주)는 1994년 10월 한화에너지(주)로 상호를 변경하였다. 외환위기 이후, 현대정유는 1999년 7월 한화에너지를 인수하고, 한화에너지 정유부문을 별도 법인의 인천정유로 개명하였다. 또한 동사는 1999년 9월 중동 UAE 국영투자회사 IPIC(International Petroleum Investment Company)로부터 5.1억 달러 규모의 외자를 유치하였다. 당시 IPIC사는 현대그룹과의 주주간 협약을 통하여 현대정유 지분 50%를 인수하였다. 1999년 12월 쌍용양회가 그룹 구조조정 과정에서 보유 지분 28.4%를 쌍용정유에 매각함에 따라서 사우디 Aramco의 대주주체제로 전환되었다.
90년대 초부터 빠르게 늘어나는 국내 석유수요 증가 추세에 대응하기 국내 정유회사들은 정제설비 증설을 추진하였다. 1992년 6월 호남정유는 정부로부터 22만 b/d 규모의 정제설비 증설을 허가받아 공사에 착수하였다. 이후 정부는 1993년 8월에 나머지 4개 정유사에 추가로 45만 b/d 규모의 정제설비 증설을 허가하였다. 각 회사별로는 허가된 증설규모는 유공 20만 b/d, 쌍용정유 11만 b/d, 현대정유 9만 b/d, 경인에너지에 5만 b/d의 규모였다. 호남정유는 1996년 22만 b/d의 정제설비 증설을 완공하여 총 정제설비 규모가 60만 b/d로 늘어났다. 같은 해 유공도 20만 b/d 증설을 완공 가동하여 정제능력 총 81만 b/d로 우리나라 최대 정제 규모를 자랑하였다. 현대정유는 1993년 5만 b/d 증설에 이어서 1996년 20만 b/d의 대규모 상압정제시설이 완공됨으로써 총 31만 b/d 규모의 대형 정유공장으로 성장하였다. 쌍용정유는 1991년 10만 b/d 정제설비 증설을 완공하고, 1993년에는 정부로부터 정제시설 증설 및 변경허가를 받아 가동에 들어감으로써 총 정제설비 규모가 325천 b/d로 크게 늘어났다. 특히 쌍용정유는 90년대 중반에 148만 b/d의 대규모 중질유분해시설을 건설하여 시장 변화 움직임에 대비하였다. 경인에너지 역시 1990년대 초에 정제시설 추가 확장 및 증설을 통하여 1993년 말까지 275천 b/d 규모의 정유회사로 발전하였다. 그 결과 1997년에 우리나라 총 상압정제시설이 총 2,438천 b/d로 세계 5위의 원유 상압정제설비 국가로 기록되었다.
90년대에는 정부의 아황산가스 배출규제 강화와 저부가가치의 중유를 상대적으로 부가가치가 높은 경질유 제품으로 전환 생산하려는 정유업계의 경제성 향상 노력이 본격화되었다. 호남정유는 1991년 10월 5만 b/d 규모의 제1 등경유 탈황설비를 완공하였고, 이어서 1996년과 1998년에 각각 7만 b/d 규모의 제2 제3 등경유 탈황시설을 완공 가동하였다. 1995년에는 7만 b/d의 중질유분해시설(RFCC)을 완공하였다. 유공은 1992년 11월 3만 b/d의 제1중질유 탈황 및 분해시설을 완공하였고, 1995년 9월 5만 b/d 규모의 경유 탈황시설을 가동하였다. 1997년 1월 6만 b/d의 제2 중질유 탈황시설과 5만 b/d 규모의 중질유 분해시설을 가동하였다. 쌍용정유와 현대정유도 1990년대에 중질유 분해시설과 탈황시설에 대한 투자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1999년 말 기준 탈황 및 중질유 분해시설은 각각 599천 b/d와 247천 b/d를 기록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와 국내석유시장에 대한 정유회사 간에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정부는 이에 대응하여 석유 유통구조 개선 노력과 함께 석유유통산업에 대한 규제완화 및 철폐를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다. 1991년 11월 서울시 주유소간 거리제한을 700m에서 300m, 광역시나 시․읍 지역은 1km에서 500m, 기타 지역은 2km에서 1km로 축소하였다. 1995년 11월에는 지역구분 없이 주유소간 거리제한을 전면적으로 폐지하였다. 유가제도를 보면, 종전 정부의 최고 가격제도에서 1994년 2월15일부터 휘발유, 등유 및 경유 등 제품에 대하여 유가 연동제가 도입되었다. 이어서 1995년 12월 개정․공포된 「석유사업법」에 따라서 1997년 1월부터 석유가격에 전면적 자유화 조치가 시행되었다. 이어서 1998년 1월 정유사와 주유소 간의 직거래가 허용되었고, 5월에는 주유소업종에 대한 대외개방 그리고 10월에는 정제산업까지 전면 대외개방이 시행되었다.
4. 2000년대: 국제 석유시장의 변화, 정제시설 고도화 투자의 본격화
가. 국내외 시장여건 변화
새로운 21세기에 접어들어 국제 석유시장의 큰 변화를 겪었다. 중국을 포함한 BRICs 5개국들의 석유수요가 매년 늘어나면서 세계 석유수급 상황이 타이트하게 변화되고 있었다. 한편 국제 석유시장은 2000년 이후 석유 선물시장과 현물시장이 발달하였고 점차 실물거래보다 금융자본들의 투기적 거래가 증가하면서 지속적으로 유가상승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 결과 국제유가는 2000년대 초 배럴당 $20 ~ $25 수준에 머물렀으나 2005년까지 배럴당 $50 ~ $60 수준으로 상승하였고, 2008년 4월 배럴당 $100를 돌파하였다. 2008년 7월 초순 배럴당 $140달러의 사상 최고 가격을 기록한 유가는 그 해 9월 미국계 투자은행인 리먼브러더즈의 파산 직후 몰아닥친 글로벌 금융위기와 세계적 불황 사태 영향으로 2008년 연말 배럴당 $30 수준까지 폭락하였다. 이후 2009년부터 계속된 G20 등 세계 각국의 경기회복 노력으로 경기가 살아나면서 국제유가는 다시 배럴당 $80 ~ $90 수준까지 회복되었다. 그러나 2011년 초에 중동 북아프리카 지역의 민주화 소요사태와 리비아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유가는 다시 $120 수준까지 치솟았다. 이후 미국 등 서방국의 대이란 경제제재 강화와 시리아 사태 등의 영향으로 유가는 배럴당 $100 넘는 유가수준으로 유지되었다. 석유제품 시장은 중국 등 개도국들의 경제개발과 선진국들의 환경정책 강화 영향으로 경질유 제품의 수요가 늘어나는 반면 경질유 제품 수율이 높은 경질원유 공급은 줄어들면서 경질원유와 중질원유간의 스프레드는 확대되고 있고, 정제마진을 높이려는 첨단의 중질유분해시설에 대한 투자가 특히 아태지역을 중심으로 이어졌다.
국내 시장을 살펴보면, 석유수요가 2000년 이후 정체현상을 보여 220만 ~ 230만 b/d 수준에 그치고 있고, 산업용 나프타를 제외하면 2008년 이후 120만 b/d 수준에서 머무르고 있다. 특히 나프타 등 산업용 수요를 제외하면 수송용 석유수요 비중이 60% ~ 70% 수준을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주유소를 통한 유류 판매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반면 고유가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소비자들의 석유품질과 유가수준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한편 2000년대 후반부터 정부의 국내 석유산업 정책이 지금까지의 친산업적 관점에서 소비자 중심으로 전환되고 있다. 즉 소비자 편익과 소비자들의 주장을 정책에 반영하는 정책들이 전개되었다. 그 결과 특히 2008년 이후부터 석유제품 유통분야에서 석유제품 수평거래 허용, 주유소 상표표시제 폐지, 알뜰주유소 지원, 전자상거래 도입되었고 정유사에 대한 석유가격공개 의무화 등 많은 정책 변화를 보이고 있다.
나. 국내 석유산업의 대외경쟁력 강화
2000년대 들어와서도 석유산업계는 구조변화를 통한 부문별 경쟁체제를 도입하는 한편 해외 유전개발 참여와 정제설비 고도화 즉, 2차 정제설비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로 대외경쟁력을 크게 강화하였다. 그 결과 2000년대 중반 이후 세제적인 고유가 상황 하에서 우리나라의 석유제품 수출이 비약적으로 증가하였으며, 2011년과 2012년에는 석유제품이 품목별 수출실적에서 선두를 차지하던 반도체, 자동차를 제치고 2년 연속으로 수출품목 1위를 기록하였다.
SK에너지는 2009년 7월 윤활유 사업을 분사(SK Lubricants)한데 이어서 2011년에는 SK이노베이션으로 상호를 변경하였다. 동시에 석유사업과 화학사업을 각각 SK에너지와 SK종합화학으로 분사하였다. 또한 지난 7월 트레이딩 부문을 SK트레이딩인터네셔널, 2005년에 인수한 인천정유를 SK인천석유화학으로 분사하여 부문별 책임경영체제를 구축하였다. 엘지칼텍스정유는 2004년 7월 지주회사인 GS홀딩스(2009년 3월 ‘주식회사GS’로 상호 변경)가 설립되어 자회사로 편입하였다. 2005년 3월에는 상호를 ‘GS칼텍스정유(주)’에서 ‘GS칼텍스(주)’로 변경하였다. 현대정유는 2002년 상호를 현대오일뱅크로 변경하여 브랜드와 회사이름을 일치시킴으로써 소비자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는 기업 이미지 변화를 추진하였다. 동사는 2010년 8월에 현대중공업 계열로 편입되었다. 사우디 Aramco사가 대지주가 된 쌍용정유는 2000년 3월 회사명을 S-Oil(주)로 변경하였다.
정유업계는 2000년 이후 특히 정제설비 고도화시설에 대한 투자를 집중하였다. 이는 세계적인 경질제품 소비증가 추세와 갈수록 엄격해지는 환경기준의 문제 등에 대처하기위한 전략으로 채택하였다. 동시에 벙커C 등 낮은 부가가치의 중질제품을 2차 정제설비를 통하여 다시 분해하는 고도화 공정을 통하여 휘발유와 경유 등 고부가차치의 경질제품을 생산함으로써 고유가시대의 경쟁력을 강화와 수익성 확대를 노리는 전략이었다. 2013년 현재 국내 정유업계의 고도화설비 능력은 총 76만 2천 b/d이며, 상압정제설비 기준 평균 고도화시설 비율은 27.6%이다. 회사별로 구분해보면, 고도화 시설규모는 GS칼텍스가 268천 b/d로 가장 크고, 고도화 비율로는 현대오일뱅크가 34.4%로 가장 높다.
정유회사별 정제설비 고도화사업 추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고도화설비 규모면에서 1위인 GS칼텍스는 2007년 12월 6만 1천 b/d 규모의 제2차 중질유분해시설(HCR)을 완공하였으며, 2010년 12월 6만b/d 규모의 제3차 중질유분해시설(VRHCR)을 가동하였다. 금년 3월에 제4차 중질유 분해시설인 감압가스오일 유동상 촉매 분해시설(VGFCC) 5만 3만 b/d를 완공하여 가동에 들어감으로써 총 고도화 설비규모가 268천 b/d로 확장되어 고도화 비율 31%를 기록하고 있다. 고도화 비율 1위 현대오일뱅크는 2011년 규모 6만 6천 b/d의 제2 중질유분해시설(HCR)을 완공하여 고도화 설비 규모를 13만 4천b/d로 확장함으로써 고도화 비율을 34.4%로 끌어올렸다. SK이노베이션에서 분사한 SK에너지는 울산컴플렉스 내에 제1, 제2 중질유분해공장을 가동하고 있으며, 고도화 설비규모는 총 21만 2천 b/d 이다. 설비규모 4만 5천 b/d인 제1 중질유분해공장에서는 주로 경유제품을 생산하고 있고, 수첨탈황 유동상 분해시설인 16만 7천 b/d의 제2 중질유분해공장에서는 주로 휘발유를 생산하고 있다. S-Oil은 2000년대 이전인 1996년과 1997년에 이미 총 148만 b/d의 중질유분해시설 투자를 완료하였다. 동사는 당시 원유도입선이 Aramco사로 확정된 상태에서 환경기준 강화에 대비하고 세계 석유제품 수요의 경질화 추세에 대응하기 위하여 정제설비 고도화 건설에 집중하였다. 등유와 경유를 주로 생산하는 7만 5천 b/d 규모의 수첨분해시설(Hydrocracker)과 휘발유를 주로 생산하는 7만 3천 b/d 규모의 접촉분해시설(RFCC)로 구성되어 있다.
2000년대 정유회사들의 정제고도화 시설에 대한 투자는 제품의 고부가가치화를 실현하고 경질유 중심의 석유제품 수출증대로 이어졌다. 수출 상대국도 2000년 전 세계 20여개 국가에서 50여개 국가로 크게 확대되었다. 수출 품목도 2000년 초에는 납사와 벙커C가 주종 수출 품목이었으나 2006년 이후에는 경유와 항공유, 휘발유 등 경질 석유제품이 전체 수출에서 약 2/3를 차지하고 있다. 석유제품 수출금액 측면에서는 2005년까지 150억 달러 이하 수준을 기록하였으나 2000년대 중반 이후 고유가 추세가 지속되면서 글로벌 금융위기의 영향을 받았던 2009년과 2010년을 제외하고 매년 빠른 속도의 증가 추세를 보이면서 2011년과 2012년 단일품목으로 수출액 500억 달러를 넘어섰다. 567억 달러를 기록한 2012년 석유제품 수출액은 우리나라 총 수출금액 10.3%의 점유율을 기록하여 2011년에 이어서 2년 연속 우리나라 수출품목 1위를 차지하였다.
2000년 이후 국내 정유회사들은 고유가 상황에 대응하고 원유 확보능력의 확충을 위하여 해외자원개발사업에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다. 여기에는 특히 SK에 이어서 GS칼텍스의참여가 눈에 띄고 있다. 특히 SK이노베이션은 유전개발에 이어서 LNG 개발사업에도 참여하고 있다. SK는1999년 석유공사와 함께 베트남 15-1광구 지분을 확보하고, 2003년 10월부터 상업생산에 들어갔다. 2006년에는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 해상유전 광구개발에 엑슨모빌, BG와 함께 20%의 지분을 확보하고 광구개발에 참여하였다. 최근 2013년 8월 원유매장량을 발견한 것으로 발표된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의 잠빌(Zhambyl) 해상광구에도 석유공사와 콘소시움에 참여하여 6.75%의 자분을 확보하고 있다. 2013년 현재 동사는 세계 16개국 24개 광구에서 약 7만 배럴의 지분원유를 확보하고 있으며, 페루 LNG 개발프로젝트를 포함하여 4개의 LNG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있다. GS칼텍스도 지주회사 (주)GS와 함께 자원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동사는 2003년 쉐브론으로부터 캄보디아 해상광구 탐사지분 15%를 인수하여 유전개발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2006년 7월에는 일본 미쯔이그룹 탐사회사로부터 태국 육상 탐사광구 지분 30%를 인수하여 개발에 참여하고 있다. (주)GS는 2005년부터 인도네시아의 3개 탐사광구와 예멘, 카자흐스탄, 이라크 바지안 광구 등 중동, 중앙아시아 유망광구에 대한 추가 진출을 검토하고 있다. GS칼텍스는 장기적으로 정제능력의 10%를 개발원유로 조달한다는 계획 하에 해외유전개발 투자를 지속할 계획이라고 밝히고 있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