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발유값 누진제를 도입하자
박 주 헌
동덕여대 경제학과 교수
유로존 위기가 다시 고개를 들고 중국의 경기하락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기세 좋게 오르기만 하던 유가 상승이 다소 소강상태에 접어든 느낌이다. 그러나 추세전환으로 판단하기는 이르다. 당장 유럽연합의 이란행 유조선에 대한 보험 제공 중단으로 단기적 공급 애로가 예상되고 있다. 더구나 2005년 이후 이어지고 있는 고유가는 단기적 추세가 아닌 장기적 추세라는데 있다. 최근의 고유가 추세는 세계 석유시장의 수급 상 구조변화에 기인한다. 세계 원유생산량은 2005년 하루 7,200만 배럴을 기록한 이후 7,500만 배럴을 넘어선 적이 없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중국과 인도로 대표되는 신흥국들의 수요는 꾸준히 증가하여 세계 석유 시장의 초과수요가 초래되어 유가 상승 추세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원유가격은 2005년 이후 7년 간 매년 15%씩 인상되었다.
오일샌드, 셰일오일 등 비전통석유자원이 새로운 공급원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으나, 현재 기술적 제약과 인프라 등의 이유로 미국을 비롯한 북미지역에 국한되어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어 시장의 초과수요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에너지원로 부상하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아직까지는 가능성 높은 미래 에너지일 뿐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신흥국들의 경제성장 추이와 타연료로의 전환이 사실상 어렵다는 현실을 감안하면, 고유가 추세는 계속 이어진다고 예상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실제로 최근 IMF는 10년 뒤인 2022년까지 유가가 현재의 두 배로 뛸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당분간 고유가 시대는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유가 인상은 서민가계의 어려움을 가중시킨다. 우리나라 가계소비지출에서 유가와 관련성 높은 항목인 광열교통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약 13%에 달하고 있어 다른 어떤 소비항목보다도 높다. 당연히 유가 인상은 즉각적으로 서민가계 부담으로 이어진다. 더욱이 석유 소비는 매우 가격 비탄력적 성격을 갖고 있어 유가 인상으로 인한 관련 지출 증가는 곧바로 다른 소비지출 감소로 이어져 전체적인 경기하락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실제로 경제학계에서는 유로존의 경제위기와 미국경제 회복 지연의 원인도 고유가로 인한 소비부진이 원인이라는 진단이 꽤 설득력을 얻고 있다. 따라서 유가인상 부담을 완화시키는 노력은 서민가계보호 차원뿐만 아니라 경제회복의 관점에서도 필요한 일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정부가 유가안정을 위해 추진하거나 고려중인 정책은 대체로 유류세 인하, 보조금 지급 그리고 경쟁구조 및 유통구조 개선 등 3가지 방향으로 압축된다.
2008년 한시적으로 실시한 바 있는 유류세 인하는 세수감소만 초래할 뿐 소비자들의 체감효과는 미미해 효과적인 정책수단으로 평가하기 어렵다. 2011년 말을 기준으로 유류세를 10% 인하하면 소비자가격은 리터당 82원 정도 인하되어 가구당 월평균 유류비지출은 겨우 약 5,165원 감소되지만 유류세수는 거의 9,000억 원이나 감소될 것으로 추산된다. 특히 2분위 이하 저소득가구의 월간 유류비지출 감소액은 2,500원에도 미치지 못하는 반면, 9분위 이상 고소득가구는 약 8,000원 이상 부담을 줄일 수 있어 소득분배의 역진성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
보조금 지급은 과다한 행정비용 초래와 지원 대상 오식별에 의한 재정낭비가 우려된다. 정책수단으로서 보조금의 성패는 지원 대상의 정확한 식별에 달려 있다. 현재 실시 중인 보조금 중 농림어업용 면세유, 택시연료에 대한 개별소비세 감면은 지원대상이 명확하지만, 경차에 대한 유류세 환급은 지원 대상을 저소득층으로 한정할 수 없기 때문에 저소득층 지원을 위한 정책수단으로서 효율성이 높지 않다. 또한 지원효과도 매우 제한적이다. 경차에 대한 유류세 환급 수준을 현재와 같이 년 간 최대 10만원으로 가정해도, 경차보급율이 겨우 6.7%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총 환급액은 약 840억 원에 지나지 않을 것으로 추산된다. 22조원을 상회하는 년간 휘발유 지출총액의 0.4%에 해당하는 매우 미미한 금액이다. 지원효과 증가를 위해 환급 대상 차종을 소형, 중형으로 확대하면 소득계층과 차종 간의 불일치로 인한 재정낭비와 역진적 소득분배의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 그렇다고 지원기준을 소득분위로 변경하면 가구별 소득, 자동차 소유 여부, 연료 사용량 등을 파악하기 위한 행정비용이 과다하게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경쟁구조 및 유통구조 개선은 자원배분의 효율성을 개선한다는 의미에서는 추진할 가치가 있으나 실질적 가격인하를 위한 정책수단으로는 적당치 않다. 휘발유 가격에서 원가와 세금을 제외한 유통마진의 비중은 약 6% 내외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경쟁과 유통구조 개선으로 기대할 수 있는 소비자가격 인하폭은 매우 제한적일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이것도 일률적 소비자 가격 인하이기 때문에 소득분배의 역진성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휘발유 가격은 너무 높아도 문제고 너무 낮아도 문제다. 휘발유 가격이 너무 비싸면 서민가계에 어려움을 주고, 너무 낮으면 에너지 절약과 탈화석연료 정책으로 대표되는 녹색성장 목표와 모순된다. 시장경제에서 가격 신호보다 더 강력히 소비 패턴 변화를 유도할 수 있는 수단은 없다는 것은 경제학의 상식이다. 화석연료는 비싼 에너지라는 신호 없이 에너지절약, 탈화석연료의 정책목표는 공염불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휘발유 가격 급등으로 겪는 서민 가계의 어려움을 외면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모순적 상황으로 해답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휘발유 소비를 자세히 뜯어보면 해답을 찾을 수도 있을 듯하다. 휘발유 소비는 생필품과 사치품의 특성을 모두 갖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자동차는 이미 보급대수가 1,800만대(승용차는 1,200만대)를 넘고, 가계소비에서 차량용 연료비 지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4% 내외에 이를 정도로 보편화되었다. 따라서 자동차 연료는 식료품과 같은 생필품으로 분류하여 최우선적으로 가격 안정을 도모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휘발유 소비에는 사치품적 성격을 갖는 부분도 분명 존재한다. 출퇴근용 소형 승용차 연료로서의 휘발유와 레저용 대형 승용차 연료로서의 휘발유는 분명 구분해야 한다는 말이다. 소득분위별 연료사용량을 비교해 보면 최하위가구에 비해 최상위가구의 자동차 연료 사용량이 약 7배나 많을 정도로 편차가 뚜렷한 점으로부터 사치적 성격의 휘발유 소비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휘발유 소비의 양면성을 무시한 일률적인 휘발유 값 인상 억제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에너지, 환경 정책 방향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서민가계 부담 완화를 위한 가격정책은 생필품적 휘발유 소비를 대상으로 삼아야 하고 녹색성장을 위한 에너지절약은 사치품적 휘발유 소비를 대상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오히려 생필품적 휘발유 소비는 보호해 주어야 할 대상이다.
그러면 서민가계 부담 완화와 녹색성장이라는 일견 모순된 목표를 조화시킬 가격정책은 없을까? 전기가격과 같이 생필품 성격이 있는 기초 소비량까지는 저렴한 기본가격을 적용하지만 사치품적 성격이 있는 초과소비량 부분에 대해서는 할증가격을 적용하는 가격 누진제가 해답이 될 수 있다.
가령 월간 소비량 30리터까지는 기초소비량으로 분류하여 유류세 할인율 50%를, 100리터 초과분은 유류세 할증율 50%를 적용한다고 가정하고 소득계층별 인하효과를 분석해 보면 소득2분위 이하 저소득계층은 약 20%의 인하효과를, 소득10분위의 최상위계층은 2.8% 정도의 인하효과를 얻을 것으로 기대된다. 그리고 세수는 약 6천억원 정도 감소가 예상되어 유류세를 일률적으로 10% 인하할 때보다 세수감소폭은 줄어든다. 또한 월간 휘발유 소비량이 130리터를 초과해야 비로소 가격 인상을 체감하게 되어 일부 휘발유 과소비 계층의 부담만 증가할 뿐 대개의 소비자의 부담은 늘어나지 않는다. 대형 승용차의 월평균 소비량이 140리터 내외인 점을 감안하면 130리터 초과분은 사치재적 성격으로 간주해도 무방해 보인다.
가격 누진제는 누적 소비량 계측이 가능해야 한다. 이는 차량별 주유카드 발급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주유카드를 매개로 한 차량별 누적 소비량 계측은 주유 시 신용카드 결제가 보편화된 관행과 우리나라의 세계 최고 통신망을 고려하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차량별 누진가격제는 기본가격의 대폭 인하와 누진율 상향 조정을 통해 경차를 이용하는 서민들에게는 실질적 가격 인하 효과를 제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형승용차를 모는 짝퉁 서민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하는 오류도 방지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차량별 누진가격제는 생필품적 휘발유소비 비중이 높은 서민 가계는 보호하면서, 사치품적 휘발유소비는 억제하여 에너지절약에 기여하는 양수겸장 가격정책이 될 수 있다. 여기에 덧붙여 상대적으로 한계소비성향이 높은 서민가계에 인하 혜택이 집중됨에 따라 전체적인 소비지출 증가에도 일정 부분 기여가 기대된다.
에너지 가격 인하만이 능사가 아니다. 에너지 빈국인 우리나라가 추구해야 할 에너지절약형 경제시스템은 생필품적 에너지 소비는 에너지복지 차원에서 보호되어야 하지만, 낭비적인 사치품적 에너지 소비는 고에너지 가격 신호에 의해 억제되는 시스템이 되어야 할 것이다. 고에너지가격 정책을 유지한 일본이 세계 최고의 에너지절약기술국이 된 점은 시사하는 바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