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세율․고가격 정책으로 소비구조 개선해야
성명재
한국조세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최근 고유가 현상이 수년째 지속되면서 우리 경제에 큰 부담이 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고유가 현상이 단기일내에 종료되지 않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오히려 세계경제가 현재 당면하고 있는 경제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지속적인 성장궤도에 재진입하면 향후 유가는 더욱 오를 것이라는 전망도 우세하다.
치솟는 유가로 인해 생활고와 원가 부담으로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고통분담 차원에서 정부가 솔선수범하여 탄력세율을 적용하여 유류세를 낮추라는 시민단체의 압력이 거세다. 이에 질세라 정부도 세율인하 주장에 팽팽히 맞서고 있다.
서민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고 유류세를 인하하라는 시민단체의 주장과 국가 재정건전화, 유류소비 억제, 유류소비로 인해 초래되는 사회․경제적 외부비용의 환수를 통해 국민경제의 건전성․효율성을 지켜야 한다는 정부의 주장 모두 타당하다. 어느 한편의 주장만을 선택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원만한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현상에 대한 올바른 진단과, 올바른 처방을 강구되어야 한다. 먼저 현상은 크게 세계유류시장과 국내시장에 대한 여건파악이 필요하다.
요즘 유가는 세계경제의 동향에 따라 널을 뛰고 있다. 유로존에서 촉발된 세계경제위기 가능성, 세계경제를 떠받들고 있는 미국과 중국 경제의 두 축이 경기호전과 침체라는 호재와 악재가 조변석개하는 상황 하에서 유가도 덩달아 춤추고 있다. 단기적으로 석유의 공급이 매우 비탄력적이다. 가격이 크게 등락하더라도 세계석유시장에서의 공급량 조정은 제한적이다. 반면에 석유의 수요구조는, 중국의 급성장에 따라 수요 기저가 크게 증대되었다. 따라서 만성적인 초과수요의 변화가 시장 전체를 지배하면서 유가가 요동치고 있다.
세계적으로 넘쳐나고 있는 유동성이 투자처를 찾지 못해 단기적으로 투기를 통해 유가의 불안정성을 확대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근본적으로는 중국 등 신흥개발국들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에너지․원자재의 공급이 부족한 상황이 지속됨에 따라 구조적인 문제이다. 따라서 세계경제의 변동성에 따라 다소의 진폭을 보이겠지만 배럴당 80~100달러 사이에서 변동성을 보이고 있는 유가가 2000년대 초․중반 수준(배럴당 약 30~40달러 수준)으로 회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유가의 고공행진 현상은 향후에도 상당히 긴 기간동안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의 각종 경제정책도, 고유가 현상을 일시적 충격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구조적 문제로 인식하고 그에 대응한 정책을 수립․집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조세정책도 마찬가지이다. 당장의 유가상승을 세금인하로 흡수하기 보다는 구조적 현상으로 인식하고 조세의 원칙에 충실하여 일관되게 추진해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국내시장의 여건은 어떠한가? 한마디로 요약하면, 상당히 심각한 에너지중독․유류중독에 빠져 있다. 기본적으로는 지속적인 경제성장의 결과 소득이 증가하면서 유류소비가 증가하였다. 그러나 유류세제에도 일부 원인이 있다. 우리나라의 유류세는 부피나 무게를 기준으로 일정액의 세액이 적용되는 종량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종량세 구조를 가진 경우 선진국에서는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가격 또는 물가상승률을 고려하여 종량세율을 조정해주는 (물가)연동제를 함께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다. 휘발유는 1999년 12월 이래 현재까지, 경유 등 나머지 유종은 대부분 2007년 7월 이후 현재까지 동일한 종량세율이 적용되고 있다. 이는 매년 물가상승률만큼 유류세율을 인하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미국, 호주 등 국토면적은 매우 넓지만 인구밀도가 낮은 국가들은, 대중교통시설 건설비용이 지나치게 높기 때문에 대중교통시설 투자의 경제성이 없어 개인교통수단을 활성화시켜 줄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제약이 있다. 이들 국가를 제외하면, 선진국치고 유류세율이 높지 않은 국가가 없다. 물가변동에 맞춰 세율도 조정해주는 만큼 유류세도 본연의 소비억제 기능에 충실하다.
반면 우리나라는 매년 물가상승률만큼 유류세를 감세해주는 효과가 오랜기간 지속되면서 유류세의 소비억제 기능은 물론, 사회적 외부비용의 환수기능마저 빛을 잃어가고 있다. 이는 점차 유류에 대한 소비를 부추김으로써, 대중교통시설이 그물망처럼 잘 구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가용 위주의 출퇴근 문화를 조기에 정착시키고, 중형차․대형차 중심의 수요구조를 고착화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유류소비의 급증은 비단 최종소비단계에만 국한되지 않고 산업구조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쳐 에너지 다소비 산업의 비대화를 초래하였다. 수출주도형 경제발전 모델을 성공적으로 정착시켜 선진국 진입에 도달한 것은 긍정적이지만, 국제가격경쟁력 확보라는 미명 아래 산업용 연료(전기․석유)의 가격을 낮게 책정하였던 것은 결과적으로 에너지 다소비 산업에 대한 과잉투자를 통해 유류 비만증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현재 우리 경제의 유류 비만증은 매우 심각하다. 유류는 자동차 등 고가의 내구소비재, 난방시설, 에너지 발전시설, 산업현장에서의 각종 시설․장치의 연료로 소비되고 있다. 따라서 단기간 내에 소비를 조정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국제유가가 재채기를 하면 우리 경제는 몸살을 앓는 것도 그런 연유 때문이다.
최근 유가가 너무 높기 때문에 서민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유류세를 인하하여 가격을 낮추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일견 귀가 솔깃하는 매우 매혹적인 주장이다. 거부하기가 쉽지 않은 달콤한 유혹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설득력이 없다. 유류세를 인하하면 서민들의 고통이 경감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고소득층에만 혜택이 집중된다. 서민이나 빈곤층은 자동차가 없거나 있더라도 유류비용부담이 미미하다. 고소득층의 경우에는 굳이 유류세 인하의 필요성이 낮지만 역설적으로 최대의 수혜자가 된다. 아울러 유류세 인하로 인한 재정수입 감소는 종국적으로 재정지출 축소를 의미하고 이는 곧 복지혜택의 축소를 시사하는 만큼 결코 저소득층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 저소득 빈곤층이나 생계형 영세자영업자들의 고통이 심한 것은 소득수준이 낮기 때문이지 유가가 높기 때문이 아니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가의 높고․낮음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리터당 휘발유 가격이 2천원을 넘나들 정도로 높은데 무슨 얘기냐’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싸다, 비싸다’의 개념은 상대적이다. 사회․경제적 비용이 더 크다면 2천원도 싼 것이다. 만약 반대로 사회․경제적 비용이 매우 낮다면 비록 2백원이라도 비싼 것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인구밀도와 포화상태에 이른 자동차 보급율, 철강․석유화학, IT산업 등 에너지 다소비 산업의 비대화 등으로 인해 초래되는 교통혼잡․환경오염 비용 및 그로 인한 건강비용 등을 포함한 간접비용은, 현재 유류의 원가를 구성하는 직접비용의 몇배에 이른다는 것이 국내 유수의 전문연구기관이 공통적으로 내리고 있는 현실에 대한 진단이다. 최적조세이론에 따라 간접비용은 정부가 세금으로 환수하는 것이 마땅하다.
일반소비자들은 제조원가만을 생각하고 유류를 싸게 소비하기 원한다. 그러나 본래 에너지란 생산․제조원가를 크게 상회하는 간접비용이 동반되는 만큼 비쌀 수 밖에 없다. 300원짜리 물건을 200원에 계속 팔면 사업이 망하는 것은 불 보듯 분명하다. 한 국가의 살림살이도 마찬가지이다. 사회적 비용이 더 큰 데도 싸게 에너지를 쓰면 결국 경제가 골병이 들고 그 폐해는 고스란히 국민들 몫이 된다. 지속가능하지 않음은 물론이다. 작금의 유류세 주장이 달콤하고 유혹적이지만 위험스러운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선진국에서는 절제된 유류소비를 통해 초고유가 시대에 대처하고 있다. 물론 절제된 유류소비가 국민들의 양심에 기초한 자발적 규제에 기인한 것은 아니다. 기저에는 고세율․고가격 정책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왔고, 향후에도 그런 정책기조가 계속 견지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하면서, 철저하게 경제원리에 충실하여 석유 수요량을 조절하였기 때문이다. 즉, 유류세 정책을 성공적으로 잘 수립․집행함으로써 석유 다이어트에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이와 반대로 석유소비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경제성장에 따른 수요증가 요인도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유류세와 유가가 사회․경제적으로 바람직한 수준에 비해 낮기 때문이다.
비만한 사람이 갑자기 다이어트를 시작하면 고통이 극에 달한다. 현재 우리나라가 그러하다. 잔뜩 유류 비만에 찌들어 온 몸 구석구석에 지방세포가 펴져있다. 비만 치료를 위해 다이어트를 하려니 고통이 동반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고통스러우니 유류세 인하를 통해 편안하게 석유를 소비하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근본적인 치료는, 편안하게 더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유류 다이어트이다. 그대로 방치하면 더 이상 치료가 불가능한 암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유가가 낮은 상태에서는 규제를 강화하더라도 다이어트에 한계가 있다. 근본적으로는 세율인상을 통해 유가를 인상하여 소비를 억제하는 것이 정답이다.
유가를 인상하더라도 당장의 소비억제 효과가 미미하므로 유류세 인상은 정부수입만 확대하려는 꼼수라는 비판도 있다. 앞서 설명하였듯이 석유 수요는 시설이나 장치에 사용하기 위한 파생수요로서의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단기적으로는 소비 감축이 쉽지 않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시설을 대체를 하거나 신규투자를 결정할 시점에 도달해서는, 만약 유가가 비싸다면 에너지 저소비․고효율 장치로 대체하거나 또는 아예 투자결정을 변경할 수도 있다. 그만큼 고세율․고가격 정책으로의 방향 전환은 우리 경제의 에너지 중독․유류 비만증 치유에 결정적이다.
선진국에서는 높은 세율에도 불구하고 유류세수 비중이 낮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세율이 낮음에도 불구하고 유류세 비중․규모가 높다. 이런 차이는 세율 및 가격 수준에 따라 장기적으로 유류소비가 매우 크게 영향을 받게 된다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유가에 대응하여 유류세를 인하하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선진국에서는 그런 경우가 하나도 없다. 복지국가라고 지칭되는 EU에서조차 유류세를 인하한 국가는 단 하나도 없다. 오히려 영국이나 독일을 포함하여 상당수의 국가에서 국제유가의 급상승에도 불구하고 유류 종량세율을 계속 상향조정하고 있다. 우리에게 커다란 시사점을 준다.
마지막으로 유류세 인하를 주장하면서 많이 제기되고 있는 주장가운데 ‘정부도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정부는 고통을 분담할 수 없다. 정부는 국민들이 필요로 하는 바를 국민을 대표하여 대행해 줄 뿐, 고통을 분담해 줄 수 있는 별도의 독립된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정부의 고통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국민들의 고통을 지칭할 뿐이다. 고통분담 차원에서의 유류세 인하 주장은 유류 소비자가 유류를 소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부담을 전가시키자는 논리에 불과하다.
결론적으로, 우리 경제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개선하고 지속가능한 경제성장․발전을 담보하면서 복지사회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당장은 고통이 더해지더라도, 눈에 보이는 작은 편익에 현혹되지 말고 대승적인 관점에서 과감하게 고세율․고가격 정책으로 전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는 결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질과 지속가능발전 문제 등이 걸린 생존과 필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