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에 미치다
- ‘한국의 파브르’, 나비박사 석주명
일제의 식민탄압이 한창이었던 1940년 서울에서 전 세계 나비학자들이 주목한 한 권의 영문 책이 출판되었습니다. 책의 제목은 『A Synonymic List of Butterflies of Korea (한반도 나비의 동종이명)』. 해석하면 즉 ‘같은 종의 나비이지만 다른 종으로 잘못 알려져서 다른 학명이 붙은 것들을 바로잡는 목록’이라는 뜻이지요.
이 책은 유서 깊은 국제학술단체인 영국의 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회에서 2년 전인 1938년에 조선의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연구자에게 집필을 의뢰, 미국 뉴욕에서 인쇄된 책이었습니다. 이 연구자는 황해도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의 생물교사였던 석주명(石宙明, 1908~1950)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나비에 미친 사람’, 혹은 조금 온화하게 ‘나비박사’로 불렀지요. 정작 우리 후대인들한테는 생소한 이름이 되어가는 데 반해, 일본에서는 새로운 나비에 그의 이름을 본 따 학명을 붙여주는 등 지금까지 그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다고 합니다. 20여 년간의 짧은 연구기간 동안 유고집을 포함해 17권의 저서와 120편의 학술논문, 180여 편의 소논문과 기고문을 남기며 과학자로서 불꽃같은 삶을 살다가 갑자기 세상에서 사라진 석주명 박사. 그를 모시고 여러 이야기를 들어보는 자리를 마련토록 하겠습니다.
★ 외골수, 기타리스트를 꿈꾸다.
인터뷰어 : 안녕하십니까. 박사님.
석주명 : 안녕하세요. 살아생전 나비밖에 몰랐던 나비박사 석주명입니다. 추운 겨울이라서 그렇겠지만 오는데 나비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아 섭섭했소.
인터뷰어 : 박사님을 상징하는 세가지 코드가 첫 번째는 나비, 두 번째는 제주학, 세 번째는 국제공용어 에스페란토입니다. 의외로 여러 방면에 호기심이 많으셨네요. 박사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석주명 : 내 어렸을 때 꿈은 기타리스트였소. 나는 평양의 어느 유복한 집안의 삼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소. 송도고보에 다닐 때만 해도 나는 지나치게 성격이 쾌활해 친구들과 나무 그늘에 앉아 기타치고 노래하는 걸 좋아했소. 머리는 나쁘지 않았으나 공부는 뒷전이었지.
한 때 기타만큼은 내가 조선 최고라 생각해 기타리스트가 되고 싶었으나, 어느 날 전설적인 기타리스트 세고비아의 기타연주를 듣고 그만 무너져버렸어요. 내가 열 번 죽었다 깨어나도 그에 버금가는 연주를 할 자신이 없더라고. 그래서 그 길로 기타를 부숴버리고 다시는 기타 근처에도 안갔지요.
송도고보 2학년 말, 성적표를 받았는데 진짜 내가 꼴찌였소. 내 뒤에 아무도 없었소. 빨간색 표시가 된 낙제과목도 여러 개 있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눈앞이 캄캄합디다. 이런 식이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났어요. 그 날부터 방학에도 집에 안가고 하숙방에서 밤낮으로 공부에 전념했어요. 한번 손에 잡은 건 반드시 끝을 보는 외골수 성미라서.
인터뷰어 : 그 결과 일본의 명문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에 유일한 조선인 학생으로 합격했군요? 나비에 대한 관심은 이때부터인가요?
석주명 : 가고시마 농림학교는 오늘날 전문대학과 비슷했죠. 내가 어릴 때부터 동물을 좋아했지만 덴마크 같은 낙농국가를 만드는데 일조하고 싶어서 농학과에 지원했지요. 근데 축산학 교수님이 너무 못 가르쳐서 실망을 하다가 마침 일본 곤충계의 대부격인 오카지마 긴지 교수님이 있는 생물과로 옮겼지요. 어느 날. 아침부터 장맛비가 퍼붓고 있었는데 교수님이 학생들한테 나가서 곤충채집을 해오면 상을 주겠다는 거예요. 마지못해 다들 밖으로 나갔는데 한나절이 지난 후 돌아올 때는 모두들 빈손이었어요. 나를 제외하고는. 나는 하루살이 한 마리씩 담긴 삼각지 백여 장을 교수님 앞에 내밀었죠. 그랬더니 교수님은 감동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셨어요. 그때부터 나는 ‘성실한 학생’으로 교수님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죠. 교수님이 내게 나비연구를 해보라 권유하셨지요. “10년만 공부한다면 자네는 틀림없이 세계적인 나비학자가 될 것이네.”
★ 조선의 나비에 아름다운 한글 이름을.
인터뷰어 : 그래서 귀국 후 우리 땅의 나비 연구를 시작하신 거로군요.
석주명 : 내가 귀국하자마자 마침 모교 송도고보에 교사자리가 났어요. 은사이신 원홍규선생님이 전근을 가시고, 박물학교사 자리가 비어 내가 들어가게 됐지요. 1931년부터 1942년까지 송도고보에서 일한 시기가 바로 내 연구의 절정을 이룬 시기였지요. 포충망 하나 달랑 들고 주말에는 가까운 산이나 들로, 방학 때는 전국 방방곡곡 누볐지요. 사람들은 나더러 나비에 미친 놈, 혹은 점잖은 선생이 코흘리개처럼 나비나 잡으려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다닌다며 수군댔지요. 또, 내 허름한 행색과 좌우로 흔들며 걷는 이상한 걸음걸이 때문에 땅꾼으로 오해 받아 뱀이 득실거리는 곳으로 안내해주기도 했어요. 사람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내 눈에는 오로지 나비 밖에 보이지 않았어요. 그러던 중 일본 학자들이 우리 조선의 나비들을 잘못 분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같은 종임에도 날개무늬나 모양이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종으로 분류하거나 연구 실적을 올리기 위해 아예 새로운 종으로 발표하기도 했지요. 일본 학자들은 조선의 나비가 844종에 이른다고 발표했지만 사실은 248종이었던 것이죠. 그들은 외국인이기 때문에 세밀하게 연구하지 않아 쓸데없이 종의 수만 늘려놓았어요. 내가 1931년부터 15년간 한반도는 물론 만주, 홋카이도 등을 돌며 채집한 나비만 해도 75만 마리에 이르고, 배추흰나비에 대한 논문 한 편을 쓰고자 전국 각지를 돌며 채집한 17만여 마리의 표본을 대조 분석해 날개의 형태, 무늬나 띠의 색채, 모양, 위치 등 다양한 형질의 변이를 하나하나 꼼꼼히 관찰해 분류작업을 했어요.
또, 조선의 산과 들을 날아다니는 나비들에게 아름다운 한글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배추흰나비, 봄처녀나비, 도시처녀나비, 유리창나비, 지리산팔랑나비 등등.
인터뷰어 : 그럼 박사님이 해외에 알려지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석주명 : 정말 기막힌 우연이었는데, 미국의 지질학자 모리스가 몽골탐사를 마치고 일행과 떨어져 혼자 서울로 오던 중 개성을 경성으로 잘못 듣고 개성에서 내리게 됐어요. 그게 막차라서 별수없이 개성에서 하룻밤을 묵어야 했는데, 눈이 심심해 명소가 된 송도고보 표본실에 들렸던 겁니다. 거기에 진열된 수많은 동물과 나비 표본들에 감탄해 미국의 박물관과 표본을 교환할 것을 요청했으며, 본국으로 돌아가서도 자신이 직접 나서서 여러 박물관 및 대학과 송도고보와의 교류를 주선해줬어요. 그런 계기로 해서 하버드대를 중심으로 다른 서양 학자들한테까지 알려지게 됐고, 1939년 영국 왕립 아시아학회 한국 지부의 의뢰를 받아 영문책 [A Synonymic List of Butterflies of Korea(조선산 나비 총목록)]을 발간했지요. 국내과학자로서 영문단행본을 펴낸 유일한 것이었다고 해요. 이 책은 지금도 영국왕립학회 도서관에 소장돼 있어요.
인터뷰어 : 박사님은 제주학의 선구자이기도 하죠?
석주명 : 내가 제주를 참 좋아합니다. 지금은 토속미가 거의 남아있지 않지요. 개발되기 전에는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어요. 육지와 떨어진 탓에 제주도의 채집여행이 쉽지 않아 나비 연구에서 항상 취약지대였는데 1943년 경성제대 생약연구소 제주도 시험장이 생기자마자 근무를 자청했어요. 내가 전국 각지를 돌며 나비채집을 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접하니까 사투리에도 남달리 관심이 생겼는데요. 그 전에 내가 제주를 두어번 갔는데 사람들의 말이 참 특이했어요. 해서 제주도에 머무는 2년여 동안 나비연구 뿐만 아니라 제주도 방언연구도 관심을 쏟았어요. 제주 곳곳을 돌며 사투리를 수집해 책으로 냈고, 제주의 옛 문헌을 연구했지요. 또 제주 민요인 ‘오돌또기’를 채보해 알린 것도 내 업적 중 하나입니다. 내 제주 방언연구는 제주도가 아직 육지의 영향을 많이 받기 이전에 이루어진 것이라 제주 토속 방언연구 뿐만 아니라 고어, 동남아지역의 언어와의 연관성을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지요. 향간에는 나를 ‘제주학의 창시자’로 부른다고 하는데……에헴.
인터뷰어 : 국제 공용어 에스페란토어 보급에 관심을 두신 것도 같은 맥락이겠군요. 과학자로서는 성공을 거두셨지만, 한 남자의 인생으로서는 그다지 행복한 인생을 사신 것 같지는 않으세요. 특히 미스테리한 죽음도 그렇고요.
석주명 : 그렇소. 나는 인간적으로 불행했어요. 집에서는 아내조차 10분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으며 연구에 방해가 되는 요소들을 모두 제거했어요. 안방과 서재 사이에 벨을 두어 용건이 분명할 때만 아내와 대면했소. 월급조차 연구비로 상당량이 들어갔고, 중매로 만난 신여성이었던 아내는 그런 나를 이해하지 못했어요. 결국 우리는 4년만에 파경을 맞았지요. 내가 이혼으로 구설수에 오르자 사람들은 ‘꽃을 모르는 나비박사’라며 뒷담화를 늘어놓았지요. 내가 어이없게 세상을 떠난 1950년 그해는 역사적으로도, 나한테도 최악의 해였어요. 6·25전쟁 중이었던 당시 국립과학박물관 동물학 연구부장이었던 나는 피난도 안가고 자리를 지켰는데, 폭격으로 과학박물관이 모두 불타버렸어요. 내 분신과도 같은 15만마리 가량 되는 나비표본들과 내 20년 연구생활의 피땀이 녹아든 원고뭉치들이 눈앞에서 한 줌의 재가 됐어요, 국군이 서울을 수복한 직후, 과학박물관의 재건 논의를 하려 10월 6일 아침에 집을 나섰다가 술에 취한 괴한의 총에 맞았어요. 군복차림의 그는 나를 붙들고 횡설수설을 했고, 나는 그의 총탄에 쓰러지며 마지막으로 “나는 나비밖에 모르는 사람이야.”라고 말했어요. 그게 끝이었어요. 그래도 후회는 없어요. 매순간 최선을 다해 살았으니까요.
<글 : 소설가/ 홍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