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가 어떻게 의약품으로 변신할 수 있는가?
서강대 화학 · 커뮤니케이션 교수 이 덕 환
오늘날 우리는 몸이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병원을 찾고 약(藥)을 먹는다. 이제는 남성들도 화장을 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한다. 이제는 누구나 당연한 일로 여기고 있는 그런 일들이 한 세기 전까지만 해도 특별한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었던 호사(豪奢)였다면 쉽게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진실 이다. 1897년에 독일의 화학자 펠릭스 호프만이 최초로 합성의약품인 아스피린이 등장하기 전까지 인류는 자연에서 어렵게 생산되는 천연 의약품에 의존해서 질병을 치료해야 했다. 쉽게 구할 수 없었던 그런 의약품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었다. 화장품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결국 20세기에 들어서 획기적으로 발전한 석유화학 산업은 누구나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나서, 자신을 아름답게 치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 셈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의약품과 화장품은 탄소와 수소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유기화합물이다. 최초로 개발되었고 가장 성공한 의약품이었던 아스피린이 대표적인 경우다. 아스피린은 버드나무와 같은 식물이 적을 물리치기 위해서 생산하는 살리실산과 역시 식물에서 얻을 수 있는 아세트산을 반응시켜 만들어낸‘살리실산 아세트’라는 유기화합물이다. 한 세기 전에 독일의 화학자 헤르만 콜베는 당시 골치 아픈 산업폐기물이었던 콜타르에서 분리한 페놀을 이용해서 버드나무와 같은 식물만 만들 수 있다고 믿었던 유기화합물인 살리신 산을 인공적으로 합성했다. 본래 ‘유기화합물’(organic material)이라는 말은 동물이나 식물과 같은 생물이 몸 속 에서 만들어내는 물질이라는 뜻이었다. 아스피린은 그렇게 만든 살리실산에 식초의 신맛을 만들어내는 아세트 산을 반응시켜서 만든 것이다. 콜타르가 소중한 산업 원료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반세기 정도 앞섰다. 영국의 화학 신동(神童)이었던 윌리엄 퍼킨은 18세의 어린 나이에 역시 콜타르에서 분리한 아닐린이라는 무색투명한 유기화합물에서‘모브’라는 최초의 합성 염료를 만들었다.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옷을 현란한 색깔로 물들이는 염료는 워낙 귀해서 귀족만이 사용할 수 있었던 신분 과시 수단이었다. 산업폐기물에서 생산한 모브는 삽시간에 유럽의 시장을 휩쓸었다. 영국의 귀족들에게‘인디고’라는 천연 염료를 공급해주던 인도의 귀족들은 심한 타격을 입었고, 마침내 영국 의회에 폐기물에서 만든 모브가 신(神)을 모독한다는 이유로 생산을 중단시켜 줄 것을 청원하기도 했다.
석유화합물은 먼 옛날 식물이 애써 만들었던 물질이거나 또는 그런 물질이 분해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콜타르에서 생산하던 다양한 유기화합물이 이제는 원유에서 분리한 석유화학제품으로 대체되었다. 석탄을 대량으로 태울 때 생기는 콜타르와 원유는 사실 화학적으로 매우 비슷하다. 석탄과 원유는 모두 아득한 옛날 지구상에서 번성하던 녹색식물이 땅에 묻혀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런 사실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액체 상태의 원유는 땅속에 묻힌 나무의 잔해에서 산소와 질소 등이 빠져나가고 남은 것이고, 석탄은 수소까지 모두 빠져나간 후에 탄소만 남은 것이다. 물론 석탄에도 식물에 들어있던 수많은 유기화합물의 찌꺼기가 남아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찌꺼기는 원유의 성분과 크게 다르지 않다. 모두가 뜨거운 땅속에서 식물이 박테리아 등에 의해 분해되면서 남은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원유를 정제하는 과정에서 에너지를 생산하는 목적으로 쓰이는 탄화수소 ‘연료’와 기계의 마찰을 줄이기 위해 사용하는‘윤활유’를 제외한 석유화학제품은 콜타르에서 분리한 페놀이나 아닐린처럼 탄소가 주성분인 유기화합물이다. 탄소가 사슬처럼 이어져서 만들어진 메탄, 에탄, 프로판과 메탄올과 같은‘지방족’화합물도 있고, 6각형의 고리 모양을 이루고 있는 벤젠, 톨루엔, 자일렌, 페놀, 아닐린과 같은 ‘향족’화합물도 있다. 모두가 먼 옛날 식물이 애써 만들었던 물질이거나 또는 그런 물질이 분해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정유공장에서 생산되는 그런 물질의 종류는 300여 종이 넘을 정도로 다양하다. 사실 오늘날 제약, 화장품, 합성섬유 등을 생산하는 회사의 원료 창고는 물론이고 대학이나 연구소의 화학실험실을 가득 채우고 있는‘시약’ 들은 대부분 그런 석유화학제품에서 생산된 것이다. 결국 오늘날 석유는 거의 모든 화학산업의 가장 중요한 원료 물질이 되고 있다는 뜻이다. 석유의 성분이 의약품이나 화장품으로 변신할 수 있는 이유는 지극히 간단하다. 우리도 식물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지구는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있는 우주에서 유일하게 생물이 존재하는 행성이다. 우리는 아직도 지구에 생명이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아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1953년에 왓슨과 크릭에 의해서 밝혀진 획기적인 화학적 사실에 따르면 지구상에서 번성하고 있는 모든 생물은 지금으로부터 대략 25억 년 전에 지구상에 출현했던 단세포 생물의 후손들이다. 모두가 DNA라는 화학 물질 속에 생존에 필요한 화학물질을 만들어내고, 후손에서 삶의 방식을 알려주는 유전 정보를 담고 있다. 오랜 세월을 지나오면서 주위의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다양한 모습으로‘진화’를 했지만 여전히 생명을 유지하는 핵심적인 방식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결국 아득한 옛날에 지구상에 번성했던 식물이 자신의 DNA에 담긴 유전 정보에 따라 만들어냈던 물질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상당한 생리활성을 나타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오랜 세월을 지나오면서 세부적인 부분에서는 상당한 변화가 있었지만 근본적인 사실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지구상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생물은 아직도 가장 다양한 화합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탄소에 의해 생명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지구를 푸르게 만들어주는 녹색식물은 이산화탄소의 형태로 공기 중에 떠다니던 탄소와 땅속에서 빨아들인 물을 결합시켜서 햇빛의 에너지를 저장하는 탄수화물이라는 유기화합물을 만들어낸다. 그런 유기화합물은 동물이나 다른 식물에게 몸을 구성하고 생존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 하는 역할을 한다.
석유화학합성 기술은 천연물질을 대체함으로써 그것을 얻기 위한 자연파괴를 피할 수 있게 하였다
결국 지구상의 생물들은 탄소를 재활용하는 과정에서 서로 긴밀하게 협조하는 거대한 생태계를 구성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 과정에서 생체에서 만들어진 물질이 우리 체내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변화에 심각한 영향을 주는 생리활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물론 그런 영향이 반드시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몸 속에서 일어나는 잘못된 화학적 변화를 바로잡아주기도 하지만,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기도 한다. 생체에서 만들어진 물질이 약(藥)이 되기도 하지만, 치명적인 독(毒)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우리 인류는 19세기 말부터 그런 유기화합물을 인공적으로 변환시켜서 우리에게 필요한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내는 화학 합성 기술을 개발했다. 자연의 생태계가 만들어낸 천연물질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 인류가 처음으로 독자적인 생존의 방식을 찾아낸 것이다. 그 성과는 대단한 것이었다. 이제 더 이상 열이 난다고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버드나무의 껍질을 벗겨먹을 필요가 없어졌다. 다시 말해서 우리 자신을 위해 살아있는 생물을 희생시킬 필요가 없어졌다는 뜻이다. 화학 합성 기술의 성과는 그것으로 끝나지도 않았다. 우리 자신을 아름답게 치장하기 위한 화장품, 염료, 합성섬유, 합성고무도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합성 플라스틱도 넘쳐나게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과학기술에 의해 자연환경이 파괴되었다는 주장과 달리 우리의 산이 울창한 숲으로 변하게 된 것은 먼옛날에 만들어진 소중한 자원을 활용하는 화학 합성 기술 덕분이다.
사실 오늘날 제약, 화장품, 합성섬유 등을 생산하는 회사의 원료 창고는 물론이고 대학이나 연구소의 화학실험실을 가득 채우고 있는‘시약’들은 대부분 그런 석유화학제품에서 생산된 것이다. 결국 오늘날 석유는 거의 모든 화학산업의 가장 중요한 원료 물질이 되고 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