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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지상유전'서 제3의 정제마진 창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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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유전'서 제3의 정제마진 창출

한은화 | 중앙일보 산업부 기자

사람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은회색 파이프만 끝없이 얽혀 있고, 드문드문 솟아오른 굴뚝에선 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마치 미래SF 영화 세트장인 듯한 이곳. 지난달 12일 준공식을 기념해 찾은 GS칼텍스의 전남 여수 제3중질유분해시설이다. 현재 가동 중인 1ㆍ2ㆍ3 시설과 2013년에 완공될 제 4 중질유분해시설까지 포함하면 면적만 108만9000㎡(33만평). 총 2조2000억원을 투자해 지은 제3중질유 분해시설에는 서울~부산을 다섯 번 반 왕복할 수 있는 4600㎞의 전선과 두 번 반 오갈 수 있는 2000㎞의 배관이 사용됐다. 21개월의 공사기간 동안 450만명이 공사에 투입됐다.

중질유분해시설 즉, 고도화설비는 원유정제 과정에서 나오는 중질유(벙커C유ㆍ아스팔트)를 휘발유ㆍ경유 등 고부가가치 석유제품으로 만드는 시설이다. 싸구려 기름인 중질유를 비싼 기름으로 바꿔줘 ‘지상(地上) 유전’ 또는 ‘인공(人工) 유전이라 불린다. 중질유를 경질유로 바꾸려면 수차례의 ‘재활용’ 공정을 거쳐야 한다. 원유를 정제해 나온 중질유(원유의 40% 가량)를 분해시설에 넣고 수소 또는 촉매를 가해 경질유로 만들어낸다.

GS칼텍스는 이 4개의 지상유전을 위해 6조원 이상을 투자했다. 대규모 투자를 할 수 있었던 데는 허동수 GS칼텍스 회장의 뚝심이 든든한 밑거름이 됐다. GS칼텍스가 고도화 설비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1990년대 초만 해도 재활용 시설에 대한 인지도는 낮았다. 싼 기름값 때문이다. 당시 두바이유는 배럴당 15~20달러로 거래되고 있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허 회장이 “앞으로 고유가 시대는 분명 온다. ‘지상유전’을 개발해야 한다”고 처음 이야기를 꺼냈을 때 회사 임원들조차 어리둥절해 했다. 합작사인 쉐브론도 ”고도화 설비를 굳이 갖출 필요가 있겠느냐“고 말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허 회장은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피크오일’(석유생산이 정점을 이루는 시기)은 분명히 온다. 이에 대비해야 한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수출기업으로 거듭나는 정유사들
고도화 설비는 초기 투자비용이 많지만, 일단 짓고 나면 ‘1석 4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우선 휘발유ㆍ 경유 생산량이 늘면서 수출량도 덩달아 늘어났다. 고도화 설비 덕에 국내 정유사들은 어엿한 수출 기업으로 변신하고 있다. 올 1분기 실적발표 결과, SK이노베이션은 매출 가운데 수출 비중이 67%로 사상 최대였다. 다른 정유사도 비슷하다. 매출 대비 수출비중이 GS 칼텍스ㆍ에쓰오일은 59%, 현대오일뱅크는 38%를 차지했다. 따라서 석유제품은 올 1분기 수출 3대 품목에 드는 영광을 안았다. 무역협회에 따르면 석유제품 수출액은 106억9600만달러로, 선박 및 해양구조물(166억3000만달러), 반도체(122억1600만달러)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70만770여대를 수출한 자동차의 수출액(97억5000만달러)보다 많은 금액이다.

고유가 시대에 싸구려 기름을 고가의 기름으로 재활용해 얻는 이익도 크다. 한국석유공사 석유정보망에 따르면 지난달 27일 기준으로 두바이유는 배럴당 109.16달러에 거래되고 있다. 휘발유는 배럴당 119.63달러, 경유는 128.70달러, 등유는 128.35달러다. 하지만, 벙커C유는 101.22달러로 원유보다 값이 싸다. 원유를 실컷 정제해봤자 본전도 안 되는 중질유가 40%를 차지했으나, 고도화시설로 이를 다시 경질유로 만들다 보니 정제마진이 좋아졌다. 원료비 자체를 줄이는 효과도 있다. 불순물이 많은 값싼 원유를 들여와도, 중질유 분해시설 덕에 질 좋은 경질유를 뽑아낼 수 있게 됐다. 게다가 탄소 배출량을 줄일 수도 있다.

따라서 정유사들은 최근 고도화 시설을 확충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GS칼텍스는 현재 짓고 있는 네번째 시설을 완공하면 하루 26만8000배럴의 중질유를 휘발유ㆍ경유 등으로 바꿀 수 있다. 고도화 처리 비율이 하루에 정제하는 원유량(76만배럴) 대비 35.3%에 달하게 된다. 국내 정유사 중 최대다. 현대오일뱅크는 충남 대산에 완공해 시범운전 중인 제2차 고도화시설을 포함하면 30.8%(12만배럴)의 고도화율을 달성하게 된다. SK이노베이션은 15.4%(17만1500배럴), 에쓰오일은 25.5%(14만8000배럴)의 고도화율을 확보하고 있다.

정유업계 신사업에도 박차
정유사들의 미래 먹거리에 대한 관심도 높다. GS칼텍스는 음극재ㆍ탄소소재ㆍ박막전지 등을 생산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특히 2차 전지의 양극과 음극 중 음극의 재료로 쓰는 음극재의 경우, 일본 최대석유업체인 JX NOE(옛 신일본석유)와 합작해 경북 구미에 생산공장을 짓고 있다. 이 음극재를 만드는 소재는 ‘코크스’다. 즉, 아스팔트 찌꺼기다. 원유 정제를 밥 짓는 데 비유하면 중질유는 누룽지고, 코크스는 누룽지마저 긁어내 솥 밑에 남은 탄 찌꺼기다. 이도 재활용해 미래 에너지의 소재로 쓰는 것이다. 음극재 공장이 올해 말에 완공되면 연 2000t의 음극재를 생산할 수 있다. 2000t은 지난해 전체 세계 리튬2차전지 음극재 수요의 약 10%에 해당하는 양이다.

SK이노베이션은 충남 서산에 전기차 배터리 공장을 짓고 있다. 내년 말까지 자동화 양산라인을 구축하면 연 3만대의 전기차에 배터리를 공급할 수 있게 된다. SK이노베이션은 이미 독일 다임러그룹 산하 미쓰비시후소사의 하이브리드 상용차, 현대차의 고속전기차인 ‘블루온’, 메르데세스AMG의 전기 슈퍼카인 ‘SLS AMGE-CELL’ 등에 배터리를 공급하기로 계약을 맺은 상태다. 이 밖에도 청정석탄에너지, 그린폴(이산화탄소 플라스틱), 바이오연료, 수소에너지 등 다양한 미래 에너지를 개발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에쓰오일은 신재생에너지 중 하나인 ‘태양광’ 사업에 뛰어들었다. 최근 폴리실리콘(태양광 전지 주원료)을 만드는 한국실리콘의 지분 33.4%를 인수해 2대 주주가 된 것. 한국실리콘은 지난해 국내에서 두 번째로 고순도 폴리실리콘의 상업 생산(연 3500t)을 시작했다. 내년까지 연 1만2000t 생산을 목표로 공장 증설을 하고 있다. 현대오일뱅크도 올해 초 신재생에너지 사업에 뛰어들기 위해 경영기획팀을 신설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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