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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전기차의 불편한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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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차의 불편한 진실

유병선 | 경향신문 논설위원

어떤 결과만을 보고 과정도 그런 결과를 낳을 만하다고 지레 짐작할 때 오류에 빠지기 쉽다. 이를 두고 <이기적 유전자>로 유명한 리처드 도킨스와 같은 진화생물학자들은 ‘베토벤 오류(Beethoven Fallacy)’라고 한다. 베토벤의 선율은 질서정연하지만 작곡의 과정도 그러했던 것은 아님을 가리키는 말이다. 실제 이 위대한 작곡가가 살았던 집은 돼지우리나 다를 바 없었다. 난방도 제대로 안되는 방에는 요강이 치워지지도 않았고, 음식 찌꺼기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어 악취가 풍겼다고 한다. 영혼을 울리는 베토벤의 선율만 기억하는 이들이 당시 그의 집을 본다면 기겁할 수밖에 없다.

베토벤 오류는 본디 인간의 진화가 콩 심은데 콩 난다는 식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비유지만, 우리네 일상에 널려 있다. 예컨대 근사한 식당에서 맛있게 요리를 먹고 나서 근사하지 않은 주방을 보는 바람에 입맛이 뚝 떨어지는 경험을 했다면 영락없는 베토벤 오류이다. 요즘 환경친화형 ‘그린카’의 대표주자로 급부상하고 있는 전기자동차에도 베토벤 오류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힘 받는 전기차 대세론

2005년 중국의 전기차 개발현황을 취재했을 때의 일이다. 상하이의 통지(同濟)대학 자동차 연구소에는 자체 개발한 연료전지 자동차가 놓여 있었다. 눈길을 끈 것은 차의 이름이었다. 한자명은 ‘초월’(超越)인데, 영문표기는 ‘START’였다. 대외적으로는 ‘이제 시작이다!’라는 겸양을 보인 듯 했지만, 속내는 전기차로 새 판을 짜겠다는 중국의 의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물론 당시 만해도 ‘어느 세월에?’라며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미국에선 다큐멘터리 영화 <누가 전기자동차를 죽였나>(2006년, 크리스 페인 감독)가 만들어져 전기차를 개발하기는커녕 외려 방해하는 미국 자동차 회사들을 고발하고 있었다.

몇 해만에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한낱 업체들의 친환경 마케팅 액세서리처럼 보였던 전기차가 올 들어 자동차 판도를 뒤흔들고 있다. 지난 1월 미 디트로이트 모터쇼에서 전기차가 스포트라이트를 독점했다. 전기차만 전시하는 독립 부스가 마련되기는 103년째를 맞는 디트로이트 모터쇼 역사상 처음이라고 한다. 1996년 순수 전기차 EV1을 탄생시켰다가 이내 죽여 버렸던 미 GM은 역설적이게도 이번 모터쇼에서 플러그 인 하이브리드 방식의 전기차 시보레 볼트를 전면에 내세웠다. ‘기름 먹는 하마’라는 대형차만 고집하다 구제금융까지 받은 GM이 전기차를 관에서 꺼내 회사를 살리겠다고 나선 것이다.

GM 말고도 일본 미쓰비시는 소형 전기차 ‘아이미브’를 지난해 시장에 내놨고, 르노-닛산은 양산형 전기차 ‘리프’를 곧 시판 예정이다. 독일 BMW는 지난해 전기차 ‘미니 E’ 500대를 미국에 풀어 도로 시험 중이다. 워런 버핏이 투자한 중국의 전기차 회사 비야디도 한번 충전으로 300㎞를 달릴 수 있는 ‘E6’를 올해 말 시장에 푼다고 한다. 오는 4월부터 국내에서도 도로 운행이 허용된 저속 전기차는 이미 수십 종이 나왔고, 지구촌 곳곳의 도심을 누비고 있다.

자동차 업계만이 전기차에 관심을 쏟는 게 아니다. 벨기에의 환경단체 ‘교통과 환경(T&E)’와 그린피스, 세계자연보호기금(WWF) 독일지부 등은 지난 2월 초 부분별한 전기차 확대를 우려하는 보고서를 냈다. 규제가 뒤따르지 않는 상태에서 전기차 보급을 늘리는 건 외려 온실가스 배출을 늘리는 부작용이 우려된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두 가지를 지적한다. 첫째 규제의 허점이다. 유럽연합은 자동차 회사에 대해 전체 판매 대수에서 전기차의 비중이 늘어난 만큼 대형 석유차의 생산을 허용하고 있다. 보고서는 이런 상황에선 소형 전기차 비중이 10% 늘어나면 오히려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20%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둘째는 발전의 내용이다. 무엇으로 전력을 생산하는가를 따져보지 않고 전기차 뒤꽁무니에서 배기가스가 나오지 않는 것만 봐선 곤란하다는 지적이다. 보고서는 청정 재생에너지 발전용량을 늘리지 않는 전기차 보급이 더 많은 온실가스를 내뿜게 만들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린카’ 춘추전국 시대

전기차에 대한 기대와 우려의 목소리가 동시에 커지는 상황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자동차의 판도 변화를 예고하는 까닭이다. 고유가와 금융 붕괴의 경제 위기에다 온실가스 감축의 국제적 공감대가 겹쳐지면서 전기차 대세론이 굳어지는 판국이다. 자동차의 이산화탄소 배출을 60%로 낮추려면 전기차말고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지난해 미 포드자동차 CEO 앨런 멀랠리는 10~12년 내에 전기차가 주력이 될 것이라고 장담했을 정도다. 석유차의 대량생산으로 전기차가 급속히 쇠퇴했던 100년 전 자동차의 지각변동에 비견될 수도 있다. 새롭다면 환경의 가치가 경제 논리나 편의성보다 우위에 서게 된 것이 이러한 변화의 동력이라는 점이다. 석유차의 독주에 가해진 제동력이 바로 친환경 화두다. 적어도 향후 10년간은 친환경 ‘그린카’(Green Car)의 패권을 둘러싼 자동차 춘추전국 시대일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기실 최근의 전기차 붐은 전기차의 부활이란 표현이 더 적합하다. 내연기관이 발명되기 전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의 주종은 배터리와 모터로 움직이는 전기차였다. 1900년 경 미국 등록차량의 38%가 전기차였고 휘발유차는 22%에 불과했다. 매연이 없고 조용하며 운전이 쉽다는 점에서 전기차는 경쟁우위를 보였다. 1897년에야 머플러가 발명됐으니 가솔린차의 시끄러움은 전기차에 비할 바 못됐다. 가솔린차에 시동모터가 달린 건 1912년의 일이다. 이전엔 손수 크랭크를 돌려 시동을 걸어야 했다. 나들이나 쇼핑을 위해 크랭크를 들고 시동을 건다는 건 부잣집 귀부인들의 품격에 어울리지 않았다.

이런 흐름은 1912년을 고비로 역전된다. 포드자동차의 창업주 헨리 포드는 대량생산 방식으로 편의성을 높이면서도 휘발유차의 값을 대폭 낮췄다. 1912년 전기차 한 대 값이 1750달러였다. 포드는 1915년에 휘발유차를 440달러에 내놨다. 게다가 1920년대 들어 미국에서 석유가 쏟아졌고, 포장도로가 확장되면서 값싼 차로 장거리 여행이 가능해졌다. 가격과 주행거리, 동력 공급의 편의성이 자동차의 판도를 바꿨다. 도요타의 ‘프리우스’처럼 가솔린 엔진과 모터를 섞은 하이브리드 차가 1917년에 첫 선을 보였지만 기술적 한계로 주저앉고 말았다. 1830년대에 등장한 전기차는 1920년대 이후 거리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전기차의 베토벤 오류

역사가 말해주듯 전기차와 석유차는 한 쪽의 강점이 다른 쪽엔 약점이 되는 관계다. 기술 발전에도 불구하고 전기차는 예나 지금이나 충전이 힘들고, 주행거리도 짧고, 값도 비싸다는 게 단점이다. 전기차를 두고 벌어지는 논란의 대부분은 전기차가 여하히 석유차의 장점을 획득할 수 있는가에 몰려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전기차 배터리를 채우려면 급속 충전을 해도 30분은 족히 걸린다. 주행거리를 늘리려면 배터리 용량을 늘리거나, 엔진의 힘을 빌어야 한다. 현재 기술로 한번 충전에 350㎞를 가려면 장착해야 할 배터리 무게만 900㎏이 넘는다. 배터리가 전기차 가격의 절반을 차지한다. 주행거리를 늘리려면 차 값이 오를 수밖에 없다. 미쓰비시의 아이미브는 기아차 모닝보다 작은데도 차 값은 6000만원이 넘는다. 발전을 위해 보조 엔진을 얹은 시보레 볼트도 동급 차종에 비해 값이 3배나 된다.

하지만 이런 단점은 의지와 시간의 문제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르노-닛산은 배터리 팩을 교체하는 방식으로 충전시간을 3분으로 당길 수 있다고 한다. 배터리 단가도 대량생산으로 낮아질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이스라엘에선 공짜폰 방식으로 전기차의 구입부담을 덜어 주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이동통신사처럼 주행거리에 따라 이용요금을 매기겠다는 것이다. 인프라도 전기차 대세가 굳어지면 걸림돌이 되지 못할 듯싶다. 게다가 다소의 불편은 값싼 유지비로 벌충된다. 미국 기준으로 하루 60㎞를 운행할 경우 전기차 충전비용은 휘발유 주유비용의 25%에 불과하다.

정작 논란의 핵심은 전기자 차체에 있는 게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문제는 전기차의 가장 큰 장점에 숨어 있다. 배터리형 전기차의 매력은 배기가스를 내뿜는 머플러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전기차의 베토벤 오류를 낳는 지점이다. 발전 때 나온 온실가스를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발전 연료의 채굴에서 구동까지(well-to-wheel, WTW)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따져보면, 그 깨끗하다는 전기차가 내뿜는 배출가스에 기겁하고도 남는다.

1㎞ 주행의 WTW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비교하면, 전기차가 기존 석유차에 견줘 생각보다 깨끗하지 않다. 2008년 MIT 보고서는 미국의 경우 전기차가 115g로 휘발유차 250g의 절반 이하이라고 했다. 그러나 영국 정부 자료는 클린 디젤과 같은 석유차도 전기차와 같은 115g이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WWF의 2009년 보고서에 따르면 전기차가 200g으로 휘발유차의 170g보다 외려 더 많이 내뿜는다.

물론 전기차의 온실가스 배출량은 미국처럼 전력의 48.5%를 석탄에 의존하면 높아지고, 유럽이나 캐나다처럼 청정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이 높으면 낮아진다. 우리처럼 원전 비중이 높을 경우 전기차는 ‘원전차’라고 불러야 옳다. 같은 전기차도 태양광차, 연료전지차라고 따로 부르듯이 말이다. 요컨대 친환경 여부는 전기차 자체가 아니라 얼마나 청정한 전기를 생산하는가에 달려 있다. ‘그린 발전’이 따르지 않는 채 전기차가 ‘그린카’로 자리를 굳힌다면 지구 환경은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꼴이 될 수도 있다는 게 전기차의 불편한 진실이다.

2400년 전 장자(莊子)는 이런 상황을 가리켜 ‘아침에 셋’이라고 일갈했다. <장자> ‘제물론’(齊物論)’은 “헛되이 애를 써서 한 쪽에 치우친 편견을 내세우면서도 모든 것이 하나임을 알지 못한다. 그것을 ‘아침에 셋’이라고 한다.”고 했다. 도토리 7개를 아침에 세 개 준다고 화를 내던 원숭이들이 네 개를 준다고 반기는 것을 두고, 유가에선 속임수를 부각했지만, 장자는 “내용(실질)은 변함이 없는데 기쁨과 노여움이 일었다.”는데 주목했다. 그런 현상이 빚어진 내막, 즉 ‘시비에 구애되어 있는 세상사’를 꼬집은 것이다. 장자는 조삼모사(朝三暮四)의 처방으로 전체의 조화를 뜻하는 ‘양행’(兩行)을 강조했다. 뒤꽁무니만 보고 친환경으로 속단하는 전기차의 베토벤 오류도 양행의 상실에서 비롯한다. 청정발전은 외면하고 전기차를 그린카라며 환호작약하는 건 조삼모사의 원숭이와 다를 바 없다. 전기차와 그린카의 인식과 정책에도 ‘양행’이 절실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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