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산업 ‘블루오션’을 찾아라
김경두 | 서울신문 기자
정유산업에 ‘블루오션(경쟁이 없는 신시장)’이 있을까. 올해 정유업계에 재밌는 통계 자료가 있다. 글로벌 금융 위기로 올해 1~8월 석유제품 수출(금액 기준)이 반토막이 났지만 유럽과 남미 수출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올 1~8월 중국 수출이 27억달러로 전년 대비 마이너스 58.6%를 기록한 반면 유럽은 14억 4000만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6% 늘었다. 수출물량 기준으로는 무려 156%나 증가했다. 정유업계가 수출 다변화에 성공한 만큼 박수를 받아야 하지만 썩 개운치가 않다. 가까운 동남아와 중동, 중국 등에서 석유제품 수요가 줄다 보니, 눈길을 유럽과 남미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는 분석이 나오기 때문이다. 수익성이 떨어져도 말이다. 그래서 첫 질문이 우문(愚問)일 수밖에 없다.
그럼 에너지산업은 어떨까. 현답(賢答)이 나올 수 있다. 그 만큼 정유(석유)와 에너지산업의 갭은 크다. 이 간극을 국내 정유업계가 따라잡기 시작했다. 하지만 망망대해에서 답을 찾아야 하는 탓에 시간을 줄여 상용화하는 것이 승자의 조건이다.
지난 4월 구자영 SK에너지 사장은 취임 후 가진 첫 기자간담회에서 ‘본원적 경쟁력’ 확보를 화두로 던졌다. 다가오는 생존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본질적인 경쟁력을 키우자는 의미였다. 차세대 먹을거리를 비롯한 신성장 동력을 찾지 않는 한 생존의 답이 없다는 결론인 셈이다.
정유산업을 둘러싼 국내외 경영환경은 날로 악화되고 있다. SK에너지는 지난 2·4분기 정유 부문에서 2006년 4분기 이후 처음으로 683억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GS칼텍스와 에쓰오일도 각각 475억원, 260억원의 손실을 냈다. 정제마진의 악화가 주요 원인이었다. 정부는 기름값 인하를 위해 정유사를 지속적으로 죄고 있다. ‘농협 주유소’를 확대하고, ‘대형마트 주유소’의 진입 규제를 없애고, 매주 정유사별 주유소 공급가격을 발표하는 등 국내 정유시장은 그야말로 ‘레드오션’이 더욱 강화되는 분위기다.
그렇다고 해외 시장이 좋은 것도 아니다. 벙커C유의 가격 강세 탓에 그나마 고수익을 올려주던 고도화설비마저 수익을 내기가 쉽지 않다. 글로벌 경기가 회복되지 않는 한 ‘약세장’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중동과 인도, 중국의 정유회사들도 글로벌 경기의 회복만을 바라고 있다. 고도화 설비를 확대하고, 정제 시설을 확대했지만 국제유가의 약세로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으니 그 답답함이 국내 업체들보다 더 심할 것이다. 이 때문에 몇몇 애널리스트들은 “경기가 회복하더라도 그 과실을 국내 정유업체들이 따먹지 못하고, 중동과 중국세에 서서히 밀릴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사실 벙커C유의 가격 강세는 이들의 고도화설비 확대가 주요 원인 중에 하나다. 이는 ‘지상 유전’이라고 불리던 국내 고도화설비가 앞으로는 더 이상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SK에너지가 최근 인천공장에 짓는 고도화설비의 완공 시기를 2016년으로 5년 더 연장한 것은 이를 방증한다.
이같은 비관적인 전망을 극복하기 위한 정유업계의 행보가 빨라지고 있다. 환경오염에 맞서 저탄소 녹색 성장을 추진하고, 마진이 박한 정유 사업에 맞서 자원개발 사업에 뛰어들고, 석유제품을 대체할 수소에너지와 2차전지 등으로 그 영역을 넓혀 나가고 있다. 업그레이드를 넘어 진화를 추구하고 있다.
선두주자는 SK에너지다. 전기자동차 배터리 분야에서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 세계 세번째이자, 국내 최초로 ‘리튬이온전지분리막(LiBS)’을 개발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특히 이 분야에서 절대 아성을 구축한 일본의 아사히화성과 도넨은 한국의 추격에 특허 침해 소송으로 맞불을 놨지만 결국 SK에너지의 기술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LiBS는 리튬이온전지의 핵심 부품으로 양극과 음극을 차단해 단락을 방지해주고, 전자의 이동을 도와주는 폴리올레핀 계열의 미세 다공성 필름이다. 휴대전화와 노트북의 배터리가 리튬이온전지로 교체되고 있어 빠른 성장이 예상된다. SK에너지는 이런 강점을 살려 하이브리드 자동차용 배터리 기술도 개발했다. 대전 대덕연구단지의 SK에너지 기술원에서는 자체 개발한 리튬이온 배터리를 탑재한 하이브리드차와 플러그인차, 전기차를 시험 운행하고 있다. 리튬 소재부터 2차전지에 이르는 일관생산 체제를 갖춘 것은 SK에너지만의 강점이다. 아쉬운 것은 판매처를 아직 찾지 못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연내에 메이저 자동차 메이커와 SK에너지가 전기차용 배터리 양해각서를 체결할 것이라는 소식이 나오고 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도 대덕 SK에너지 기술원을 수시로 찾아 배터리 기술 개발을 독려했다. 최 회장의 ‘2차전지 사랑’은 업계에서도 유명하다. 직접 발품을 팔며 홍보에 나설 정도다.
최근 SK에너지의 시장 반응은 폭발적이다. 한동안 정체 상태였던 SK에너지의 주가는 9월에만 30% 이상 상승했다. 전기자동차용 2차 전지에 대한 결과가 조만간 나올 것이라는 입소문과 10월에 시추가 이뤄지는 이라크 쿠르드지역 ‘바지안 광구’에서 대박의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 때문이다. 바지안 광구의 원유 추정 매장량은 31억배럴로 알려지고 있다. SK에너지는 이 바지안 광구의 지분 15.2%를 보유하고 있다.
친환경 기술 분야에서도 앞서나가고 있다. 이산화탄소를 이용해 생산하는 친환경 플라스틱 제품인 ‘그린 폴(Green Pol)’을 만드는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 이 기술은 지구온난화의 주범인 이산화탄소를 회수, 저장에 그치지 않고 실생활에 유용한 플라스틱 제품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획기적인 친환경 기술로 평가받고 있다. 덤으로 탄소 배출권까지 확보할 수 있게 됐다. SK에너지가 더 이상 정유사가 아닌 종합에너지 회사라고 불릴 수 있는 이유다.
GS칼텍스도 SK에너지 못지 않게 에너지산업에 집중 투자하고 있다. 자회사인 GS퓨얼셀을 통해 50kW급 연료전지시스템과 도시가스를 이용하는 1kW급 가정용 연료전지, 3kW급 가정용 연료전지 열병합발전시스템을 개발했다. 120kW급 대형 연료전지 개발도 진행하고 있다. 이 같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정부가 추진중인 가정용 연료전지 1만호 보급 사업계획을 주도하고 있다. 세계 최고의 기술도 있다. 바로 친환경적인 에너지 저장 장치인 ‘전기이중층거패시터(EDLC)’용 탄소 소재다. 하이브리드 자동차와 풍력발전에 사용되는 차세대 에너지 저장장치인 EDLC 전극의 핵심 소재이다. GS칼텍스는 신일본석유와 함께 경북 구미에 합작법인을 세워 내년 4월부터 300t 규모의 탄소 소재를 생산한다. 2015년까지 총 1억달러를 투자해 생산 규모를 지금의 3배 가량 늘리기로 했다.
이와 함께 차세대 이차전지인 박막전지를 개발하고, 양산을 추진하고 있다. 박막전지는 모든 구성물질이 고체로 이뤄져 친환경적일 뿐만 아니라 폭발과 발화의 위험이 없는 차세대 2차전지다. GS칼텍스는 이 같은 신재생에너지와 첨단 소재을 개발하기 위해 서울 성내동에 ‘GS칼텍스 에너지연구센터’를 세웠다. 이 곳에서는 차세대 바이오연료인 바이오 부탄올과 주유소 태양광 발전사업, 수소 스테이션 등이 연구되고 있다.
에쓰오일과 현대오일뱅크는 ‘외길 승부’를 걸고 있다. 신사업보다 기존 사업의 다양화와 첨단화를 통해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확보하겠다는 전략이다. 막대한 투자자본이 필요한 신사업보다 잘할 수 있는 ‘본업’에 충실하자는 현실적인 계산이다.
에쓰오일은 약점인 석유화학을 강화하고 있다. 최근 ‘중국 특수’로 다들 짭짤한 재미를 보는 것이 부러울 지경이다. 에쓰오일은 1조 4000억원을 투자해 울산 온산공장을 확대한다. 2011년이면 석유화학 생산능력이 현재보다 2배 이상 늘어난다. 이와 함께 세계적으로 강화되고 있는 석유제품의 품질 규격 강화에 맞춰 환경오염 배출이 거의 없는 친환경 휘발유 유분인 ‘알킬레이트’ 제조시설을 완공했다. 알킬레이트는 그 자체로 고급휘발유로 사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휘발유의 옥탄가를 높이기 위해 사용하던 ‘MTBE’ 대신 쓸 수도 있다.
현대오일뱅크도 충남 대산공장에 파라자일렌과 벤젠 등 BTX 생산공장을 신규 건설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공사가 완료되면 파라자일렌은 연산 118만t, 벤젠은 22만t 규모로 기존 대비 3배 가량 늘어난다. 정유사업에 의존했던 현대오일뱅크로서는 화학제품의 수출 확대로 회사의 수익성이 개선될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정유 4사의 서로 다른 행보에서 어느 하나가 블루오션의 정답이 될 수는 없다. 내 몸에 맞는 것이 다른 사람의 몸에도 맞는 것이 드물기 때문이다. 다만 조언을 한다면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은 시간과의 싸움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신사업이 됐든, 본업이 됐든지 말이다. 세계는 지금 저탄소 녹색성장으로 전진하고 있다. 국가마다 환경오염 규제를 한층 강화하고 있다. 정유업계가 블루오션을 찾는 것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가 됐다. 정유 4사의 분발이 요구되는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