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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누가 휘발유가격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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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휘발유가격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놨나

이진우_이데일리 기자

중세 유럽의 마녀사냥은 억지스런 주장이 군중심리와 맞물리면 얼마나 엉뚱한 결과가 나오는 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애꿎은 동네 처녀들이 '새벽에 산에서 내려오더라. 마녀가 아니라면 왜 꼭두새벽에 산에서 내려오겠느냐'는 식의 여론몰이로 장작불 위에 올려졌으니 말이다. 마녀로 몰린 여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마녀가 아니라는 반증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산에서 새벽에 내려온 것은 그렇다고 치자. 네가 마녀가 아니라면 그럼 아랫마을에 왜 갑자기 전염병이 돌았겠느냐'는 식의 우격다짐에는 맞설 도리가 없었다. 휘발유값이 너무 비싸다는 여론에서 출발한 기름값 논쟁 역시 현대판 마녀사냥과 흡사하다. 기름값이 너무 비싸졌다는 외부의 재앙을 내부에서 원인을 찾으려다보니 무리한 마녀사냥식 여론몰이가 난무한다.

고유가 논쟁도 마녀사냥과 흡사하다

그 마녀사냥의 중심에는 신문과 방송을 중심으로 한 각종 언론매체들이 있었다. 조금만 뜯어보면 말이 안되는 억지라는 게 뻔히 드러나는데도, 아무도 그 '조금만 뜯어보기'에 선뜻 나서지 않는다. '정말 그럴까'하는 목소리는 묻히고 '내 그럴줄 알았다'는 여론만 커지는 데도 언론들의 목소리는 왜곡 또는 침묵 둘 중 하나다.

언론계에 10년 가까이 몸담고 있어 보니 신문과 방송의 속성이 늘 그렇다. 정권에 맞서는 것은 쉽고 기업과 싸우는 것도 거뜬하지만 여론을 거스르는 보도는 참 힘들고 어렵다. 여론의 헛점을 찾는 게 어려워서가 아니라 자칫 '특정기업 감싸기'로 몰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뭔가를 향한 비판 여론이 일면 일단 동참하고 보는 게 언론사의 입장에서는 안전한 장사법이다.

'폭리가 아니라면 왜 정유사들은 이익을 그렇게 많이 내느냐'는 다그침에 정유사들이 아무리 해명을 하고 정유사의 사업구조를 설명해도 '마녀들의 변명'으로 밖에 비춰지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다. 언론들도 ‘이건 정유사들 이야기가 맞는 것 같다’는 논지를 세우다보면 정유사의 로비에 넘어가서 소비자들의 피해는 안중에도 없는 사이비 언론으로 오해받기 십상이기 때문에 여론을 거스르는 보도는 찾기 어렵다.

한 국회의원이 '정유사들이 공장도가격을 부풀려서 폭리를 취했다'고 주장한 것을 언론들이 인용해 보도하면서 일은 더 꼬였다. 정유업계의 한 임원은 "보도 내용을 뜯어보면 말이 안되는 부분이 하나 둘이 아닌데 '부풀렸다'는 표현과 '폭리'라는 단어가 너무 자연스럽게 이어지면서 도무지 해명이 먹히지 않는다"고 털어놨다.

필자도 최근 동창 모임에 나갔다가 친구들에게 넌지시 물어보니 '공장도가격을 부풀렸다'는 것을 '정유사가 원래 주유소에서 받아야 할 도매가격보다 더 받아서 휘발유가 비싸졌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사실 그렇게 오해하는 것도 당연하다. 일반적으로 '공장도가격을 부풀린다'는 것은 60원만 받아도 되는 물건을 80원으로 부풀려서 유통업체에 넘겨 개당 20원을 더 챙긴다는 뜻이다.

그러나 '정유사들이 공장도가격을 부풀렸다'는 것은 실제로 주유소에 넘긴 가격보다 정부에 신고한 공장도가격이 높다는 뜻이다. 바꿔말하면 신고한 가격보다 주유소에 더 싸게 팔았다는 의미다. 받기로 한 가격을 다 못 받았다는 뜻인데도 엉뚱하게 '정유사 폭리의 유력한 증거물'로 채택됐다.

밀가루 회사들이 밀가루를 신고한 가격보다 제과점에 싸게 공급하는 바람에 빵값이 폭등한다?

정유사들이 주유소들에게 그렇게 깎아준 할인폭은 얼마 후 '백마진(Back Margin)'이라는 용어로 재포장되며 휘발유값 폭등의 주범으로 몰렸다. 꼼꼼하게 따져보면 백마진과 휘발유값 상승은 인과관계가 없는 별개의 사안이지만 ‘공장도가격을 부풀리거나 백마진이라는 이상한 것을 주고 받는 걸 보면 뭔가 구린게 있으니 그러지 않겠느냐’는 식으로 뭉뚱그리는 데는 도리가 없다.

그런 논리라면 백화점이 30% 정기세일을 실시하는 날 늘상 '○○백화점이 그동안 정가를 30%나 부풀려 폭리를 취해온 것으로 드러났다'는 보도를 해야 맞다. 신용카드 회원들에게 영화표를 더 싸게 주는 할인 마케팅도 영화 티켓을 팔면서 고객들에게 ‘백마진’을 제공한 셈이 아닌가.

'밀가루 회사들이 밀가루를 신고한 가격보다 제과점에 싸게 공급하는 바람에 전국의 빵값이 연일 폭등하고 있다'는 보도를 접한다면 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밀가루를 싸게 주는데 왜 빵값이 오르나 하는 의문이 드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같은 상황을 '밀가루 회사들이 밀가루 공장도 가격을 부풀리고 제과점들에게 백마진을 제공해왔던 사실이 드러났다'고 보도하면 당장 '밀가루 회사들 죽일 놈'이라는 반응이 나온다.

언론을 사회의 공기(公器)라고 부르며 그릇에 비유하는 것도 어쩌면 그런 이유다. 똑같은 현상도 어떤 그릇에 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모양으로 비춰지기 때문이다. 정유사들이 1조원이 넘는 이익을 거두고 있으니 휘발유에서 분명히 폭리를 취하고 있다는 주장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부당한 이익이 있다면 파헤쳐야 하겠지만 정유사 폭리론의 저변에는 ‘이익이 있으니 부당한 게 틀림없다’는 주객이 바뀐 논리가 녹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유업계 상위 3사만 놓고 보면 이익이 다들 1조원이 넘는다. 그런데 현대오일뱅크는 9조원 매출에 영업이익은 1400억원이 못되는건 왜일까. 정유사업만으로는 이익을 못남긴다는 반증이다. 그런데도 제과점 사장이 좋은 차를 몰고 다니는 걸 보니 빵값에 거품이 있는 게 틀림없다는 식이다. 빵 팔아 번 돈이 아니라 아내가 꽃집을 운영하면서 번 돈이라는 해명은 듣지도 믿지도 않는다. 실제로 이웃의 다른 제과점 사장은 좁은 집에서 어렵게 살고 있는데도 그건 애써 무시한다.

정부도 비겁하기는 마찬가지다. 정유사들이 ‘이 부분에서 이만큼의 부당이익을 얻고 있다’고 단 한번도 구체적으로 지적하지 못하면서 유류세 인하 여론이 고개를 들기만 하면 ‘정유사들의 원가구조를 한번 점검할 필요가 있다’는 식으로 물타기를 한다. ‘세금 내리라고만 하지 말고 정유사 쟤들 남겨먹는 거 한 번 봐라’는 의도다. 백번 양보해도 경제부처의 수장이 할 소리는 아니다. 정유사들의 원가구조를 점검해봐야 하겠으면 미리 점검을 해보고 나서 결과를 국민들에게 보고해야 마땅하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정유사들의 원가구조에 좀 문제가 있지 않겠느냐’고 되묻는 수준이라면 왜 그 자리에 앉아서 녹을 먹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여론 재판은 엉뚱한 대책을 가져온다

여론의 부당한 뭇매로부터 일단 정유사들을 구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유사들이 불쌍해서가 아니다. 사실관계에 따른 정확한 분석 없이 ‘빨간 것은 다 사과’라는 식으로 여론재판을 하다보면 엉뚱한 대책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진짜 원인은 덮어두고 ‘여론이 원인이라고 지적하는 것’에만 땜질식 처방이 내려지기 마련이다.

벌써 그런 조짐이 보인다. 공장도가격과 실제 주유소 판매가격이 다르다고 그게 백마진이고 폭리의 원인이라고 떠드니까 매주 발표하던 공장도 가격을 아예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휘발유 공장도가격을 보고 다음주에 휘발유 값이 오를지 내릴지 짐작하던 소비자들은 이제 기름값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게 됐다.

그 대신 한 달 전에 전국 주유소에 공급된 휘발유 가격의 평균치가 정확히 얼마라는 걸 발표한다고 한다. 지역에 따라 휘발유 가격이 리터당 200원 넘게 차이나는 현실에서 정유사들이 전국의 주유소에 판매한 평균 도매가를 뒤늦게 아는 게 소비자들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 전국의 과일가게가 지난달에 수박 한통을 평균 얼마에 떼어왔는지 알면 우리동네에서 수박 사먹는데 그게 도움이 되고 수박을 더 싸게 사먹을 수 있나?

이런 일을 대책이라고 준비하고 있는 산업자원부 공무원들도 답답해한다. 여론이 그렇게 하라니까 하는 거지 우리가 무슨 힘이 있냐고 불만이다. 언론들이 엉뚱한 여론을 이끌어내고 정부와 업계는 그 여론의 비위를 억지로 맞춰가는 기형적인 구조를 개선하는 일이 휘발유의 원가구조를 파헤치는 것보다 더 시급해보인다. 아랫마을에 도는 전염병을 치료하는 것 보다 마녀사냥을 멈추는 게 더 큰 일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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