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이야기2 석유는 왜 날아가 버리는가? - 휘발유는 대기중에서 증발하여 없어진다 - 본 칼럼은 6회에 걸쳐 연재됩니다. - 편집자 주 - 이 덕 환 서강대학교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교수 석유통의 뚜껑을 열어두면 아까운 석유가 귀신도 모르게 날아가 버린다. 값비싼 석유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휘발성이 특히 강한 휘발유의 경우에는 문제가 더 심각하다. 휘발유가 증발하기 때문에 생기는 경제적 손실도 상당하지만, 증발한 휘발유가 운전자와 주유소 종업원들의 건강에도 피해를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석유가 증발하는 것을 완전히 막아버릴 수도 없으니 난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그런 증발 현상은 석유만이 아니라 물이나 참기름을 비롯한 모든 액체에서 관찰된다. 액체만 증발하는 것도 아니다. 나프탈렌과 같은 고체도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사라져 버린다. 액체가 증발하는 현상은 오래 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고대의 희랍 철학자들도 젖은 빨래가 마르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애를 썼다고 한다. 그러나 액체가 얼어서 고체가 되는 경우와 달리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증발 현상을 설명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더욱이 액체가 얼기 위해서는 온도가 충분히 낮아야 하지만 증발은 특별히 온도가 높지 않아도 일어나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더 어려웠다. 액체의 증발 현상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은 불과 한 세기 전의 일이었다. 상대성 이론으로 유명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물 속에 떨어진 꽃가루가 끊임없이 움직이는 브라운 운동을 설명하면서 ‘분자’의 존재를 처음 밝혀낸 덕분이었다. 그 당시에 정립되기 시작했던 통계역학과 양자역학도 증발 현상을 설명하는 일에 큰 도움이 되었다. 물론 증발한다고 석유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자취를 감춰 버리는 것은 아니다. 서로 달라붙어서 액체로 존재하던 탄화수소 ‘분자’들이 서로 떨어져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기체 상태로 바뀔 뿐이다. 증발이 일어난다고 해서 석유를 구성하는 분자 자체의 성질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다만 우리는 많은 수의 분자들이 뭉쳐져 있는 액체의 경우와는 달리 기체의 경우에는 냄새를 통해서 그 존재를 알아낼 수 있다는 점이 달라질 뿐이다. 고체 및 액체에 운동에너지가 공급되면 기체로 변한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노미터 크기의 분자들도 한 곳에 가만히 서있는 것보다는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을 더 좋아한다. 문제는 그렇게 움직여 다니려면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도 움직이려면 음식을 통해 충분한 양의 ‘영양분’을 공급받아야 하고, 호주머니에 적당한 ‘현금’도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분자들이 움직이려면 충분한 양의 ‘운동 에너지’가 필요하다. 분자들의 운동 에너지는 ‘온도’로 표현된다. 온도가 높을수록 분자들의 ‘평균’ 운동 에너지가 커지게 된다. 그래서 분자들의 운동 에너지가 0인 절대 온도 0도(섭씨 영하 273도)에서는 모든 분자들이 꽁꽁 얼어붙어서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온도가 높아질수록 분자들의 움직임은 더욱 활발해진다. 그래서 온도가 충분히 낮을 경우에는 분자들이 한 곳에 묶여 있는 단단한 고체가 되고, 온도가 높아지면 분자들이 비교적 쉽게 움직이는 액체로 변하게 된다. 온도가 더욱 높아지면 분자들이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기체로 변한다. 물질이 고체, 액체, 기체로 존재하게 되는 온도는 물질의 종류에 따라 크게 다르다. 수소나 헬륨과 같은 경우에는 분자들이 서로 달라붙지 않기 때문에 절대 온도 0도에 가까이 가더라도 분자들이 자유롭게 움직이는 기체 상태로 존재한다. 철이나 녹말 같은 경우에는 분자들이 서로 끈적끈적하게 달라붙기 때문에 상당히 높은 온도에서도 단단한 고체로 존재한다. 분자 사슬의 길이가 너무 길어서 분자들이 얽힌 실타래처럼 뒤엉켜있는 녹말의 경우에는 온도를 충분히 높여주면 분자들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기도 전에 분자를 형성하는 화학결합이 끊어져서 이산화탄소와 물로 변해버리게 된다. 분자들의 끈적거리는 정도는 분자의 대체로 분자나 원자의 크기에 비례한다. 크기가 작고 가벼운 수소나 헬륨은 분자들이 서로 달라붙지 않지만, 크고 무거운 철이나 녹말은 서로 끈적거리게 된다. 석유의 경우에도 크기가 작은 메탄이나 프로판은 보통 기체로 존재하고, 크기가 큰 탄화수소로 된 휘발유, 등유, 경유는 액체로 존재한다. 대단히 큰 분자들로 구성된 아스팔트의 경우에는 온도가 낮아지면 단단한 고체로 굳어버리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증발은 에너지가 많은 분자가 번잡한 곳을 피해 탈출하는 것 온도가 충분히 높지 않아서 액체로 존재하는 석유 분자의 일부가 기체로 증발하는 것은 분자 세계의 지독한 불평등 때문이다. 휘발유 100그램에 들어있는 대략 6천만경(京) 개의 ‘휘발유’ 분자들이 모두 같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분자들 중에는 에너지가 거의 없는 ‘가난한’ 분자도 있고, 다른 분자들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를 가진 ‘부자’ 분자도 있다. 19세기 중엽에 영국의 물리학자 제임스 맥스웰과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루드비히 볼츠만이 어렵게 알아낸 사실이다. 모든 분자들이 반드시 따를 수밖에 없는 맥스웰-볼츠만 분포에 따르면 상위 20퍼센트의 분자들이 총에너지의 46퍼센트를 차지하고, 하위 20퍼센트의 분자들은 총에너지의 4퍼센트를 나누어 갖는다. 평균 에너지를 가진 ‘중산층’이 60퍼센트에 이른다. 상위 20퍼센트가 총자산의 80퍼센트를 차지하는 우리보다는 괜찮은 편이지만 그리 평등한 세상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부(富)의 양극화는 우리 사람들 세상에서만 나타나는 문제가 아니다. 석유가 증발하는 것은 분자들이 근처에 있는 다른 분자들의 간절한 간청을 물리치고 자유를 찾아 기체 상태로 도망가버리는 현상이다. 분자들이 다른 분자들 틈에 끼어서 꼼짝하기도 어려운 액체 상태보다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기체 상태를 더 좋아한다. 우리가 복잡한 도시에 갇혀 있는 것을 싫어해서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는 널찍한 야외로 나가고 싶어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그런 점에서는 사람이나 석유 분자가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문제는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복잡한 도시를 떠나 즐기려면 ‘돈’이 필요하듯이 액체의 분자에게도 ‘에너지’가 필요하다. 액체 상태를 벗어나서 자유를 즐길 수 있는 것은 충분한 에너지를 가진 ‘부자’ 분자들에게만 허용되는 일이다. 결국 석유가 증발하는 것은 석유 분자의 세상이 지극히 불평등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일이다. 만약 모든 석유 분자가 똑같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면 어떤 분자도 기체로 탈출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런 세상에서는 젖은 빨래가 마르지도 않게 되고, 공기 중의 수분도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에 비와 눈도 내리지 않게 된다. 결국 자연의 오묘한 변화가 분자 세계의 불평등에서 비롯되는 셈이다. 모두가 평등한 것이 반드시 좋은 일은 아니라는 뜻이다. 석유 분자가 기체로 탈출하기 위해서 필요한 에너지는 분자들 사이의 끈적거리는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경유나 등유처럼 분자가 큰 경우에는 탈출에 필요한 에너지도 커진다. 정말 부자들만 기체로 탈출할 수 있기 때문에 증발이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휘발유처럼 작은 분자의 경우에는 분자들이 서로 끈적거리지 않기 때문에 웬만한 부자들이 모두 탈출할 수 있게 된다. 온도가 높아져서 분자들의 평균 에너지가 커지면 탈출 자격을 갖춘 부자의 수도 늘어나고, 증발도 더 많이 일어나게 된다. 에너지를 많이 가진 부자 분자들이 빠져나가 버리면 남은 액체의 평균 에너지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증발이 일어나면 액체의 온도가 떨어진다는 뜻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