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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병술년 한해를 돌아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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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술년
한해를 돌아보며..


권 혁 주 중앙일보 기자


# 평안하기 그지 없던 고을이 그날따라 어수선했다. 동헌에 나와 있던 고을 사또가 이방에게 물었다.

"어허, 밖이 왜 이리 시끄러운고!"
"예이! 사또, 형방이 포교들을 데리고 죄인들을 잡아들이는 중이옵니다."
"냉큼 잡아들이면 될 일이지, 웬 소란이란 말이냐!"
"송구하옵니다. 사또, 끌려오는 자들이 죄가 없다며 순순히 오랏줄을 받지
않고 버티기 때문인 줄로 아뢰오."
"어디, 한 번 불러들여봐라. 죄가 있는지 없는지, 한 번 알아보리라. 이방은
당장 문초할 채비를 차리도록 하라."
"예이~."

# 곧 형방이 죄인들을 데리고 동헌 뜨락에 나타났다.

"사또, 죄인들을 대령했사옵니다."
"죄목이 무언고?"
"백성들에게 거마(車馬)용으로 요상한 기름을 판 죄이옵니다. 그 요상한 기
름이 이름하야 세농수(稅弄水). 그러니까 세금 갖고 농간치는 액체란 뜻이옵
니다."
"세농수 판매는 진작부터 국법으로 금한 일이거늘, 아직도 이런 자들이 날뛴단 말이냐?
네 죄를 네가 알렸다! "
"사또, 억울하옵니다."
"어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겠거늘∼."
"아니옵니다 사또. 백성들에게 거마용 연료를 훨씬 싼 값에 공급한 게 어찌 죄란 말씀이십니까.
게다가 저희 세농수 적절히 섞어써 고장난 거마가 있다는 소리 한 번 들어보지 못했나이다."
"시끄럽다. 네놈들은 정상적인 거마용 연료에 많은 세금이 매겨짐을 이용해 이익을 챙긴 것이 아니냐.
세농수도 정상적인 거마용 연료처럼 세금을 냈다면 백성들이 그 비싼 값을 주고 살 것이더냐.
세농수를 팔면서도 세금을 내지 않아 국고를 축냈고, 또한 제대로 연료를 만들어 파는 공인(工人)·상인들에게 해를 끼쳤으니 나라 질서를 어지럽힌 죄 적다 하지 못할 것이야.
여봐라, 죄인들을 당장 하옥하라."

# 형방이 죄인들을 데리고 사라지자 뭔가 머뭇거리던 눈치이던 이방이 어렵사리 말을 꺼낸다.

"사또, 세금 얘기가 나왔으니 한 말씀 올리겠나이다."
"무언고. 얘기해 보라."
"거마용 연료에 붙는 세금이 많다고 백성들 원성이 자자하옵니다. 세금이 원가보다 많으니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게 바로 이짝이라고들 하더이다."
"이방 말이 맞기는 하다만, 세금을 내리면 나랏 경제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슴이야."
"황송하오나 제 좁은 소견엔 큰 문제가 없으리라 사뢰옵니다.
세금을 줄여 거마용 기름값이 내리면 백성들이 거마 나들이를 많이 하기야 하겠사옵니다만, 그건
미국ㆍ청나라ㆍ로서아 등 만천하 백성들이 쓰는 데 비기면 그야말로 새발의 피 아니옵니까.
그러니 우리 백성이 좀 더 쓴다고 만천하 기름값이 들먹거릴리도 없고, 그에 맞춰 오르내리는 우
리네 기름값도 별 영향을 받지 않을 줄로 아뢰오.
그리고 줄어드는 나랏 세수야 요리조리 세금 피해다니는 자들에게서 더 철저히 거둬내면…."
"어허,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
네 말이 일리는 있다만, 우리는 기름을 전부 밖에서 사들여야 하는 점을 명심해야하느니.
더군다나 밖에서 사오는 기름값은 점점 오르고 있슴이야.
이 와중에 백성들이 기름을 많이 써서 그만큼 밖에서 더 사들이면 나랏 경제는 갈수록 어려워질
수 밖에 없지 않느냐.
그래서 오지리(오스트리아)나 일본처럼 기름을 사다 쓰는 나라들은 하나같이 높은 세금을 매기는
것이야. 물론 우리 백성들 살림에 비하면 세금이 좀…"
"소인이 미처 그 점까지 헤아리지 못 했나이다. 사또, 그런데 또 처리 하셔야 할 일이."
"이조에서의 하명이옵니다. 기름만드는 공인들이 부당 이득을 취했다는 백성 대표의 질타가 있
으니 불러 조사하라는 하명이옵니다."
"이조의 명이라면 일단은 따를 수 밖에. 공인들을 어서 불러들이라."
"이미 파발을 전해 모이라 하였나이다."
"모두 들라 이르라."
"예이∼."

# 이윽고 공인들이 모였다.

"공인들은 듣거라. 부당 이득을 취했다는 백성 대표의 말이 사실인고. 어디 할 말이 있으면 해 보라."
"백성 대표의 얘기는 전혀 사실이 아닌 줄 아뢰오."
"어찌 그렇단 말인가."
"애긴 즉슨 저희 공인들이 기름을 팔겠다고 공언한 것보다 싸게 팔아 부당 이득을 냈다는 것인데,
싸게 팔면 손해는 날 지언정 어찌 부당 이득을 올릴 수 있겠사옵니까."
"그건 그렇다만, 이런 값에 팔겠다고 삼천리 방방곡곡 방을 붙여 놓고, 그보다 싸게 파는 것은 무
슨 소치인고."
"숨김 없이 사뢰겠나이다. 제천 의림지만한 저유조(貯油槽)를 지어놓고 한꺼번에 많은 기름을 사
가는 상인도 있고, 그저 몇 섬씩만 사다는 상인도 있나이다.
똑같은 양을 판다고 해도 한 쪽 상인은 한 번에 다 가져가고 다른 쪽에는 수십번을 대줘야하니 값
을 다르게 매기는 것은 당연지사라 하겠나이다."
"네 말이 과히 그르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나라가 알고 있느니.
그렇지 않고서야 기름 파는 상인들의 원성이 어찌 수시로 나올 것인가.
물론 기름 상인들 이문이 줄어드는 게 원성이 높아지는 원인이라는 것도 잘 안다만, 기름 내다 파
는 일이 보다 투명하고 공정하게 이뤄지도록 노력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야."
"명심하겠나이다."

# 시끌벅적하던 고을과 관아가 조용해졌다. 남은 것은 다시 사또와 이방 뿐.

"명 처분이시옵니다, 사또. 그런데 황송한 말씀이옵니다만 미간에 수심이 서린듯 하여이다."
"공인들을 돌려보내긴 했다만, 영 마음이 편치 않구나."
"무슨, 제대로 치죄하지 못하신 일이라도…."
"그게 아니다. 저 공인들은 촌각이 바쁘게 뛰어다니며 일하는 사람들이야.
그게 나랏 경제를 위한 길이기도 하고.
그런데도 백성 대표가 부르면 마땅한 일이건, 가당찮은 일이건 달려와야 하고…. 대체 백성 대표
란 양반님네들, 자기들 인기만 생각해 아무 목소리나 내지 말고 뭐가 사실인지, 뭐가 백성과 나라
를 위하는 일인지 신중히 생각해 행동할 수는 없을런지
우리 조정이 그런 백성 대표들로 채워질 날은 언젤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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