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칼럼]
이라크는 어디로
글·홍성민|중동경제연구소장
벌집을 쑤셔놓은 격이다. 여왕벌만 잡으면 달콤한 꿀을 쉽게 먹을 수 있을 거라는 게 부시 미행정부의 생각이었던 것 같다. 미국이 종전을 선언하고 난지 만 1년이 지난 지금 이라크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혼전을 계속하고 있다. 2004년 3월 미군의 이라크 침공이후 사망한 미군은 718명에 이르며, 이 가운데 종전 이전에 사망한 미군은 140명이기에 전후 사태의 심각성을 짐작할 수 있다.
국제유가는 5월 11일 기준으로 서부텍사스유(WTI)의 선·현물 가격은 걸프전 발발을 앞두고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던 1990년 10월 11일 40.42달러, 41.02달러 이래 가장 높은 40.06달러를 기록한 후 고공행진을 계속하여 5월 18일에는 41.55달러로 국제석유시장과 소비국들에게 불안감을 안겨주고 있다. 급기야 5월초 바그다드의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에서 성적(性的) 모욕을 당하는 포로학대 사진이 유포되자, 곧바로 미국인 니컬러스 버그의 참수(斬首) 장면이 전세계를 놀라게 했다.
5월 17일에는 에제딘 살림 이라크 과도통치위원회(IGC) 위원장이 바그다드 연합군 시설 밀집지역인 ‘그린존’ 외곽에서 발생한 강력한 차량폭탄 폭발로 사망했다. 같은 날 “한·미 양국의 주한미군 1개여단 이라크 차출 합의” 발표는 그렇지 않아도 파병지 문제와 파병반대 문제로 골머리를 알아오던 한국에게 또 다른 파문을 던져주고 있다. 더 나아가 이스라엘군이 ‘무지개작전’이란 작전명 아래 가자지구 남단 이집트 접경 마을 라파 난민캠프에서 5월 18일 시작한 군사작전은 지난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이후 최대 규모라고 하여 중동평화 자체도 새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2004년 5월은 이라크뿐만 아니라 전세계가 가슴 조이며 지켜봐야 했던 피로 물든 장미의 계절인 것 같다.
에너지 위기는 오는가
미국을 제외한 전세계, 특히 한국의 관심은 대량살상무기(WMD)나 이라크의 민주화보다는 전후복구나 국제에너지 가격에 관심이 더 높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임박했을 때도 주식시장이나 유가에 대한 다양한 예측치들이 나돌았다. 대부분 그 당시 분석가들이 내놓은 시나리오는 세 가지로 요약되었다.
첫 번째 시나리오는 2003년 1/4분기 이라크 전쟁 예상. 1/4분기 이라크 원유 생산을 전면 중단하고 전쟁 상황이 수습되는 하반기 이후 원유 생산과 수출이 빠르게 정상화되며 단기 최고가격 배럴당 30달러, 연평균 가격은 배럴당 21~23달러 수준이었다. 두 번째 시나리오는 전쟁상황 악화로 6개월 이상 장기전. 원유 생산은 물론 선적과 수송에도 차질을 가져와 중동으로부터 원유공급이 심각한 차질을 가져올 수 있어 단기 최고가격은 배럴당 40달러, 연평균 가격은 배럴당 30~33달러 수준을 유지. 세 번째 시나리오는 사태전개 완급에 따라 유가 등락. 즉 전쟁프리미엄이 남아있는 상황하에서 UN 사찰단과 이라크 정부간의 사찰을 둘러싼 갈등에 따른 유가등락이 지속되어 연평균 가격이 배럴당 23~25달러 수준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국제유가는 두 번째 시나리오에 해당하며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경제적 여파는 소비국들에게 배럴당 10달러이상의 고유가를 안겨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현재 국제유가의 고공행진은, 1) 세계경기 회복 (특히 중국의 과열성장)에 따른 수요폭등, 2) 원유비축량, 특히 전세계 석유소비량의 12%를 점하고 있는 미국의 재고량 부족, 3) 이라크 전쟁의 장기화에 따른 공급불안 등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고유가는 미국의 고금리 및 재정정책에 영향을 주고, 고유가로 인한 인플레 위험은 금리인상을 더 자극할 우려가 높다. 이러한 악순환은 결국 세계경제를 악화시킬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04년도 세계 원유수요가 하루 8,060만배럴로 2003년보다 2.5% 늘어 1988년 이후 최대 증가폭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에 세계 최대 원유 수요국인 미국이 유가상승세를 부추기고 있다. 미국 에너지부 산하 에너지정보청(EIA)은 5월 12일 미국 휘발유 재고가 150만배럴 줄어든 반면, 휘발유 수요는 하루 평균 937만3,000배럴로 지난주에 비해 5% 늘었다고 발표했다. 미국의 휘발유 수요는 5월말부터 여름 휴가철까지 크게 증가한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할 때 현재의 고유가는 미국의 재고량 부족과 이라크 전쟁의 장기화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으며, 단적으로 말하면 이라크 전쟁의 영향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요인은 당장 내일 이라크 사태가 마무리된다고 하더라도 고유가가 쉽사리 해소되리라는 전망을 불투명하게 해주고 있다. 압둘라 빈 하마드 알 아티야 카타르 석유장관은 OPEC의 최대 생산량을 하루 2,900만배럴 정도로 추산하면서 “대부분의 OPEC 회원국들이 이미 최대 생산량을 유지하고 있으나 오래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IEA에 따르면, “OPEC의 증산 여력은 하루 250만배럴로 전세계 수요의 3% 수준에 머물고 있고, 사우디아라비아가 이 중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전 세계 원유 생산의 1/3을 차지하는 OPEC의 공급량은 크게 늘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일부 산유국들은 현재 증산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기에, 실질적으로 11개 OPEC 회원국 중 원유 증산 여력이 있는 나라는 사우디 아라비아와 UAE 두 나라 밖에는 없다. 따라서 OPEC이 증산에 나서더라도 하루 100만배럴 수준에 머물 것이며, 이 정도로는 증가하는 세계원유 수요를 충족하지 못할 것이라는 게 지배적인 분석이다.
따라서 고유가 추세는 당분간 유지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다고 제3차 석유위기를 떠올리는 것은 시기상조이다. 이제 국제석유시장에서는 3차 위기의 가능성은 희박하고 단지 “고유가 시대”라는 신용어가 지배적일 것이다. 왜냐하면 신규 매장지역과 가채년수가 늘고 있다. 그 예로 카스피해 연안지역의 하루평균 산유량은 4백만배럴, 전체 매장량은 2천억배럴로 추정되고 있다. 러시아를 포함할 경우 하루 산유량은 1천2백만배럴로 전세계 산유량(하루평균 약 7천8백만배럴)의 15%에 달하고, 매장량은 2천7백억배럴로 세계 매장량(약 1조2천억배럴)의 22%에 이른다. 그리고 고유가가 지속되면 이제 선진국들은 대체에너지를 실용화할 것이다. 단지 문제가 되는 것은 향후 국제 에너지 시장에서 미·중·일의 에너지 쟁탈전이다. 러시아의 시베리아 석유 개발 및 송유관 건설과 관련하여 중국과 일본이 경쟁하고 있으며, 미국과 중국은 중앙아시아의 석유 개발 사업에 적극 진출하고 있다. 특히 중국의 과열 성장은 이를 더욱 부채질 할 것이다.
3차 석유위기가 아니더라도 한국은 ‘3차 위기’가 될 수 있다. 한국은 세계 3위의 원유 수입국으로 하루 228만배럴을 소비하는 세계 6위 소비국가이다. 한국의 원유도입은 2003년 230억달러로 중국(198억달러)보다도 많았으며, 에너지 효율은 일본의 3분의 1 수준이다. 한국은 에너지 다소비형 산업구조를 가지고 있고, 중동의존도가 높은 석유의존형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다. 게다가 대체에너지 개발은 아직 선진국의 50~60% 정도의 수준에 머물고 있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에너지 사용의 효율성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 분석에 따르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회원국가들의 경우 유가가 10달러 오를 경우 경제성장률이 평균 0.5%포인트 떨어진다. 그러나 한국은 OECD회원국이지만 유가영향은 개도국과 비슷한 수준으로 유가가 40달러선 지속될 경우 위와 같은 요인들로 해서 1.0%의 성장률 하락이 예상된다.
미국의 선택은?
여왕벌만 잡으면 꿀(석유)을 먹을 수 있으리라던 미국의 예측이 빗나간 것 같다. 벌의 세계는 항상 여왕벌이 있어야 한다. 이라크는 마치 벌집과 같은 부족사회로 짜여진 모자이크와 같은 사회이다. 지금 여왕벌(사담 후세인)을 잃은 이라크는 새로운 여왕벌을 만들고 있다. 그 벌이 이라크 국민회의(INC) 아흐메드 찰라비 의장이 될지 쉬아파 소장 지도자 무크타다 알 사드르가 될지 아니면 새로운 지도자가 나타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미국은 찰라비 의장을 새로운 여왕벌로 간주하고 이라크에 대한 <선공격, 후해결>이라는 카드로 국제여론을 무시하고 지난해 전쟁을 서둘러 감행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라크인들은 찰라비에게 냉정했고, 벌집 자체에서 여왕벌을 찾으려하고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미국에 협조하는 쿠르드족들이 독립을 요구할 경우 자칫하면 새로운 내전에 휩싸일 수 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라크인들은 순니파건 쉬아파건 아직까지 가리지 않고 연합하여 이라크를 지켜내려고 연합하고 있는 것 같다. 아무튼 선공격, 후해결의 과오가 전쟁이 끝난 1년후인 지금까지도 미국을 당혹스럽게 하고 있다. 부시 미대통령의 인기는 2001년 1월 취임 후 가장 낮은 42%~49% 사이에 머물고 있고 총선은 11월로 다가오고 있다. 이제 부시 행정부에게는 가장 어려운 선택의 순간들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미국은 무언가 서두르는 것 같다. 6월 30일 이라크에 주권이양을 재확인하고 있는 미행정부로서도 뾰족한 대한이 없는 듯 하다. 체포된 사담 후세인에 대한 재판도 서두르고 있지만 그것도 재판방법이나 장소, 시기 등에 어려움이 있는 듯하다. 미영 연합군이 이라크 공격초 안정적이고 민주적인 나라를 만들어 위대한 중동으로 탈바꿈시키는 모델이 될 수 있겠다고 한 초기의 약속은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 국가들에게 ‘테러와의 전쟁 가속화’라는 실망만 안긴 채 한달 남짓한 주권이양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숙제를 미국에 맡겨두고 있다.
울포위츠 미국방부 부장관도 “이라크전에서 사담 후세인과 그 체제를 과소평가 했다”는 사실을 시인했다. 5월 18일 울포위츠 부장관은 미 상원 외교위에 출석, 답변을 통해 “이라크전 전후처리 과정에서 사담 후세인이 축출됐음에도 불구, 지하에서 대미공격의 자금을 제공하고 그의 핵심 추종자가 대미공격전의 자금을 지원하는가 하면 이를 위한 군자금을 인근국가 은행에 수억 달러씩 은닉 예치하고 옛 정보체제를 활용할 것이라는데 대해 정확한 분석평가가 내려지지 못했다“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사담 후세인 체제를 과소평가 했기에 이라크인들의 저항도 과소평가 했다는 것이다. 즉 <선공격, 후해결>의 과오가 나타난 것이다.
미국은 다시 시간에 쫓기기 시작했다. 시간과의 싸움에서 실패할 경우 부시 행정부는 커다란 타격을 받을 것이다. 더 더욱 11월 대선에서 재선은 불투명해진다. 그렇기에 미국의 공세는 더욱 강도를 높이 할 것이다. 미국의 이라크 주권이양 시한인 6월 30일이 지켜져야 하고 적절한 과도정부의 책임자를 인정해야 하는 과제가 우선 급선무일 것이다.
부시 대통령과 블레어 총리는 일단 병력증강을 통해 확고하게 치안을 유지한 뒤 치안 통제권을 이라크인들에게 신속히 이양하고 이라크 민주화 일정을 가속화한다는 ‘철수전략’의 골격을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언론들은 이라크에 선거를 통한 대의 정부가 세워지고, 군과 경찰 및 정보기관 창설이 완료되는 2005년 내지는 2006년 초가 연합군 철수가 가시화 되는 시점이 될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미국의 ‘주권이양’이 기정 사실화 되었기에, 주권이양후 내분이나 폭력상태가 증대할 전망이다. 그리고 이라크내 선거가 치뤄질 연말쯤에는 다시 폭력이나 소요사태가 증가할 전망이다. 그렇기에 미국으로서는 치안유지를 위한 보다 강력한 병력의 배치가 필요하다. 더욱이 미국이 훈련시킨 이라크 보안군이 완전한 역할을 하려면 2005년 4월까지는 기다려야 한다. 국제여론이 악화되고 동맹군들의 철수 움직임이 있는 현시점에서 더 많은 동맹군의 추가파병을 기대하는 것도 무리이다. 따라서 미국은 주권이양후 보다 증강된 미군의 역할을 해결책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 같다. 이라크내 사정이 악화되면서 당초 이라크내 적정 주둔병력을 10만5천명 선으로 잡았다가 이를 13만8천명으로 상향조정한 미국의 변화는 이를 뒷받침한다고 볼 수 있다.
쿠르드족 독립과 이라크의 앞날
이라크의 입장에서 볼 때 사담 후세인은 필요악(必要惡)의 인물, 즉 여왕벌과도 같은 존재였다. 여왕벌은 한집에 절대로 다른 여왕벌을 키우지 않는다. 여왕벌이 죽고 나면 다시 같은 무리중에서 여왕벌을 생산한다. 이라크는 마치 벌들의 세계처럼 꽉 짜여진 사회이다. 이제 후세인 이후 이라크는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한 과정에 있다.
사담 후세인이 없는 이라크는 주도권 쟁탈을 위한 민족분쟁에 다시 휘말릴 것이다. 북부의 쿠르드족이 연방정부를 구성하자고 나올 것이며, 60%가 넘는 쉬아파를 현재 30%정도의 순니파가 정권을 지배하고 있었기에 주도권 다툼을 위한 종파간 분쟁도 격화될 것이다. 더 더욱 20년이상 철권정치를 해왔기에 이라크를 통치할 수 있는 반후세인 지도자를 찾는 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아무튼 후세인 없는 이라크는 보다 복잡한 내정혼란을 초래할 가능성이 매우 짙다.
주권이양이 곧바로 이라크 문제 해결을 가져오지 않을 것이다. 6월말로 예정된 주권이양 시점부터 영구헌법에 의한 완전한 주권정부 출범 때까지 적용될 임시헌법을 놓고 이라크내 최대 종파인 쉬아파의 불만은 고조돼 있어 이라크의 미래는 더욱 혼미한 상태이다. 임시헌법은 61조에 3개주 거주민 중 3분의2 이상 반대로 영구헌법을 거부할 수 있도록 하는 조항을 두고 있다. 지난 1991년 걸프전 이후 북부 3개주에서 미국의 보호하에 사실상의 자치권을 누려온 쿠르드족이 영구헌법을 거부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이라크 인구의 약 60%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쉬아파는 이 조항이 소수의 다수지배를 가능케 하는 것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지난 4월 3일 알-사드르의 최측근을 체포함으로써 대규모 항의시위가 촉발된 것은 쉬아파의 임시헌법에 대한 도전으로 보아야 한다. 쉬아파의 소요사태는 ‘이란’을 모델로 하는 신정(神政)국가 건설을 목표로 내세우는 급진 쉬아파 지도자 사드르가 노선투쟁을 주도하기 위해 ‘비장의 승부수’를 던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쿠르드족의 최대 목표는 독립국가 창설이다. 쿠르드족은 이란, 이라크, 터키 인접지역인 ‘쿠르드의 땅’을 의미하는 쿠르디스탄에 거주하지만 이란 북동부의 호라산 지역에도 상당수가 살고 있다. 쿠르드족은 페르시아어와 파슈토어와 관련이 있는 서부 이란어를 쓴다 . 쿠르드족은 이라크 북부 400만명을 비롯해 이라크와 접경을 이루는 터키에 1천100만명, 이란에 550만명, 시리아에 200만명 및 아르메니아 등 기타지역 100만명을 합쳐 전세계적으로 2천500만명에 육박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비아랍 유목민인 이들이 4천년 전부터 흩어져 거주한 지역은 쿠르디스탄으로 불리는 산악지대로, 전체 면적은 20만㎢ 정도로 알려져 있다.
전통적으로 쿠르드족은 메소포타미아 평원과 터키와 이란의 고지대에서 양과 염소를 치는 유목생활을 해왔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시작된 각 나라의 국경강화조치로 계절적인 유목생활이 가로막혀 대부분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포기하고 부락을 이루어 정착농경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새로운 직업을 갖게 되었다.
1897년 최초의 쿠르드족 신문이 창간되어 1902년까지 가끔씩 발행되었다. 이 신문은 최초의 쿠르드족 정치 클럽이 결성된 때인 1908년에는 이스탄불에서, 제1차 세계대전중에는 카이로에서 복간되었다. 1920년에 체결된 세브르 조약은 쿠르디스탄 지역의 자치를 허용했지만 비준되지 않았다. 세브르 조약을 대신해 체결된 로잔 조약(1923)에서는 쿠르디스탄 지역이나 쿠르드족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쿠르디스탄 지역은 이전보다 더욱 세분화되었고, 쿠르드족 사이에 다양한 분리주의 운동이 전개되었다. 여러 차례의 무장봉기가 일어났지만 쉽게 진압되었으며, 1931~1932년, 1944~1945년에는 이라크의 쿠르디스탄 내에서 심각한 내부갈등이 빚어졌다.
터키의 쿠르드족은 특히 터키 정부로부터 냉대를 받았다. 이란의 쿠르드족들도 이란에 동화시키려는 이란 정부의 강한 압력에 시달렸으며, 이란의 다수파인 쉬아파들에 의해 종교적인 박해를 받았다. 반면 이라크의 쿠르드족들은 비교적 탄압을 덜 받았다. 하지만 1958년 이라크 왕정이 타도된 뒤에도 행정적인 자치를 위임받고, 사회보장과 개발정책이 보다 공정하게 베풀어지기를 기대했던 쿠르드족들의 소망은 실현되지 않았다. 1970년 새로운 바쓰당 정부는 이라크의 쿠르드족에게 한정된 자치권을 부여하기도 했지만, 쿠르드족 지도자들의 불만은 가라앉지 못했다.
이에 따라 1970년대 이후 터키의 쿠르드노동자당(PKK), 이라크의 쿠르드애국동맹(PUK), 쿠르드민주당(KDP) 등이 주도하는 독립운동이 산발적으로 전개됐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급기야 이란-이라크 전쟁후인 1988년 이라크의 쿠르드족은 이라크군의 공격을 받게 되어 많은 사람들이 이라크를 떠나야만 했다. 쿠르드족은 이처럼 거대한 종족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독립국가를 세우지 못하고 있는 불운의 민족이기도 하다.
주변국 시리아와의 갈등도 만만치 않다. 시리아 전체인구 1,800만명 가운데 11%를 차지하는 200만명의 쿠르드족이 자치독립의 움직임이 거세질 경우, 시리아 거주 쿠르드인들을 자극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전쟁에서 승리하면 미국을 도와준 쿠르드족이 자치독립을 들고나올 것이라 판단한 시리아는 이라크전을 강력하게 반대했던 나라중 하나이다.
쿠르드지역은 유일한 ‘이라크내 비아랍지역’이다. 그래서 분쟁의 소지가 많은 곳이다. 아랍어는 거의 통하지 않으며, 종교보다는 정당의 힘이 센 지역이다. 이라크내 쿠르드족 양대 정당인 민주당(KDP)과 애국동맹(PUK)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일종의 ‘비합법적인 자치국가’이기도 하다. 쿠르드족의 정치 중심지인 아르빌과 술라이마니야는 1991년 걸프전 이후 미-영 연합군의 비행금지구역(No-fly Zone) 설정에 힘입어 이라크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은 채 독립국가에 버금가는 자치를 누려왔고, 전쟁피해도 그다지 겪지 않은 유일한 지역이다.
과도정부에 의한 주권이양이 6월 30일 순조롭게 이루어질 경우, 이라크에 남은 것은 모자이크처럼 얽혀있는 부족사회를 이끌고 갈 강력한 새 지도자(여왕벌)를 찾는 일이다. 크게 보아서 60%의 쉬아파, 30%의 순니파를 통합한 이라크, 더 나아가 종교보다는 정치적 색채가 강한 쿠르드족을 함께 어우를 수 있는 지도자가 나와야만 한다. 현재의 여건으로 볼 때 대부분 종교지도자들은 임시헌법에 반감을 갖고 있고, 쿠르드족들은 미국의 편에서 만족을 표하고 있기에 주권이양전까지 획기적인 대안이 나오지 않는 한 이라크는 또 다시 극심한 내전이나 내부혼란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딜레마에 빠진 한국
아르빌이냐 술라이마니야냐 파병지 문제를 놓고 갑론을박하던 한국에게 지난 5월 17일 느닷없이 “주한미군 2사단 병력 3천600명 이라크 파병”이라는 뜻밖의 우박(雨雹)이 떨어진 것이다. 그러나 충격은 아니다. 더 더욱 예상 못했던 문제도 아니다. 문제는 정치권이나 국민 모두가 지나치게 정치적인 문제에만 관심을 쏟고 있었다는 점에 있다. 위에서 언급했지만, 이미 전쟁이전에 국제유가 시나리오도 있었고, 최소한 지난 1년을 지켜보면서 이라크 사태가 장기전으로 가고 있음은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모두 예측하고 있었다. 이라크 파병이 가지는 정치적 목적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경제논리이다. 다시 말하면 한국은 전후복구사업과 파병으로 인한 경제적 효과를 면밀히 따져봐야 했다. 일본이 일관된 이라크 정책을 고수하는 이면에는 강력한 에너지 정책이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군 자이툰 부대가 파견될 예정인 이라크 북부 쿠르드는 연방제를 규정한 이라크 임시헌법을 통해 완전한 자치를 보장받았다. 2005년에 제정될 영구헌법에서도 연방제 승계가 확실시되기에 쿠르드족의 자치독립은 현실화되고 있다. 쿠르드족은 영구헌법에서 자신들에 대한 자치보장 조항이 빠질 경우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임시헌법을 통해 부여받았다. 따라서 쿠르드족은 자치권 확립을 계기로 지난 1991년 걸프전 이후 미영 연합군의 보호아래 중앙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자치를 누려온 아르빌, 도후크, 술라이마니야 등 3개 주의 통합을 추진중이다. 반면, 당초 한국군 파병 예정지로 지목됐던 키르쿠크는 향후 이라크에서 쿠르드족과 관련된 최대 분쟁지역으로 떠오를 가능성이 높다. 아르빌과 술라이마니야는 키르쿠크에서 각각 북쪽과 동쪽으로 약 100㎞씩 떨어져 있다.
키르쿠크(Kirkuk)는 자그로스 산맥 기슭의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북쪽 약250km 떨어진 북부의 도시이다. 철도가 바그다드와 아르빌을 잘 연결해주고 있다. 키루크크의 인구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2003년도의 추계에 따르면 75만5,700명으로 알·타민(Al-Tamin) 주의 수도이다. 1974년까지 알·타민은 키르쿠크주의 수도였는데, 아제르어(語) 사용자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라크 정부에 의해서 본래의 규모에서 1/4정도로 축소되었다. 이라크 정부는 이 지역에서 인구 균형을 역전시키기 위해 아랍인들의 정착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투르크멘의 지도자들에 따르면, 수많은 투르크멘(Turkman) 공동체들이 북부 이라크에서 궁핍하게 살고 있으며, 1990년대를 통하여 2만명 정도가 불법적으로 유럽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키르쿠크에는 여전히 투르크멘이 다수를 점하고 있지만, 쿠르드족(Kurdish)과 아랍인 공동체는 매우 중요하며, 전체 인구의 약40%를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담 후세인 체제이후 이 지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투르크멘과 쿠르드족 사이에는 투쟁의 징후가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후세인 정권은 유전지대인 키르쿠크에 대한 장악력을 확대하기 위해 쿠르드족과 투르크멘족이 주류이던 이곳에 남부의 아랍계 주민들을 이주시켜 종족 구성비를 인위적으로 바꿔놓는 ‘아랍화 정책’을 추진했다. 20여 년에 걸쳐 약 30만 명으로 추산되는 쿠르드족과 투르크멘족이 키르쿠크에서 쫓겨났고, 아랍인들이 그 공백을 메웠다. 주권이양이 이루어지면 미국과 쿠르드는 원주민을 불러들이고 아랍인이주민들을 원래의 고향으로 돌려보낸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러나 그 계획의 성사여부는 미지수이며, 주변의 터키, 이란, 시리아 등 국가들이 이에 협조할지는 더욱 더 불투명하다. 쿠르드족의 꿈은 여기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꿈은 대(Great)쿠르디스탄을 완성하는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제1차 세계대전 후 터키, 이란, 시리아, 이라크로 분할돼 있는 쿠르드족들 각각의 영토, 즉 소 쿠르디스탄을 하나의 통합된 쿠르디스탄으로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새로운 화약고의 중심이 쿠르드지역이고 분명한 점은 우리가 그 길목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제유가는 5월 2일 현재 서부텍사스 중질유 6월 인도분 가격이 배럴당 96센트(2.4%) 오른 41.50달러로 마감됐다. 매일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는 국제유가 앞에서 무력해질 수밖에 없는 우리의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유가가 5달러 오르면 우리나라의 무역수지는 55억달러 감소할 것으로 분석됐다. 유가인상이 국내총생산(GDP) 감소에 미치는 영향도 아시아 국가중에서 한국이 가장 심각한 수준인 것으로 전망됐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여태껏 이라크 문제를 경제보다는 지나치게 정치적 관점에서 조명한 탓이라 볼 수 있다. 이제부터라도 이라크 사태에 관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경제적 접근이 이루어져야 한다. 전후복구사업과 관련한 진출방안도 다시 체크해야 하고 파병에 따른 경제적 파급효과도 장·단기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특히 에너지 다소비국이며, 에너지의 사용효율이 낮은 한국의 에너지 정책도 차제에 외교정책과 함께 다시 큰 틀에서 제고되어야 한다. 아직도 이라크의 앞날은 한치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오리무중(五里霧中)이고 이라크가 가는 길도 새로운 여왕벌을 찾을 때까지는 형극(荊棘)의 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