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시론>
동 러시아 송유관 각축과 러시아의 전략변화
글·방기열|에너지경제연구원 원장
최근 동 러시아 송유관 노선분쟁에서 보이고 있는 러시아 태도는 에너지를 전략상품화하려는 의도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작년 말 러시아 총리 프라드코프(Mikhail Fradkov)는 송유관 노선을 일본이 제안한 것과 유사한 태평양 노선으로 결정한다고 발표했다. 이로서 수년동안 끌어온 중·일간의 노선경쟁에서 러시아는 일본의 손을 들어 주는 듯 했다. 그러나 정작 불만을 높인 것은 중국이 아니라 일본이었다. 한마디로 러시아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러시아가 제시한 노선은 서부 시베리아 타이쉐트(Taishet) 유전에서 블라디보스톡의 페레보즈나야(Perepoznaya)까지 4,200km를 연계하는 것이다. 페레보즈나야는 당초 일본이 송유관의 종착지로 제시한 나호드카와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이 송유관 노선은 2단계로 건설이 추진되는데 중국 다칭유전 위에 위치한 중·러 국경근방인 스코보로디노(Skovorodino)까지 송유관을 먼저 완공하고, 그 후 그곳부터 페레보즈나야까지 2차 송유관 공사를 한다는 계획이다. 일본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러시아가 1단계 송유관에서 지선을 부설하거나 철도를 통해 중국에 먼저 원유를 공급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일본까지의 원유공급에 차질이 예상된다는 것이다. 동 시베리아는 아직 확인된 원유매장량이 작아 대규모의 원유공급이 어려운 실정이다. 러시아측은 추가적인 유전개발을 통해 공급량을 늘리고, 정 모자라면 서부 시베리아에서도 원유를 공급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러시아의 주장에 불확실성이 너무 크다는 것이 일본의 불만이다.
러시아가 태평양노선을 택한 것은 일본이 제의한 50억달러의 차관을 비롯, 재정지원에 대한 기대감과 함께 중국노선은 시장이 중국에 예속되는 반면 태평양 노선은 일본은 물론이고 한국과 동남아, 미국까지도 수출지역을 다변화할 수 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태평양 노선이 결정된 후에도 러시아의 중국 배려가 계속되고 있다. 지난 4월 29일 러시아 송유관 공사인 트렌스네프트(Trensneft)는 동 러시아 송유관노선에서 중국으로의 공급이 우선될 것임을 시사하여 일본에 민감한 반응을 일으킨 적이 있다. 러시아 내부에서도 동 러시아 송유관노선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고 있다. 송유관 건설 주체인 트렌스네프트가 중국노선을 선호하는 반면 개혁파인 천연자원성 장관 등 일부 경제각료들은 태평양노선을 주장하고 있다. 푸틴은 아직 명확한 의사를 표명하지는 않았지만 경제적으로는 태평양노선을 선호하지만 중국을 전략적 파트너로 놓치고 싶지 않은 눈치다.
송유관 노선에 대한 러시아 내부의 혼선과 중·일간 경쟁에서 보이는 러시아의 이중적 행태는 동 러시아 에너지정책이 경제적 목적이외에도 전략적 가치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추진될 것이라는 점을 시사하는 것이다. 최근 영토문제에 대한 러시아와 일본간의 갈등도 송유관 노선에 대해 중국과 일본사이에서 모호한 입장을 보이는 러시아 태도와 큰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러시아는 홋카이도 4개섬중 2개를 반환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으나 일본은 4개섬 모두의 반환을 요구하여 현재 양국사이에 첨예한 외교분쟁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가 동 러시아 송유관 노선결정에서 중국을 전략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단순히 일본과의 영토분쟁에 대한 정치적 반응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중국은 안보분야에서 미국의 패권주위를 견제한다는 공통적 목표를 공유하면서 양국간의 협력은 투자와 교역분야뿐만 아니라 군사분야까지 괄목할 만한 진전을 보이고 있다. 러시아가 자국산 무기의 주요 구매자인 인도에 대해 우호적 관계를 보이면서 에너지교역을 크게 신장시키고 있는 점도 이러한 전략적 측면이 강하다. 인도의 국영 석유회사인 ONGC는 사할린-1 프로젝트에 17억달러를 투자, 20%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으며 최근 양국 에너지장관 회의에서도 인도가 향후 5년간 러시아의 석유와 가스개발에 200억 달러이상 투자하기로 하였다. 한편 러시아가 인도와 관계를 강화하고 있는 것은 무기와 에너지수출외에도 미국이 테러전쟁을 이유로 파키스탄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한 전략적 측면도 있다.
푸틴은 집권 2기에 들어서면서 러시아 에너지산업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동 러시아의 석유와 가스 수출도 국영회사인 트렌스네프트와 가즈프롬의 독점 수송망을 통해 러시아 중앙정부가 주도권을 쥐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향후 러시아의 에너지전략이 기업의 이익보다는 국가이익을 우선하는 방향으로 나갈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다. 1990년초 푸틴은 광물대학원 시절 그의 논문에서 “러시아의 자원은 국가의 경제발전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러시아의 위상을 담보하는데도 활용되어야 한다” 고 주장했다. 푸틴의 논문에서와 같이 향후 러시아의 석유 및 가스 수출정책은 경제적 이익외에도 러시아의 외교·안보 역량강화에 큰 무게를 두고 추진할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