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사도 이제는 수출 역군
- 고도화설비 증설 등 대규모 투자를 통해 고용도 창출

이문환_헤럴드경제 기자

석유제품 수출, 3년 연속 수출품목 5위 기록
반도체, 자동차, 무선통신기기, 선박해양구조물에 이은 한국의 다섯 번째 수출 품목은? 어지간한 사람들은 정답을 맞추기 어려워하는 동시에 답을 알면 의외라는 표정을 짓게 만드는 퀴즈다. 답은 석유. 지난해 한국은 휘발유와 경유, 항공유 등 석유제품을 사상 최대인 240억달러를 수출, 3년 연속 수출액 5위를 기록했다.

지난해 수입된 원유가 총 603억달러. 수입 품목 중 1위다. 하지만 기름 한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원유 수입은 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다는 점에서 수입액의 절반에 못 미치는 금액을 수출로 벌어들인다는 사실은 그만큼 정유업계가 우리 경제에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수출 1위 품목인 반도체를 보자. 지난해 390억4600만달러의 수출을 거두었지만 수입액도 그만큼 많은 308억1500만달러였다. 실적을 놓고 보면 정유업체들은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등에 결코 뒤지지 않는 수출 역군이다. 석유 제품이 우리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약 6.5%에 달한다.

SK에너지, GS칼텍스, S-OIL, 현대오일뱅크 등 정유 4개사는 2004년 101억달러 수출을 달성한 이후 2005년에는 153억달러를 해외에서 벌어들인 데 이어 2006년에는 204억달러의 실적을 올려 사상 처음으로 200억달러 고지를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지난해의 경우 수입 원유 60%만 내수 시장에 공급했고 40%는 가공해서 팔았으니 뒤집어 보면 원유를 더 많이 수입할수록 무역 흑자에 도움이 된다는 역설도 생겨난다.

석유 수출액만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수출국도 다원화하고 있다. 그간 중국과 미국, 일본 등 3개국에 집중됐던 석유 수출은 지난해에는 칠레와 싱가포르 수출액이 크게 증가했다. 지난해 칠레에 대한 석유 수출은 전년 대비 238.3%가 증가한 18억5400만달러였고 대(對) 싱가포르 수출액은 전년 대비 123.2%가 증가한 33억1200만달러였다.

또 수출 제품 구조는 벙커C유에서 경유 및 항공유 등으로 고부가가치화하고 있다. 값싼 중질유를 고가의 경질유로 전환하는 이른바 '지상 유전' 고도화설비 증설에 정유사들이 앞다퉈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도 고유가에 중국 및 인도 등의 수요 급증으로 국제 경유가의 폭등이 계속되고 있어 정유사들의 수출 실적은 그만큼 늘어날 전망이다. 연초 지식경제부는 올해 석유수출액이 전년 대비 20% 증가한 280억불로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지만 이미 연초보다 국제 유가와 제품 가격이 약 20% 증가한 만큼 올해 정유업체의 수출액은 역대 최대가 될 것임은 물론이거니와 과연 어느 정도 규모에 이를지가 관건이다.

하지만 정유업계가 좋은 실적을 내면 낼수록 정유업계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곱지 않다. 정유사의 조 단위의 매출 실적을 보며 정유업체가 고유가를 틈타 폭리를 취하고 있다는 시각이 많다. 이는 미국과 유럽 등에서도 마찬가지 다. 시장자본주의의 중심인 미국에서도 의회를 중심으로 정유사들의 이익에 횡재세(windfall)를 물려야 한다는 말이 심심찮게 흘러나온다. 미국 언론 보도에 따르면 지난 5월21일 미 상원 법사위원회는 셸과 BP아메리카 등 5대 메이저 석유회사 경영진을 불러 청문회를 열고 수요 공급의 법칙이 아니라 산유국들의 독과점적인 행위와 선물시장의 투기 행위, 석유사들의 탐욕이 겹쳐 유가가 상승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했다.

정유사들이 내는 이익은 고도화설비를 통한 2차 정제마진 및 수출에서 나온다
신문사에서 정유 및 석유화학 업계를 담당하는 기자도 현장을 다니다 보면 정유업계를 향한 따가운 시선을 피부로 느끼곤 한다. 정유사들은 국제 유가가 오르면 곧바로 소비자 가격에 전가하는 식으로 앉은 자리에서 돈을 벌며, 엄청난 이익으로 성과급 잔치를 벌인다는 식의 생각을 가진 이가 상당수다. 기자의 한 지인은 기자에게 이런 말을 한 적도 있다. “정유회사에서 일하면 모두 공짜로 기름 넣는 거 아니야?” 정유업체에서 근무하는 분들도 동창회 등에 참석하면 비슷한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다고 한다.

정유업계가 매년 치열하게 투자를 하고 고용을 창출하며 국가 경제에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국제 유가의 급등에 따른 기름값 인상 소식에 파묻히기 일쑤다. 고유가 속에서도 1차 정제 마진은 이미 지난해 4/4분기부터 마이너스로 돌아섰으며 정유사들이 내는 이익은 고도화설비를 통한 2차 정제 마진 및 수출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이 같은 현실은 외면받고 있다. 지난해 정유사는 원유를 배럴당 평균 69.4달러에 수입해 석유 제품을 만들어 배럴당 82.2달러에 수출, 수출용 제품의 정제 마진은 12.8달러였다.

또 지난 1/4분기에 정유업체들은 석유화학 경기 침체와 원화 환율 약세로 대규모 환차손을 기록하며 일부 업체가 분기 적자를 기록하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점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

고도화설비 확충에 막대한 투자 단행
정유업체들은 올해도 엄청난 규모의 투자를 단행한다. 지난 4월 SK에너지는 옛 인천정유 부지에 1조5200억원을 투자해 제4고도화설비를 건설하기로 발표했다. 신설되는 고도화설비는 저가의 고유황 벙커C유에 수소를 첨가한 뒤 분해공정을 거쳐 고부가가치 제품인 나프타와 등•경유, 윤활기유 등을 생산한다. 오는 2011년 준공을 마칠 이 설비에서 나오는 제품은 중국과 동남아 등에 주로 수출돼 그만큼 더 많은 외화를 벌어들이게 된다. 또 공장이 신설되면 3500여명의 일자리도 창출된다.

GS칼텍스도 2010년까지 제3고도화설비를 짓는 데 총 2조9400억원을 투자한다. 3조원에 가까운 투자금액은 정유업계 단일 사업으로는 최대 규모이며 제3고도화설비에서 생산될 경질유 물량은 하루 11만3000배럴로 국내 최대다. 공사 기간 중 연인원 300만명의 신규 고용 창출도 예상되고 있다.

또 현대오일뱅크도 충남 대산공장 인근에 확보한 부지의 조성 작업에 착수해 고도화설비 증설에 뛰어들었다. S-OIL은 고도화설비 확충 계획은 아직 잡지 않았지만 온산 석유화학 공장 확장 프로젝트에 주력하는 한편 고도화설비의 공정 효율성을 개선하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

국제 유가는 연일 사상 최고가를 경신하는 기록 행진을 거듭하고 있다. 중장기적으로는 국제 유가가 배럴당 200달러까지 오를 수 있으며 30년 뒤에는 석유 자원이 완전히 고갈될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도 나오고 있다. 신흥 산업국인 중국과 인도가 각지의 에너지 자원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면서 세계는 선진국과 신흥 산업국을 중심으로 경제 성장의 원동력인 에너지 확보 전쟁을 벌이고 있다.

이런 와중에 위기의식을 느낀 우리 정유업계도 고도화설비 증설 등을 통한 경쟁력 제고와 아울러 해외 자원 개발, 수소에너지 및 2차전지 등 대체 에너지 사업에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으며 국가 경제에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인정해야 한다.

정유사들도 대중의 부정적인 인식을 바꾸기 위해 좀 더 노력할 필요가 있다. 정유업에 국한되지 않은, 넓은 안목을 갖고 관련 기술을 개발하고 IT(정보기술), BT(바이오기술), NT(나노기술), ET(환경기술) 등 타 산업과의 이종 결합을 통해 종합 에너지기업으로 진화하기 위한 전략을 강구하고 실천에 옮길 필요가 있다. 아직까지 타 업종과 비교해 무겁고 보수적인 색채가 강한 기업 이미지를 개방적인 것으로 전환하려는 노력도 계속적으로 기울여야 함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