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할 만한 가을 문화행사

구본준_한겨레신문 대중문화팀장

가을이 독서의 계절이란 말은 실제로는 옛말이다. 책이 가장 많이 나오고 팔리는 계절은, 방학철인 여름과 겨울이다.
그러면 가을은 무엇의 계절일까? 가을은 ‘각종 문화행사의 계절’이다. 굵직한 각종 공연과 전시회, 다양한 문화 이벤트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철이 가을이다. 모처럼 문화를 즐기고 싶다면 언제나 가을이 최고다.

문화라는 것은 신문보다도 텔레비전 소개로만 봐서는 그 진면목을 알기가 ‘불가능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흔히 바쁜 직장인들이 문화와 거리가 멀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처음에 문화 이벤트들과 인연을 맺기가 힘들어서다. 또는 아예 자신과는 맞지 않다고 여기기 쉽다. 영화처럼 쉽게 즉흥적으로 즐기기가 어려운 탓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일단 한번 짬을 내서 직접 부닥쳐 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래봤자 1년에 한 두 번 이다. 1년 내내 겨우 사나흘 쯤 문화행사에도 가본 것과 전혀 안가보는 것은 한 해를 보내는 데 있어 하늘과 땅차이다. 올 한해, 어느 한 해를 기억해보라. 그해에 자기가 특별히 해본 것이 과연 몇 가지나 있는지를. 삶에 가장 손쉽게 기름칠하는 것이 문화행사다.  방법도 사실은 아주 쉽다. 시도하지 않을 뿐이다. 단돈 몇 만원만 지출할 용의가 있으면 된다. 중요한 것은 먼저 지출부터 하라는 것이다. 무작정 맘에 드는 순간 예매하든지 지불을 하라. 그 다음엔 돈 아까워서라도, 궁금해서 가보게 된다. 일단 지르라!

이렇게 먼저 값을 치르는 것이 중요한 이유은 어쩌다 티켓을 받아서 공짜로 즐기는 것은 제대로 된 경험이 되기가 쉽지 않다. 문화 공연이나 다른 여러 가지 이벤트들은 직접 자기가 골라서 표를 사고 즐겨봐야 자기의 경험이 된다. 별로인지 아닌지는 일단 그 다음에 판단해보시길.

그러면 이제 올 10월부터 11월까지 눈여겨 볼만한 문화행사들을 살펴보자.
무대예술, 그러니까 무용이나 연극, 클래식 공연 등은 가을이 최고 성수기다. 그래서 굵직한 연중 최고 행사들이 모두 가을에 몰려있다. 이런 여러 가지 무대공연 장르를 통합하는 대표적인 행사가 ‘서울국제공연예술제’다. 10월14일까지 서울 아르코예술극장을 비롯해 예술의전당과 국립극장 등 주요 공연장에서 열린다.
이 축제 막바지 부분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품을 꼽으라면 10월 13~14일 열리는 <비극의 여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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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여인들>은 그리스가 자랑하는 가장 유명한 고전인 그리스 고대 비극 이야기들의 최고 레퍼토리들인 메데아, 오카스타, 헬렌 등 세 여자 이야기를 소재로 한다. 세 주인공은 어떤 비극에 휘말린 여자들일까? 한결같이 사람의 운명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슬픈 인생 역정에 빠진 여자들이다. 가장 널리 알려진 여자는 헬렌이다. 트로이 전쟁을 불러 일으켰던 바로 그 헬렌이다. 신들이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고르는 내기를 벌이는 바람에 그 내기에 이기기 위해 선택된 여자, 그래서 남편 말고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결국 전쟁을 불러일으킨 여자다. 자기 왕국을 멸망시킨 여자, 그래서 모든 저주를 들어야 하는 여자다.

메데아도 고대 그리스 이야기의 주요 등장인물 가운데 하나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자 중에 이 여자만큼 악의 화신으로 그려지는 여자도 없다고 할 만큼 그리스 신화 속 최강 악녀다. 황금양털을 찾아 떠난 그리스 영웅 이아손과 사랑에 빠져 조국을 배신한 메데아는 추격자들이 쫓아오자 자기 친 동생을 칼로 잘라 죽여 추적자들을 늦추게 만드는 여자다. 그런 잔인한 짓까지 하며 따라간 남편이 새 장가를 가자 이번에는 자기 자식들을 잔인하게 죽이는 것으로 남편에게 복수한다. 그러나 운명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메데아는 비극 속에서 스스로 악마가 된 여자다.

가장 낯선 이름일 듯 한 요카스타는 이 가운데 가장 처절한 비극의 주인공이다. 그 유명한 오이디푸스 이야기에서 아들과 결혼하는 엄마가 된 바로 그 왕비가 요카스타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신의 장난으로 비극적인 운명을 갖게 된 슬픈 여자다.

이 세 여인의 이야기를 다루는 <비극의 여인들>을 추천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우선, 비극이란 점이다. 왜 비극이냐고? 그건 무용으로 비극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즐겁게 하는 희극은 뮤지컬이나 영화 등으로 보아야 제격이다. 그러나 사람의 감정을 정화시켜주는 슬픔을 다루는 것은 오히려 말이 없는 무용에서 제격이다. 무용은 말이 없기에 더욱 감정이 도드라지는 묘한 장르다. 몸짓만으로 어떻게 슬픔을 보여줄까? 그걸 직접 현장에서 보면 무용의 매력과 제대로 만나게 된다. 흐느끼는 듯 한 어깨 동작, 힘없이 늘어지는 팔, 조용히 떨리는 몸통…. 그런 세밀한 동작으로 어떻게 슬픔을 표현하는지 체험해볼 기회다. 일체의 말이 없이 몸짓만으로 느끼는 슬픔에 동화되는 것은 다른 공연 장르에서 느낄 수 없는 독특한 경험이 될 것이다.

또 다른 추천 이유는 이 작품이 독특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소재는 서양 그리스의 비극이지만 다루는 주체는 아시아 예술가들이다. 인도, 우즈베키스탄, 이란 세 나라 연출자가 만들었다. 그래서 부제가 ‘아시아의 눈으로 재해석한 그리스 비극속 여인들’이다. 가장 유명한 서양의 비극을 과연 동양의 감성을 지닌 연출자들은 어떤 식으로 바라보고 어떤 비극으로 새롭게 만들었을까? 그게 바로 이 작품을 만나는 핵심 포인트다.

거의 몇 년에 걸친 기획 끝에 나오는 국제 프로젝트로, 나카야마 다이스케란 일본 미술가가 무대 미술을 맡았는데 무대 디자인과 의상이 제작 과정부터 높은 평가를 받아 기대감을 높여왔다. 그런 점에서 세 나라별 해석에 일본 미술가까지 여러 나라들의 감수성과 미학이 녹아들어간 이색 대형 무용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무용이면서도 음악 노래와 어우러져 부담스럽지 않은 점도 장점이다. 뮤지컬 못잖게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서울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10월13~14일 무대에 오른다. www.spaf21.com, (02)3673-2561~4.

공연 작품들과 달리 미술 전시회는 돈이 들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일부 블록버스터형 전시회를 빼면 미술 전시회 관람처럼 편안한 문화 체험도 없다. 미술전시회는 혼자서 가기에 쑥스럽기는커녕 오히려 혼자 즐겨야 더 작품에 빠져드는 장점이 있고, 또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 맘대로 감상 페이스를 조절할 수 있다. 돈이 들지 않기 때문에 더 보고 싶으면 몇 번씩 볼 수 있다. 보는 시간도 부담이 없다. 영화처럼 꼼짝없이 2시간을 봐야 하지도 않고, 공연처럼 밤에 하지도 않는다. 그런 점에서 미술은 도시인들이 가장 손쉽게, 그리고 삶에 활력을 주는 ‘땡땡이’ 삼을 수 있는 좋은 도구다.

올 가을 열리고 있는 전시회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쉽고, 가장 새로운 전시회라면 단연 서울 학고재(02-720-1524~6)에서 10월18일까지 하는 ‘비트윈 더 라인스’란 영국 팝아티스트들의 전시회다.
이 전시회는 영국 팝아트의 현주소를 알 수 있는 기회다. 흔히 팝아트라고 하면 미국을 먼저 떠올린다. 앤디 워홀이란 워낙이나 유명한 미술가 때문인데, 사실 팝아트는 미국보다 영국에서 먼저 시작했다. 그리고 미국 팝아트가 대중스타나 대량생산된 현대 물품 등을 상업적인 시각으로 다루는 데 비해 영국 팝아트는 물신주의에 빠진 현대인의 삶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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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에게 팝아트라고 하면 마릴린 몬로나 수프 깡통 등을 수십, 수백 개로 복사해놓은 이미지 등 때문에 허탈한 미술, 또는 장난치는 듯 한 미술로 여기거나, 팝아트에 대해 별로 좋지 않은 인상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이런 측면은 분명 어느 정도 사실이다. 그러나 분명 팝아트는 다른 미술 장르보다 뛰어난 점이 있다. 그리고 그런 점 때문에 살아남고 있다. 그것은 현대인의 삶과 가장 밀접하게 연관된 것들을 다룬다는 점이고, 그래서 다른 미술보다 훨씬 이해하기 쉽다는 점이다.

이번 전시회는 이런 팝아트의 현재 주소, 또는 굳이 팝아트로 구분하지 않더라도 가장 이해하기 쉬운 요즘 미술들의 경향을 잘 보여준다. 이 전시회를 추천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참여 작가들이 화려하기 때문이다. 세 명의 작가는 줄리안 오피, 이언 대븐포트, 그리고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 세 사람이다. 이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가는 단연 줄리안 오피다. 줄리안 오피는 이번에 국내에 처음 소개됐지만 외국에서는 절정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작가다.

줄리안 오피가 인기 좋은 이유는 그의 작품이 아주 이해하기 쉽고, 사람들의 공감을 자아내는 친숙한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오피의 작품은 사람을 아주 단순하게 바꾸는 방식이다. 오피의 작품에서는 사람의 얼굴은 비교적 정교한데 이상하게도 눈만 동그란 까만 점으로 표현한다. 그리는 대상 사람은 자기 자신은 물론 아는 사람, 이웃, 동료, 세입자 등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런 그림속 사람들은 눈이 한 가지 모양이어서 무척이나 비슷하게 보인다. 이런 묘한 이미지는 현대인의 익명성, 또는 몰개성성 등을 느끼게 하는데도 오히려 아주 깔끔하고 산뜻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그가 만들어낸 이 사람 얼굴 그림들은 대단한 히트를 쳤다. 이 동그란 점으로 눈으로 표현하는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2000년 나온 영국의 유명 록그룹 ‘블러’의 음반 재킷 디자인이다.

이렇게 눈만 점으로 표현하던 줄리안 오피의 사람 그림은 이후 아예 선을 더 굵게 하고 형태를 단순화하는 동시에 얼굴 전체를 동그라미만으로 묘사하는 새로운 형태로 진화했다. 동그란 얼굴만 둥둥 떠있는 현대인들의 모습은 더욱 상징성이 강해졌다. 오피는 이미지를 만들 때 우선 사진을 스캔한 뒤 컴퓨터로 이미지를 단순화 시키는 식으로 작업한다고 한다. 이렇게 만들어낸 단순한 이미지는 그림은 물론, 조각, 벽지,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된다. 그의 조각 작품은 국내에도 1점 들어와 있는데, 경기도 김포에 있는 김포조각공원에 있다. 줄리언 오피와 함께 전시하는 다른 작가 가운데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은 줄리언 오피의 스승이기도 한 유명 작가다. 일상속의 소품들을 간단한 선으로 표현하고 일부에만 색을 넣어 대비시키는 그의 그림들은 단순하면서도 강한 느낌을 준다. 반면 이언 대븐포트는 물감을 캔버스에 부은 뒤 캔버스를 움직여 선과 원 등을 만들어내는 작품을 선보인다.

자녀들과 함께 가을에 가볼만한 문화공간이라면 최근 경기도 과천 대공원역 바로 출구 옆에 들어선 ‘한국카메라박물관(02-502-4123))’이 추천할 만하다. 과천 서울랜드나 동물원, 미술관을 가족단위로 들렀다가 나오는 길에 대공원역에 있는 이 카메라박물관에 한번 들르기에 좋다. 새로 개관했는데 아직 널리 알려진 편이 아니어서 이색 박물관 기행 코스에 적합하다.

이곳은 카메라에 관한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카메라 전문박물관으로, 가히 카메라마니아들의 성지라고 할 만한 곳이다. 이곳이 소장하고 있는 카메라에 관심 없는 이들에겐 그저 한번 가볼 정도이겠지만, 카메라란 기계 자체에 흥미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볼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카메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카메라는 바디(몸체)만 3000여종, 렌즈가 6000여종, 이런저런 관련품까지 다 합치면 모두 1만5000여점에 이른다. 하도 양이 많아 한 번에 다 전시가 불가능해 조금씩 나눠 돌아가면서 전시할 예정이라고 한다. 사진작가인 김종세씨가 사재 수십억 원을 들여 이룩한 사설 카메라 박물관이다.

소장 카메라들은 모두 필름카메라다. 디카처럼 매끈하지 않은 대신 훨씬 더 소장욕구를 부추기는 산업디자인의 걸작들이라고 할만한 유명 카메라들이 거의 빠짐없이 들어있다. 수집가들이 탐내는 각종 금장 특별한정제작카메라들부터 가장 평범했지만 가장 많이 팔린 유명 카메라까지 한눈에 다 볼 수 있다.

이 박물관은 건물 모양이 무척 특이한데, 건물 가운데 동그랗게 카메라 렌즈 단면도를 형상화했다. 주 전시장은 2층인데, 카메라의 발달 과정에 맞춰 매 10년씩 연대순으로 여러 ‘스타 카메라’들을 카메라 발달 순서에 따라 전시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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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눈을 끄는 것은 카메라의 초기 시작인 ‘카메라 옵스쿠라’와 ‘카메라 루시다’다. 이어 본격적인 카메라의 효시랄 수 있는 1800년대 다게레오타입카메라들이 있다. 우리가 아는 모양의 카메라가 나오는 것은 1930년대부터. 지금도 필름카메라 최고의 명기로 손꼽히며 여전히 비싼 가격에 팔리고 있는 라이카를 비롯한 유명 카메라들이 줄지어있다.

카메라 업계에서 라이카의 위치는 특별하다. 라이카가 카메라 업계를 석권하기 시작한 1930년대 이후 수십 년 동안은 모든 카메라업체들이 라이카를 뒤쫓으며 라이카를 베끼기 바쁜 때가 있었다. 특히 1950년대에는 그런 라이카 카피가 절정을 이뤘던 시대로, 이시기 카메라들은 대부분 라이카의 디자인을 그대로 따르며 제품이 회사이름만 달랐을 정도다.

지금은 세계 카메라 업계 최강이 된 캐논도 당시만 해도 라이카 카피업체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1970년대 이후 카메라계의 패권이 독일에서 일본으로 넘어가면서 이후 주요 카메라들은 일본 것들이 주를 이루기 시작한다. 디지털카메라가 등장하기 전까지 최고 업체였던 니콘을 비롯해 마미야나 펜탁스, 미놀타 등 지금은 낯설어지기 시작한 당시 필름카메라 시절 맹주들의 주요 걸작 들이 눈길을 끈다.

지금도 팬들의 지지를 잃지 않고 있는 이 필름카메라들은 성능도 성능이지만 디자인의 측면에서도 중요한 산업디자인사의 걸작들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 어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최고의 장난감이 카메라이며, 생산 수십 년 이상 지나도 여전히 사람들이 만지려하고 소장하려 드는 이유는 그 모양새가 사람의 마음을 잡아끌기 때문이다. 사진도 좋지만 카메라란 기계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비슷비슷해도 다른 카메라들을 보면서 그 미묘한 차이를 음미하는 것이 재미일 듯하다.

이밖에도 각종 스파이 활동을 위해 만든 라이터 카메라, 반지카메라, 펜 카메라 등 초소형 카메라들, 그리고 디즈니랜드에서 팔았던 도날드 덕 카메라와 콜라캔 카메라, 세게에서 가장 작은 카메라와 라이플총처럼 생긴 망원 카메라 등도 이 박물관에서만 볼 수 있는 진귀한 카메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