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커C유 안에 휘발유 있다?

이덕환_서강대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교수

‘벙커C유’(Bunker C oil)는 우리가 흔히 ‘중유’(重油)라고 부르는 무겁고 끈적끈적한 석유제품이다. ‘벙커유’라는 이름은 선박이나 항구에서 연료용 석유제품을 저장하는 용기를 ‘벙커’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되었다. 벙커 유에는 보통 A, B, C 종류가 있다. 벙커A유와 벙커B유는 트럭이나 버스와 같은 대형 자동차의 연료로 사용하는 ‘경유’(디젤)에 가까운 특성을 가진 것으로 최근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 이름이다.

벙커C유도 휘발유, 등유, 경유와 마찬가지로 정유공장에서 원유를 증류하는 과정에서 다른 석유제품과 함께 생산된다. 원유에 포함되어 있는 벙커C유 성분의 비율은 원유의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30~50퍼센트 정도이다. 원유의 상당한 부분이 벙커C유라는 뜻이다. 벙커C유의 발열량은 석탄의 2배 정도이고, 휘발유나 경유보다 10~20퍼센트 정도 많다. 화재의 위험도 적고, 석탄보다 연소시키기 좋은 장점도 가지고 있다.

벙커C유는 원유의 상당부분을 차지하지만 소비는 급격히 줄고 있다

그러나 벙커C유의 가장 큰 장점은 싼 가격이다. 국제 가격으로 보더라도 리터당 500원 수준이 휘발유와 경유에 비해서 벙커C유는 300원 수준이다. 정유사가 국내에 공급하는 가격도 휘발유와 경유의 경우에는 리터당 600원 수준이지만, 벙커C유의 경우에는 450원 수준이다. 여기에 세금이 더해지면 사정은 더욱 달라진다. 휘발유와 경유에는 각각 리터당 900원과 600원의 각종 세금이 부과되지만, 벙커C유에는 10퍼센트의 부가가치세 정도만 부과될 뿐이다. 결국 벙커C유의 국내 소비자 가격은 휘발유나 경유와는 비교도 하기 어려운 리터당 500원을 조금 넘는 수준이다. 벙커C유의 가격이 싼 것은 제조 과정에서 어떤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생산에 비해 소비가 적고, 과도한 유류세가 부과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벙커C유는 휘발유나 경우처럼 쉽게 연소시키기가 어렵다. 노즐을 통해 분사를 시키거나, 미리 가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대부분의 벙커C유는 그런 시설을 갖출 수 있는 대형 선박이나 대규모 공장이나 화력발전소의 보일러 연료로 사용된다. 가격도 싸고, 열량도 많기 때문에 산업용 연료로는 일석이조의 장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벙커C유는 대부분 산업용 연료로 사용되기 때문에 높은 세금을 부과하기가 쉽지 않다. 벙커C유에 부과되는 세금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거의 모든 공산품의 제품 원가에 고스란히 반영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벙커C유는 연소 과정에서 심한 매연을 발생시키기 쉽고, 황을 비롯한 환경 오염 물질도 많이 들어있다. 환경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벙커C유의 소비는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가격이 싸기는 하지만, 연소시키기가 어렵고 환경 오염을 해결하기 위한 비용이 많이 필요한 것이 문제다. 벙커C유의 가격이 휘발유나 경우보다 월등히 낮은 것도 그런 추가 비용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벙커C유를 소비가 증가하는 휘발유, 경유로 전환시키는 공정이 크래킹이다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값이 싼 벙커C유가 좋겠지만, 정유사의 입장은 정반대다. 판매 가격이 낮은 벙커C유의 생산량이 많아지면 정유사의 수입은 그만큼 줄어들게 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정유사의 입장에서는 벙커C유 대신에 판매 가격이 높고 소비량도 많은 휘발유와 경유로 전환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정유사에서 그런 목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바로 크래킹(cracking)이라는 공정이다.

벙커C유는 20~70개의 탄소 원자들로 이루어진 매우 다양한 탄화수소들의 혼합물이다. 대략 20개에서 70개에 이르는 탄소 원자들이 긴 사슬 모양으로 연결된 것도 있고, 중간에 가지가 달린 것도 있고, 육각형 고리 모양으로 된 것도 있다. 벙커C유에 들어있는 탄화수소 분자의 종류를 정확하게 헤아리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다양하다. 휘발유나 경유와 마찬가지로 벙커C유도 특정한 분자로 이루어진 순수한 물질이 아니라 온갖 종류의 탄화수소들이 뒤섞인 혼합물이다.

크래킹은 벙커C유에 들어있는 길고 큰 탄화수소 분자들을 크기가 작은 탄화수소로 잘라내는 공정이다. 크래킹의 아이디어는 1855년에 예일대학의 화학교수 벤자민 실리만에 의해 처음 개발되었다. 큰 탄화수소 분자를 작은 조각으로 잘라내려면 뜨거운 열을 가해주거나 특별한 촉매를 사용해야 한다. 탄화수소를 섭씨 800도 이상의 고온으로 가열해서 분해하는 실용적인 공정은 1891년 러시아의 발명가 블라디미르 슈코프에 의해 처음 개발되었다. 열분해 방법을 사용하면 에틸렌처럼 이중결합이 들어있는 불포화 탄화수소가 많이 만들어진다. 불포화 탄화수소는 석유화학산업의 중요한 원료 물질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불포화 탄화수소는 자동차용 휘발유에는 바람직하지 않은 성분이다. 그런 성분이 많이 들어있으면 휘발유의 연료 탱크와 연료 공급 라인에 고체의 침전이 생기기도 한다. 휘발유를 많이 생산하려면 열분해 과정에서 수소 기체를 불어넣어 주는 ‘수소열분해’ 공정을 사용해야 한다.

가열한 탄화수소를 촉매와 함께 섞어주면 휘발유나 LPG 같은 성분이 생산된다

현대의 정유공장에서는 대부분 알루미나 또는 제올라이트와 같은 촉매를 사용하는 촉매 크래킹 방법을 사용한다. 뜨겁게 가열한 탄화수소를 고운 분말로 만든 촉매와 함께 섞어주면 분자들이 잘라져서 휘발유나 LPG(액화석유가스)와 같은 성분이 생산된다. 알루미나-실리카를 이용한 촉매 크래킹 방법은 1942년 경에 미국에서 처음으로 실용화되었다. 그 덕분에 미국은 충분한 양의 휘발유와 합성 고무를 생산할 수 있게 되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할 수 있게 되었다.

최근에는 촉매 성능이 훨씬 뛰어난 제올라이트를 이용하는 크래킹 방법이 주로 사용된다. 미리 가열한 벙커C유 성분을 섭씨 600도 이상으로 가열한 제올라이트 촉매와 접촉시키면 기체 상태로 증발하면서 휘발유, 경유, LPG 성분 등으로 분해가 된다. 촉매의 성능을 유지하려면 상당한 수준의 공학적 설계 능력이 필요하다.

크래킹에 의해서 생산되는 석유제품의 구성은 공장의 설계와 사용하는 원유의 종류에 따라 달라진다. 물론 우리나라의 정유사들도 크래킹 공정을 운영하고 있다. 크래킹의 방법은 정유 공장마다 다르다. 전체적으로 우리나라의 정유사들이 생산하는 제품 중 벙커C유가 차지하는 비율은 약 22퍼센트 정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반 소비자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경유와 휘발유의 생산 비중은 각각 25퍼센트와 8퍼센트 정도다. 그밖에도 다양한 석유화학제품의 중요한 원료로 사용되는 ‘나프타’가 약 19퍼센트 정도 생산된다. 석유제품의 생산 비율은 공장의 당초 설계와 사용하는 원유의 종류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쉽게 바꿀 수가 없다.

가끔 우리 언론에 흥미롭게 소개되는 ‘플라스틱’을 휘발유나 경유로 전환하는 기술도 사실은 정유사에서 사용하는 크래킹 기술과 크게 다르지 않다. 폴리에틸렌, 폴리아세틸렌, 폴리프로필렌과 같은 ‘플라스틱’은 엄청나게 많은 수의 탄소가 연결되어 고체 상태로 존재하는 탄화수소 고분자다. 그런 고분자를 녹여서 적당한 크기로 자르면 휘발유나 경유와 같은 성분들이 생산된다. 언론의 주장과는 달리 놀라운 신기술은 아닌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