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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설희

대한석유협회 환경안전담당 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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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질게 불어온 한파에 잔뜩 웅크려있던 겨울은 숨고를 여유도 없이 하늘에서 하얀 손님을 맞는다. 외부 공격에 자기방어하는 고슴도치처럼 추위를 피하려 꽁꽁 감아놓은 온 몸은, 눈이 내리는 날에는 한결 여유롭고 따스해진다. 눈 중에서도 특히 ‘첫눈’에 대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련한 추억 한 토막씩은 가슴에 담고 있을 것이다. 누구보다 하늘의 하얀 손님을 가장 기다리고 반갑게 맞이하는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 첫 雪


“이설희입니다.”라고 내 소개를 하면 늘 메아리처럼 돌아오는 질문이 있다. “눈雪 자(字) 쓰세요?”가 그것이다. 첫 눈에 대한 나의 애틋함이 남다른 것은 나의 이름과도 관련이 있다. 내가 바로 첫 눈 오는 날 태어났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낭만적으로(?) 태어난 나를 위해 아버지는 ‘눈처럼 빛나라’라는 예쁜 이름을 지어주셨다. 첫 눈! 그것은 나의 작은 삶을 열어준, 나와 부모님을 만나게 해준, 세상 속에 나의 작은 발걸음을 내딛게 해준 연결고리와 같은 것이다.


첫 눈이 내리는 날이면 통화량이 증가하고 문자가 폭증한다는 통신사의 집계가 있다. 그만큼 사람들에게 첫 눈은 어제, 그제와 비슷한 그저그런 하루가 아니라 ‘첫 눈 오는 날’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특별한 날이 되는 것이다. 매년 첫 눈이 오는 날 나는 달력에 동그라미 표시를 해놓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중국에서 맞은 첫 눈 오는 날의 느낌은 아직까지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북경에서 공부를 하고있던 나는 10시간 넘게 기차를 타고 친구들과 함께 대련으로 겨울여행을 떠났다. 처음 타보는 침대 기차에서부터 나는 가장 많이 들떠있었고 복잡하고 지저분한 북경을 떠나 깨끗하고 아담한 도시, 특히 겨울바다를 볼 수 있는 곳으로 간다는 사실에 냄새나는 기차 침대마저 정겹게 느껴졌다.

자전거 물결과 수많은 사람들, 쉬지않고 울려대는 자동차 경적소리가 요란한 복잡한 북경이 ‘회색’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면, 대련은 조용하고 아담한 바다빛깔 ‘푸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런 기분좋은 도시 대련에서 나는 첫 눈을 맞았다.

여행 중 어느 날 첫 눈이 조용하게 내리던 아침, 호텔을 나오던 우리 일행은 중국에서 처음으로 중국 결혼식을 보았다. 신랑 신부와 친구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즐기는 것을 보면 아마도 피로연 정도 되었던 듯 하다. 중국 전통옷(치파오)을 입은 신부가 너무나 예뻤고, 우리나라와는 달리 아침 일찍 호텔 입구까지 와서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정말 신기했다. 사람 만나기 좋아하고 새로운 분야에 지대한 호기심을 보이는 나는 ‘중국문화탐방단’이라고 나름대로 멋진(?) 이름을 지어 친구들을 소개하고 즉석에서 결혼식 파티에 합류했다. 신랑 신부와 멋지게 사진도 찍고 친구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웃고 떠들며 그렇게 첫 눈 오는 날 오전 시간을 마무리 지었다. 이름도 모르고 출처도 알 수 없는 수많은 맛있는 음식들을 공짜로 먹은 것은 순간적으로 발동한 ‘중국문화탐방단장’의 잔머리에 대한 보너스라고 해 두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피로연에 있었던 중국 친구들 중 한명이 내가 공부하는 북경 대외경제무역대학 근처에 살고 있어서 돌아오는 기차도 같이 타고왔다. 북경에 돌아와서도 그 친구와는 자주 만나곤 하였는데, 친구는 나의 중국어 공부를 도와주기도 하고, 나를 데리고 다니며 북경의 구석 곳곳을 소개시켜 주기도 하며 여러모로 나의 유학생활을 많이 도와주었다. 덕분에 나는 중국 가정집에서 며칠 간 하숙을 해 보기도 하고, 못먹던 전갈꼬치를 먹어보는 기이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대련에서의 첫 눈은 그렇게 나에게 새로운 문화를 경험하게 해주고 새로운 친구들을 선물해 준 것이다.



# 첫 目


여기 또 하나의 첫 눈이 있다. ‘첫 目’, 즉 ‘첫인상’이 그것이다. ‘첫 雪’이 사람들에게 기분 좋은 설레임을 갖게 하듯 ‘첫 目’ 역시 우리에게 새로운 사람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한다. 사람의 첫인상을 결정하는 데는 고작 6초가 걸린다고 한다. 6초 안에 생긴 느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불합리하게 들릴 수 도 있지만, 그 6초가 사람과의 관계에서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을 차지한다는 데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나 처음 봤을 때 어땠어?”라고 친구들에게 가끔씩 물어보면, “야, 지금이랑 많~이 매~우 다르지.”라는 의미심장한 말이 되돌아온다. 중국 어학연수를 떠나기 전, 단기연수를 같이 받을 친구들과 유학원에서 간단한 모임을 가진 적이 있었다. 유학생을 대상으로 한 설명회에서 모두 처음만나는 자리. ‘또르르르’하며 눈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어색한 무게가 유학원 공기를 서서히 누르고 있었다. 처음 떠나는 연수에 이것저것 궁금한 게 많았던 나는 수많은 질문들을 쏟아내었다. “기숙사는 남향인가요?” “아시아나 타고 가나요, 대한항공 타고 가나요?” “한국에서 송금할 때 무슨 은행 쓰나요?” “짐은 30kg까지 되는거죠?” “학교 주변 환경은 어떤가요?” 등등.

나중에 친해지고 난 후 들은 이야기지만, 이렇게 질문 공세를 퍼붓는 나에 대해서 친구들은 각기 다른 첫인상을 심었다고 한다. ‘참..깐깐하네.’ ‘쟤 모야~’ ‘뭘 저렇게 따져...’ 등등. 결론은 나에 대한 첫인상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고 한다. 이것저것 확인하고 싶었던 나의 질문들이 깐깐하고 깍쟁이스러운 첫인상을 남긴 것이다. 그 와중에 나는 결정적인 마지막 질문 하나를 던진다. “기숙사에 다리미는 있나요?” “...” 이 순간에 친구들 모두 무너졌다고 한다. 나도 내가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내가 생각해도 참 어이없는 질문이었다), 여하튼 그 질문이 까탈스러운 나의 첫인상을 만드는 마침표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 이후 중국에서 친구들과 친해진 후에도 나는 한동안 ‘다리미’로 불렸었고 지금도 친구들이 종종 나를 놀려대는 소스가 되곤 한다. 재미있는 것은 기숙사에 다리미까지 챙겨온 사람은 질문을 했던 내가 아니라, 그 옆에 조용히 앉아 다리미를 가져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속으로 한참 고민하고 있던 소심쟁이 내 친구라는 사실.

중국에서 같이 생활하면서 나의 차가웠던 첫인상은 금새 없어졌고, 수개월동안 같이 웃고 떠들고 공부하며 정말 평생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의 한 토막을 만들었다. 까탈스럽다고 생각했던 첫인상은 하나의 웃음거리가 되어, 나는 그 친구들과는 연수가 끝난 지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평생을 같이 할 수 있을 가까운 사이로 지내고 있다. ‘다리미’라는 이름으로…

눈을 좋아하면서도 추위를 심하게 타는 나를 보고, 어느 할머니께서 겨울에 태어난 아이인데 이름에 까지 눈이 있어서 겨울에 약한 것이라며 내 이름을 바꾸라고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만약 부모님께서 그때 내 이름을 바꾸셨다면, 나는 겨울에 지금보다 조금은 튼튼해졌을지는 모르지만, 눈을 보면서 지금처럼 행복해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첫 雪 ’과 ‘첫 目’이 사람들에게 기분좋은 기대감을 동시에 안겨줄 수 있는 교차점을 가지고 있다는 나만의 논리도 찾기 힘들었을 것이다.

구정이 지나 새해가 된 오늘, 새해에 나에게 다가올 기분 좋은 ‘첫 雪 ’과 ‘첫 目’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