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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인천정유 재경팀 이승현 과장 / 사진 | 프리랜서 조인주



20여 년 전에 시골에서 상경한 사촌 형에게서 물려받은 시계가 있었습니다. 사촌 형은 먼 시골에서 살았고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마음을 시계에 담아 저에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 후 20여 년 남짓한 시간을 시계는 나와 함께 보내왔습니다.

수은전지를 넣는 것이 아닌 태엽을 감아서 밥을 주면 작동하는 기계식 시계였고 그 긴 시간을 잘도 버텨주었지요. 여름이면 방수가 안 되는 문제와 손목까지 흐르는 땀 때문에 책상서랍 속에서 지내다 추운 겨울이 오면 다시 팔목에 자리잡는 생활을 보내더니, 어느 날 밥을 줘도 더 이상 가지 않는 일이 생겼습니다. 시계 옹(翁)이라고 불릴 만큼 오래된 시계가 죽은 겁니다.

정확히는 이번이 두 번째였습니다. 이 시계가 처음 죽은 것은 시계를 받고 어린 마음에 너무 좋아서 밤에 잘 때에도 차고 자다가 험한 잠버릇 탓에 잠결에 휘두른 팔이 벽인가 장롱인가에 충돌을 했을 때입니다. 그때 죽은 시계는 어머니께서 동네 금은방에서 수리해다 주셨습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동네 금은방에는 이런 시계를 수리하는 기술자가 있었지요. 그런데 이번에는 좀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2005년 겨울에는 이것을 어디서 수리할 지 찾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남대문 시장은 참 볼 것이 많습니다. 한때 남대문 시장 인근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습니다.

점심시간에 밥을 먹고 산책도 하고 구경도 겸해서 시장을 이리저리 돌아다닌 적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그야 말로 별의별 물건들이 있지요. 그때 언뜻 한 골목에 시계진열장을 늘어놓은 곳을 본적이 있었습니다.

그곳 어딘가에 시계 골목이 있는데, 아주 나이 많은 할아버지가 오래된 시계를 잘 고친다는 이야길 들었습니다.

그곳까지 가기에는 몇 달이 걸렸습니다. 시계를 고치기로 마음먹고(사실은 폐기 처분할까 하나 그냥 기념품으로 간직할까 여러 가지 생각이 있었으나 그 긴 시간을 함께 해온 끈끈한 정 때문에 수리해보자는 생각을 하고) 남대문 시장에 나갈 날만 기다리고 있었지요.

어딘지도 모르니 시계 수리를 맡기러 나가는 것도 그렇고 해서, 남대문 시장에 나갈 일이 있을 때 가지고 나가서 수리를 해야지 하는 생각에 몇 달이 걸린 겁니다.

물론 그곳을 찾기도 아주 힘든 일 이였습니다. 도대체가 알 수 없는 골목을 물어 물어 결국에 찾은 곳이 바로 허름한 건물에 아주 작은 남일사라는 간판이 걸린 건물의 입구였습니다.


남일사라는 곳은 남대문 시계골목 부근 오래된 건물에 있는 시계수리 전문 이원삼 할아버지의 사무실이 상호랍니다. 남대문 시장, 그 소란스런 시장 통 속에 이런 한적하고 허름한 곳이 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고즈넉한 골목길 이랍니다.

사무실을 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바로 그 앞에 가서도 들어서기가 또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외진 복도에 달랑 호수만 적힌 문들을 보고 있자니 몇동몇호인지 알지 못하면 도무지 찾을 수 없는 아파트 같습니다.

이원삼 할아버지와 시계 재생기술자 한 분이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할아버지를 만났습니다.

시계수리 재생전문 남일사의 이원삼 할아버지는 1910년 함경남도 원산 단천리 출생입니다. 현재는 97세입니다. 할아버지가 어린 시절 동네자전거포에서 자전거 수리하는 것이 너무 좋아 기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고향 읍내에 있는 시계수리점을 통해 일본 시계 카달로그와 수리교본을 가지고 독학으로 시계수리 기술을 배웠다고 합니다.


남일사에 들어가서 이야기 했습니다. 왠지 어색하게 “이거 고칠 수 있는지요?” 하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럼 되지” 하시며 일단 시계 뒤편 뚜껑을 따고 부속품 몇 개를 흔들리지 않는 손으로 뽑아서 살펴 보시고는 “고칠 거야?” 하고 묻더군요. 수리비가 오만 원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시 고민하였습니다.

예쁘고 간편한 시계도 1~2만원이면 쉽게 살수 있는데 그 몇 배를 주고 고쳐서 써야 하는 걸까 하는 그런 고민 말입니다.

결국 수리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께 찾으러 오는 날 할아버지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하고 인터뷰를 부탁했더니 “그러지 뭐” 하셨습니다. 그 후 몇 주가 지나서 작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아내와 함께 아내가 그린 그림엽서 한세트를 선물로 챙켜서 시계를 찾으러 갔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70년 시계수리 인생 이야기를 듣게 되었지요.

그 와중에 들은 여러 이야기 중에서 인상적인 것이 있었는데, “무엇이든 누구에게서 배우는 것은 한계가 있다. 누구한테 배우면 그 이상이 될 수 없어서 자신이 노력해서 알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라는 말 이였습니다.

지금 세상에서 시계수리 기술을 배우려 하는 사람도 거의 없지만, 과거 뛰어난 시계 기술자의 자리까지 오직 자신만의 힘과 노력으로 올라간 할아버지의 말은 왠지 숙연함도 느껴지는 것이었지요.


할아버지의 시계수리 인생은 참으로 드라마틱 합니다. 듣다 보니 정말 소설속에서나 또는 드라마나 아니면 영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그런 삶이었습니다.

해방 전 함경북도 청진의 한 시계수리점에서 일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실력이 좋아서 소문이 나고 그 뛰어난 실력이 알려져 26세에 일본 유명 시계메이커인 세이코사의 스카웃 제의를 받았다고 합니다. 일하던 수리점 사장님의 배려로 일본 세이코사에서 근무하였다고 합니다

6개월 간 일본공장에서 시계조립 작업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조립만으로는 더 이상 시계기술이 발전이 없고 별 재미가 없어 식민지 시대의 조국으로 귀국하여 다시 시계수리를 하였다고 합니다. 해방 전에는 중국에서 8년 간의 생활을 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다시 함경북도 청진에서 시계수리 기술자로 생활을 하다가 해방 및 6.25동란와중 단신으로 월남 하였다고 합니다.


그 와중 북한에도 가족이 있어 두 명의 자식이 있고 현재는 남한에도 자식이 한명 있다고 합니다.

북쪽에 있는 가족은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었고 이산가족 만남이나 상봉 같은 것은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생각을 접은 지 오래되었답니다.

무슨 소설이나 드라마에서나 나올 거 같은 그런 사연을 담담하게 이야기 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에서는 세월을 초월한 한 사람의 회한이 느껴졌습니다. 가슴 아픈 한국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경험하면서 살아온 “이 나라의 역사의 증인 같은 할아버지” 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시계를 수리하는 기술에 있어서 자부심이 대단히 높은데 그 이유는 현재 할아버지와 같이 시계의 부품들을 직접 깎고 만들어서 수리하는 기술자는 거의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시계 부품을 깎는 작은 선반이고 뒷면의 작은 동그란 기구들이 절삭용 날이라고 합니다. 저것으로 시계부속을 깎고 다듬는 것이지요

시계수리 기술에 대한 대우가 좋은 시절에는 할아버지께 시계수리기술을 배우고자 제자로 들어오겠다는 사람도 많았다고 합니다. 할아버지에게 기술을 배운 제자들이 10여명이 넘는데, 지금은 뉴욕, 브라질 등 해외에서도 그 기술로 인정받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하지만 요즈음은 시계수리기술을 배우려는 사람이 없다고 하더군요. 시계는 수리해서 사용하는 기계가 아니라 고장나면 교체 해야하는 디지털기기라고 생각하는 시대라서 그런걸까요?


할아버지에게는 오래된 시계, 외국시계 등 다양한 시계수리가 여러가지 방편의 수소문을 통해서 수리 의뢰가 들어온다고 합니다.

한번은 미국에서 골동품 상을 하는 사람이 아주 오래된 시계를 가지고 찾아와 수리해간 적도 있다고 합니다.

미국 쪽에서 수리를 할 수 없어 여기 저기 수소문을 하다 할아버지 이야기를 듣고 한국까지 왔다고 했습니다.

정말로 다양한 시계를 수리하셨다고 합니다. 위 사진은 오래된 프랑스 시계로 수리를 맡긴 사람이 찾아가지 않아서 오랜 기간 보관 중이라고 했습니다.


할아버지의 시계수리 작업대도 긴 세월 할아버지와 함께 늙어온 듯 세월의 흔적이 가득합니다.

40년 이상을 같이 해온 이 책상은 할아버지가 직접 달아 넣은 구슬들이 앙증스럽게 박혀 있습니다. 손잡이들이 전부 구슬로 바뀌었어도 책상은 여전히 튼튼한 자태로 할아버지와 같은 길을 가고 있습니다.

97세의 나이가 믿어지지 않게 정정한 모습으로 경기도 성남에서 서울 남대문까지 일요일만 쉬고 매일 출근하여 떨리지 않는 손으로 시계를 수리하는 모습은 그 주인을 닮은 야무진 작은 선반의 모습과 오랜 세월이 지나도 그 역할을 다하는 할아버지의 책상처럼 단단해 보입니다.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정정한 모습에 놀라고 그 나이에 안경과 보조확대경만으로 작업을 하는 손에 떨림도 없이 작은 시계나사를 조립하는 모습은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모습입니다.

그 절반의 나이까지만이라도 일을 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요즘 세상에서 할아버지는 마치 다른 세상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할아버지의 소원이 있다면 죽는 날까지 건강하게 일을 하는 것이라 하십니다. 꼭 그러실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계를 고쳐서 쓰는 사람이 많지 않고 더군다나 전자 시계는 고쳐서 쓰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합니다.


오래된 기계식 시계나 사연이 있는 시계, 유품으로 간직하는 시계, 골동품 또는 값으로 따지기 어려운 그런 유서 깊은 시계 등이 할아버지의 손을 통해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지요. 고장 났던 20년도 더 된 필자의 시계도 수리해서 지금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

세월의 때를 벗겨내고, 다시 도금과 연마 작업 그리고 차디찬 기계에 생명을 불어넣어 화려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 시계의 모습들은 이제는 또 하나의 사라져가는 한가지가 되었습니다.


과거 시계수리 기술로 좋은 대우를 받는 날도 있었지만, 지금은 잊혀져 가는 기술로 오직 시계수리만을 70년을 일해온 할아버지는 오늘도 창문이 없는 작은 방에서 재생기술자와 시계를 수리하고 점심을 먹고 하루 한잔의 커피로 휴식을 취하고 또 시계를 수리합니다. 그나마도 요즘은 일이 많이 줄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잃어 버리는 것, 없어지는 것이 바람직한 것일 수도 있지만 살아가면서 느낄 수 있는 그런 진한 삶의 향기가 묻어나는 것은 십여 년의 세월이 지나면 할아버지 같은 사람은 볼 수 없게 되지 않을 까 하는 그런 아쉬움이 남는 것은 나만의 느낌일는지…


언제 꺼질지 모르는 할아버지 작업대 밑의 작은 전기 난로의 불빛이 유난히도 밝고 따뜻해 보이는 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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