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 광활한 대지, 그리고 별 헤는 밤
글·박진호|대한석유협회 대외협력팀 과장
몽골 여행은 개인적으로 세번째 해외여행이다. 처음은 태국으로 신혼여행을 갔었고 두번째는 유럽(프랑스, 스페인)이었다. 해외여행이 보편화되면서 동남아나 유럽 지역 여행객이 늘어 이러한 곳들은 이제 그리 낯설지 않은 ‘흔한’ 여행지가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몽골은 그렇지 않다. 동남아, 유럽, 일본, 중국 등에 비해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직은 많이 접하지 않은 일종의 ‘블루오션’이라고도 할 수 있다. 협회내에서도 ‘좋은 곳에 간다’, ‘몽골은 유럽이나 미국 가는 것 보다 더 어렵다’라며 부러워했다. 그렇지만 나는 직장 동료들의 부러움을 살 만한 색다른 경험으로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일단 몽골이라는 곳이 우리가 흔히 가는 곳이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사전에 받아 본 일정별 여행 코스와 ‘완수해야 할 몇몇 프로그램’을 보니 약간은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사막트래킹, 화산분화구 관찰… 사실, 여행 가기 일주일 전 축구를 하다 오른 쪽 무릎이 다쳐 치료를 받던 중이라 이러한 일정들은 ‘부상자’인 입장에서 과연 소화할 수 있을까, 전체 일정에 차질을 주는 것은 아닐까라는 걱정이 앞선 것이 사실이었다. 하여간 여전히 치료가 덜 된 다리로 7일 새벽 몽골의 울란바타르 공항에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공항 밖으로 나오니 새벽 4시 정도였는데도 우리나라의 액셀 중고차를 수입해 만든 택시들이 즐비하게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와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동남아 처럼 여기서도 한국 중고차들의 인기가 대단하다고 한다.
칠흑같이 어두운 새벽, 우리는 첫 코스인 바양고비로 가기 위해 아시아 자동차의 25인승 중고 버스에 올랐다. 포장도로라곤 하지만 군데군데 움푹 패인 구덩이들을 이리 저리 피해가느라 운전기사는 거의 곡예운전을 했고 나는 ‘집에 온전히 돌아갈 수 있을까’, ‘가족들을 다시 못 보는 건 아닐까’라는 걱정이 앞섰다. 옆 사람 얼굴을 보니 내 얼굴 표정을 금새 읽을 수 있었다. 어느 새 아침이 되었고 비몽사몽간에 차에서 내려 광활한 몽골 대평원의 대지를 밟고 100% 무공해 공기도 한껏 들이 마셨다.
첫 도착지는 바양고비 캠프. 캠프는 관광객들을 위해 현대식으로 개량된 게르(몽골 전통 이동식 가옥)와 식당, 샤워장이 갖추어져 있었다. 그곳에 가서 안 사실이지만, 몽골은 이미 유럽이나 미국, 일본 등 외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 거의 모든 관광지의 캠프들이 모두 현대화되어 있었다.
첫 공식 일정은 캠프 근처의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는 지역이었다.- 사막이라면 몽골 남부에 고비사막이 있지만 너무 멀어 비행기로 가야하기 때문에 일정에는 들어 있지 않았다.-폭 200여 미터, 길이 40km의 사막화 지역이었다. TV로만 보던 사막화 지역을 직접 가 보니 몽골의 사막화의 심각성과 사막화 방지를 위한 국제 협력이 절실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캠프로 돌아와 몽골에서는 명절 등에 먹는다는 고급 요리인 양고기를 저녁으로 먹었다. 특유의 냄새가 나긴 했지만 직접 먹어보니 고소하고 육질이 쫄깃쫄깃하고 맛있었다.
이튿날 다음 코스인 차강노르로 가는 중간에 평원 위에 우뚝 솟은 타이하르라는 거대한 바위에 들렀다. 이 바위에 얽힌 전설이 있는데, 옛날 이 지역에 머리가 셋 달린 뱀이 자주 출몰해 마을 사람들을 괴롭혔다고 한다. 어느 날 이 뱀이 땅 속의 구멍으로 들어가고 이 때 한 여인이 큰 바위를 갖고 와 구멍을 막았다고 한다. 그 이후 마을은 평화를 되찾았다고 한다. 그때부터 이 바위는 마을 사람들이 복을 비는 신성한 장소가 되었고 지금은 관광코스의 하나가 되었다.
차강노르로 가는 도중에 현지 주민이 모여 사는 마을에 들렀다. 외국인들의 갑작스런 방문에도 할머니와 가족들은 우리 일행을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현지 주민이 사는 게르에 들어가 집 내부 구조와 살림 살이를 둘러보고 또 직접 만들어 먹는다는 치즈 등의 간식 등을 먹으며 주민들과 얘기를 나누고 사진도 찍었다. 단편적이나마 유목민의 생활을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게르 안에 들어가면 가운데에 기둥이 2개 있는데 우리 일행 중 한 사람이 기둥 사이를 통해 안 쪽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본 주인 할머니가 소스라치게 놀라 이유를 물어보니 기둥은 각각 아버지와 어머니를 상징하는 것으로 외부인이 그 곳을 통과하면 그 가정을 파탄시키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옆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게르 안에는 우리나라 시골 집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사진액자가 걸려 있었다. 그 안에는 대통령 사진과 일가 친척들 사진이 걸려있었다. 특이한 것은 옷장에 붙어 있는 가수 장나라 사진이었다. 중국 못 지 않은 몽골의 한류 열풍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수건이 귀하다고 해 새 수건을 주인 할머니에게 드렸더니 할머니가 고맙다고 하며 마유주(馬乳酒)를 주었다. 말로만 듣던 마유주. 시큼한 첫 맛, 구수한 끝 맛, 그리고 다음 잔을 부르는 달콤한 끝맛 우리의 막걸리와 비슷한 술로 맛이 좋고 독특해 이후 일정 내내 마유주를 즐겨 마셨다.
14시간의 강행군을 견디며 차강노르에 밤 늦게 도착했다. 차강노르는 거리가 멀어서 그런지 현지 가이드도 처음 와 볼 정도로 관광객들이 많이 가 보지 못한 곳이라고 했다. 다음 날 아침 호르고올 화산을 올랐다. 올라가보니 폭과 깊이가 족히 200m 쯤 되어 보이는 휴화산이었다. 120만년 전에 폭발했다고 하는 이곳 화산은 근처의 30여개 군소 분화구 중 제일 큰 곳이라고 한다. 정상에서 뒤를 돌아보니 넓은 평원과 그에 연해 있는 산들이 전부 시커먼 화산재와 돌로 뒤덥혀 있었다. 그 당시 얼마나 폭발이 컸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다음 날 쳉헤르 온천에서 닦아도 닦아도 비누기가 가시지 않는 미끌미끌한 온천물로 샤워를 하고 야생마 등 각종 야생동물로 유명한 호스테이 국립공원으로 향했다. 호스테이에서의 밤은 이번 일정에서 가장 잊지 못할 하이라이트, 백미 그 자체였다. 어릴 적 부르던 동요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바로 그 은하수를 보게 된 것이다. 수 없이 많은 크고 작은 별들이 마치 구름처럼 큰 띠를 이루며 하늘을 뒤 덥고 있었다. 그 날은 마침 오작교에서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칠월칠석.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그 주변 별들 중 가장 빛이 밝은 견우성과 직녀성, 그리고 그 사이의 오작교. 국자 모양의 북두칠성 6번과 7번을 직선으로 이으면 나오는 북극성, 그 옆의 카시오페아, 그리고 책에서만 보던 각종 별자리. 일행 중에 특히 별자리에 관심이 많으신 과학선생님의 자세한 설명을 들으며 우리 일행은 하늘에 펼쳐진 수많은 별들과 수시로 떨어지는 별똥별을 보며 소원 비느라 밤새는 줄 모르고 앞으로 언제 또 다시 보게 될 지 기약할 수 없는 광경을 만끽했다.
어느덧 몽골 초원에서의 일정이 끝나고 다음 날 우린 몽골의 수도인 울란바타르 시내에 있는 북한식당에 가서 북한에서 파견된 요리사가 만든 평양냉면과 함흥냉면, 김밤, 그리고 북한술을 먹었다. 처음 먹어보는 북한음식과 술, 여기에 종업원이 노래방 기계 반주에 맞춰 ‘반갑습니다’를 합창으로 불러주어 분위기는 한껏 올랐다. 일행 중 한 분이 아침이슬을 신청해 같이 어울려 부를 때는 ‘아, 이리도 잘 어울리는 한 민족인데, 뭣 때문에 우리는 60년이나 갈라져서 살고 있는지…
일정 마지막 날 울란바타르 시내 여러 곳을 들렀는데 그 중 독립운동가이자 의사인 이태준 박사기념공원이 기억에 남는다. 그곳에서 이번 여행의 주관 기관인 시민정보네트워크가 심어 놓은 나무들을 짧은 시간이나마 돌보며 이번 생태투어의 테마인 몽골 지역의 사막화 방지를 위한 국제공동협력의 필요성을 절감할 수 있었다.
드디어 귀국을 위해 울란바타르 공항에 도착했다. 첫날 새벽 도착한 이후로 좋지 않은 도로사정 등으로 이동시간이 길어 고생하며 다녔던 일들, 일행들과 같이 즐겼던 시간들, 맛있는 몽골 음식, 끝 없이 펼쳐진 광활한 대지, 수많은 별들, 친절하고 다정한 몽골 할머니와 그 가족들 그리고 동생 같은 가이드 부부와 형님 같은 버스기사에 대한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흘렀다.
한국 남자 평균 나이가 73세라는데, 내 나이 37세, 인생의 반환점. 반환점을 지금 막 돌고 나머지 여정을 새로운 마음 가짐으로 준비해야 하는 지금… 몽골에서 보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지만, 아마 이번 여행은 내 인생 중에서 가장 의미 있는 재충전의 시기로 소중히 기억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