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향분석>
이라크 선거이후 중동의 변화
대한석유협회 기획관리팀
이라크 선거 성공적으로 평가
부시 미국대통령이 이라크전에서 승리를 선언한 2003년 5월 1일로부터 어느덧 2년이 경과하였다. 그러나 승리선언 후에도 외국인테러리스트집단, 舊바스당의 군인, 수니파의 과격파집단등 반미세력에 의한 미군에 대한 공격이 계속되어 내전상태에 빠졌다. 주요전투에서는 100명에도 미치지 않했던 미군의 전사자가 1,000명을 넘도록 심각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현재는 상당히 진정되었지만, 산발적인 공격은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
그래도 복구와 ‘신생이라크’에의 발걸음은 착실히 진행되고 있다. 2004년 3월에는 이라크기본법(잠정헌법)이 조인되었고, 6월에는 잠정정부가 발족되었으며. 미군은 주권을 위양하고 이라크통치의 전면에서 물러났다. 2005년 1월 30일에는 국민의회선거가 실시되었다. 선거를 방해하여 중단시키려고 하는 테러리스트, 반체제파의 공격은 극렬하였다. ‘선거에서 투표하는 자는 미군에의 협력자로 간주하여 공격한다’고 반체제파는 선언하였다.
선거당일에는 반대세력이 전국에 걸쳐서 공격을 전개, 평시의 4배를 상회하는 260회의 기록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전국 5,300개소의 투표소에 100여건에 달하는 공격이 가해졌다. 희생자는 선거당일에만 적어도 이라크시민 26명, 이라크군 8명, 영국군관계자 10명, 미군 1명등 약 45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러한 가혹한 환경 하에서 치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선거는 대성공이었다. 이얀드 알라웨이 잠정수상은 ‘최고의 날’이었다고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이른 아침부터 민중이 속속 투표소에 몰려들어 장사진을 쳤다. 투표한 사람은 2중투표를 방지하기 위하여 자색의 잉크로 손가락을 물들였으며, 그 손가락을 자랑하여 보이는 사람도 많았다. 그 때문에 이번 선거를 ‘자색의 혁명’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수니파는 선거에 반대하였다. 테러가 극심했던 라마데이, 팔루쟈, 사마라등에서는 투표가 없었다. 그러나 수니파의 삼각지대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바그다드, 모술등 수니파와 시아파가 혼재하고 있는 지역에서도 투표율은 예상보다 높았다.
선거의 성공에는 이라크의 보안부대가 탄생한 후 처음으로 동포를 위하여 투표소에서 진정한 선택을 하는 역사적인 기회라는 인식하에 드높은 사기로 치안확보에 각별한 노력을 경주한 것을 꼽고 있다. 투표용지가 부족한 투표소도 있었다. 그러나 자가도취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민중의 희망에 충만된 열광상태였으며, 투표준비의 미비에 불만을 토하는 사람은 없었다. 투표율은 약 60%에 달했다. 미영양국은 물론 중동이나 유럽등 세계가 예상외의 호응과 성공에 놀랐다.
선거 결과(투표일로부터 2주후의 속보)는 별표와 같다. 이라크국민의 다수파인 시아파는 각파가 ‘통일이라크연합’이라고 부르는 정당연합을 조직하여 선거에 임하였다. 그 결과 총투표수 801만표의 약 51%인 407만표를 획득하여, 총의석수 275석의 과반수인 140석을 확보하였다. 2위는 쿠르드족의 2대정당인 쿠르드애국동맹과 쿠르드민주당이 주축이 된 ‘쿠르디스탄동맹’이며, 이라크북부를 석권하여 217만표, 27%를 확보하였다. 3위는 종파에 소속되지 않은 世俗系로 알라웨이수상파인 ‘이라크인의 리스트’가 116만표, 약15%를 획득하여 40석을 확보하였다. 4위는 가지 알 야우르대통령계의 수니파정당인 ‘이라크인’이 15만표, 1.9%로 5석을 확보하였다. 수니파는 무장세력의 투표방해외에 성직자집단인 이스람. 스카라즈.포드가 신정권의 위법성을 주장하였으나, 그 호소력은 선거에는 전혀 효과가 없어 전술적으로 큰 실패였다.
국민회의는 중요한 결의의 채택은 3분의 2의 다수결이지만, 1당 단독으로 3분의2의 의석을 차지한 정당이 없다. 시아파의 통일이라크연합과 쿠르드족의 쿠르디스탄동맹이 연립정권을 수립하게 되었다. 정권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국민회의에서 우선 대통령과 2명의 부통령을 선임하여 대통령府를 수립하게 된다. 이들 3인이 수상을 추천하고, 수상이 각료를 임명한다. 선거종료이후 각당의 교섭과 흥정이 수면하에서 진행되었다.
시아파와 쿠르드족의 연립은 기본적인 합의가 이루어 졌으나, 키르쿠크유전이 있는 쿠르지스탄지방을 쿠르드족의 領域에 넣는 문제가 최대의 교섭과제였다. 동지방의 수도인 키르쿠크는 쿠르드족, 수니파, 시아파가 각각 자신들의 몫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담 후세인시대에는 쿠르지스탄을 이라크인의 토지로 하기 위하여 거주하고 있던 쿠르드인을 북방의 크르드지역으로 추방하고, 아랍인을 거주시켰던 등의 문제도 있어, 간단히 해결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일단 후일로 미루기로 결정되었다. 2004년 정권위양을 한 잠정헌법에서도 키르쿠크지역의 최종적인 귀속은 주민의 의사를 고려하여 결정한다고 되어있다. 그 실시는 항구적인 헌법이 비준될 때까지 연기하기로 하였다.
이라크의 선거결과
정 당 명 득표수 득표율 의석수 통일이라크연합(시아파정당연합) 4,075,295 50.87 140 쿠르디스탄동맹(쿠르드족) 2,175,551 27.16 75 이라크인의 리스트(아라웨이수상파) 1,168,943 14.59 40 이라크인(야우르대통령파) 150,680 1.88 5 도르크멘 이라크전선(도르크멘세력) 93,480 1.17 3 독립국민군간부.정예집단(사도루師系) 69,938 0.87 3 이스람.쿠르드협회 60,592 0.76 2 이라크.이스람노동운동 43,205 0.54 2 국민동맹(공산당) 69,920 0.87 2 내셔널.앗시리아인연합 36,255 0.45 1 내셔널민주연합 36,795 0.46 1 화해와 해방 30,796 0.38 1 합계 8,011,450 100.00 275
3월 16일에 총선거후 최초의 국민의회가 개최되고, 29일, 4월 3일, 7일의 4회에 걸친 협의에서 신정권의 인사가 결정되었다. 대통령은 쿠르지스탄동맹에서 쿠르드애국동맹을 이끌고 있는 쟈랄 탈라바니씨, 2명의 부통령에는 시아파. 통일이라크동맹의 아지르 압둘 마하디씨, 수니파의 이라크인을 이끌고 있는 가지 야와르씨가 취임하였다. 국민회의 의장은 수니파의 하팀 하사니씨로 결정되었다. 수상은 시아파의 다와당을 주도하고 있는 이브라힘 알 쟈하리씨가 지명되었다. 각파의 세력균형에 신경을 쓴 구성이었다.
각료직의 배분에 대해서는 이라크경제와 재정의 요체를 갖고 있는 석유상의 인사가 주목되고 있다. 수니파는 강경파가 무장해제하고 시민생활에 복귀하고 있으나, 향후의 보복재판, 기소등을 우려하고 있으며, 사면교섭을 위하여 국방상과 내무상직을 희망하고 있다. 선거가 끝난후 2개월여가 걸려 드디어 의회와 정부의 수뇌인사가 결정되었다. 시간이 너무 걸렸다는 비판도 있다. 수니파가 선거에 입후보도 하지 않고 투표도 하지 않아, 의회에 의원이나 대표가 적어, 교섭에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또한 많은 부족이나 종파가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고, 민주정치의 운영은 첫경험인점 등을 고려하면 시간이 걸린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향후에는 8월 15일에 항구헌법의 起草, 10월 15일에 헌법채택의 국민투표, 12월 15일에 신헌법에 의한 총선거, 12월말에 본격정부발족이라는 일정이 잡혀있다. 최근에는 치안도 상당히 안정되고 있다. 미군에 따르면, 반대파세력의 무력공격은 선거전 수개월의 1일평균 70회에서 최근에는 40~50회로 감소하였다고 한다.
이웃 중동국가에 새바람
이라크국민의회선거의 성공은 중동제국에 바람직한 파문을 확산시키고 있다. 이라크국민이 테러리스트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투표에 임하여,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려는 열의에 불타는 모습은 아랍의 민중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것이 중동각국에서 다양한 민중의 움직임으로 연결되어 나타나고 있다. 위정자도 이를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오히려 가능한 한 국민의 요망에 부응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현저하다. 중동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 레바논
레바논은 인구 360만명의 소국이지만, 남부가 이스라엘북부와 국경을 접하고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에의 前線基地로서 PLO(팔레스틴해방기구)가 1970년대부터 세력을 증대시켰다. 이스라엘은 국경을 넘어 PLO에 대한 공격을 반복하였다. PLO와 마로나이드派 그리스도교도, 무슬림 세력등 3개파의 무력항쟁이 계속되었다. 1976년에는 시리아의 독재자 하에즈 아사드 장군이 군대를 보내 개입하였다. 이스라엘은 1970년대 후반부터 레바논 무장 세력을 육성하여, 레바논남부 국경지대를 점령하고 1982년에는 베이루트 이남의 PLO세력을 몰아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레바논의 시아파 원리주의세력 히즈볼라 나 드루즈派의 아말이 이스라엘군으로부터의 해방을 내건 무력항쟁을 일상적으로 계속하였다.
1996년 이스라엘은 북부주민에 대한 히즈볼라의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서 레바논전국토로 공격을 확대하였다. 미국과 프랑스의 중재로 양국과 레바논, 시리아, 히즈볼라, 이스라엘이 停戰에 합의하고, 정전감시기구가 설치되었다. 레바논 정부군 외에 UN군 8천명과 시리아군을 主体로 한 아랍평화유지군 3만명이 주둔하였다. 이스라엘군은 남부레바논의 점령지에 주둔하고 있었으나, 2000년 6월에 철수를 완료하였으며, 이스라엘이 육성한 南레바논軍은 해산되었다. 레바논 측의 각종파의 民兵도 무장 해제되고, 히즈볼라 이외는 실질적으로 해체되었다. 시리아군은 수도 베이루트주변에서는 철수하였으나, 1만4천명을 잔류시켜 레바논에 계속 주둔토록 하였다.
2004년 2월 전후복구를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시리아군의 완전철수를 요구해 온 라피크 하리리 전수상이 암살되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민중의 데모가 잇따르게 되었다. 지난 3월 14일에는 80만명의 민중이 참가한 반시리아 집회가 개최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데모의 압력으로 친 시리아派의 카라미 내각이 사직하고, 시리아도 아사드 장군이 레바논에서 군을 철수하겠다고 발표하기에 이르렀고, 4월말까지 철병키로 하였다.
시리아군의 개입은 레바논내전을 종식시키고, 이스라엘의 레바논남부점령에 대한 저항을 지원한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철수한 후에도 5년이나 주둔한 것은 레바논국민에게는 주권침해로 받아 들여 지게 되었다.
외국군의 장기주둔은 정치적인 폐해도 초래하였다. 주둔군과 결탁한 汚職,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압박, 재판의 왜곡 등이 발생하였다. 레바논에서도 이라크의 민중에 용기를 얻어 국민이 궐기하여 시리아군 철수라고 하는 오랜 기간의 悲願을 성취하였다. 그러나 시리아군의 주둔이 길었으므로, 철수에 따른 혼란도 발생하였다. 조만간 총선거를 실시하지만, 정세가 진정되기 까지는 얼마간 시간이 걸릴 것이다.
● 사우디아라비아
선거가 국민들에게 큰 기쁨을 주고 있는 곳이 사우디아라비아이다. 사우디에서는 오래 동안 강력한 절대왕정이 계속되어 왔다. 정치에 민중의 목소리를 반영시키는 것이 국민들의 오랜 희망이었다. 그것이 드디어 약간이나마 이루어지게 되었다.
사우디는 지방평의회 위원의 절반을 선거로 뽑도록 하였으며, 지난 2월 10일 수도 리야드圈內의 투표로부터 개시되었으며, 지난 3월 3일에는 사우디 동부와 남부에서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슬람교의 성지 메카와 메디나를 포함한 서부와 북부는 4월 20일에 투표하였다.
투표는 21세 이상의 남성으로 제한하고 있다. 당초에는 意義를 의문시하던 국민들도 선거가 가까이 다가오면서 열기가 높아졌다. 리야드지구에서는 7개의 의석에 700명이 입후보하였으며, 투표율이 80%를 넘는 地區도 있는 등 민중의 관심이 높았다. 선거에서 자신들의 대표를 선택하는 것은 사우디국민들의 갈망이었던 만큼, 제한이 많았는데도 처음 선거에 국민의 기대가 부풀었다.
사우디 국민들에 의해 환영받고 있는 것은 테러대책의 성공이다. 2003년 5월 200명이상의 생명을 앗아간 대 폭발 테러이후 사우디는 수차례나 테러를 당했다. 2004년 12월에도 알 카에다가 젯다의 미국영사관을 공격하였다. 사우디정부는 미국과 프랑스의 치안전문가를 초빙하여, 종적협력관계가 충분하지 않았던 정부각부처가 정보를 공유하게 되었다. 그 결과 테러리스트의 체포 및 殺害率이 크게 높아졌다. 테러리스트의 자금원을 끊기 위하여 이슬람자선단체의 기부금규제를 엄격히 하고, 종교지도자의 과격한 연설이나 설교도 엄하게 단속하고 있다.
원유가격의 상승으로 경기가 좋은 점도 국민의 불만을 완화시키는데 기여하고 있다. 2004년은 ‘사우디의 역사상 최고의 해’였다고 불리고 있는 가운데, 석유수출수입이 300억달러 증가하여 株價가 86%나 상승하였다.
그러나 여성에 대한 통제는 아직 엄격하다. 여성의 자동차운전을 인정하라고 하는 목소리도 강하다. 2005년 초 외무성이 여성 직원 36명의 채용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여직원의 채용은 사우디에서는 여전히 여성의 지위가 억압받고 있다는 국제적 비판을 완화할 목적도 있었던 것 같다. 선거의 조직과 운영에 관계하고 있는 왕족가운데에는 ‘사우디는 이제야 민주주의를 실천하기 위한 시스템과 前例를 습득하였다’고 평가하는 목소리도 있다.
● 이집트
이집트의 무바라크대통령은 1981년에 암살된 사다트 대통령의 뒤를 이어 권좌에 올랐으므로, 이미 18년간 집권한 셈이며 나이도 77세가 되었다. 국민들 간에도 교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국민들의 목소리에 대응하여 대통령후보의 선출방법을 개선할 계획이다. 의회에 제출된 헌법개정안에 따르면, 대통령후보자는 정규의 정당에 의한 추천이 필요하다.
1953년 구테타로 王制가 무너지고, 공화제가 된 이후 실질적으로 일당지배이다. 무바라크대통령의 국민민주당이외에는 후보자를 추천할 수 없었다. 그것을 복수입후보제로 바꾸려는 것이다. 그러나 장기간 독재로 유력한 후보자가 도태되어 버렸다. 무바라크 대통령 외에 입후보하여, 당선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무바라크 대통령은 행정권한도, 재선될 수 있는 권한도 양보할 생각이 없는 것이다. 외양만의 개혁이지만, 그나마 이라크의 선거나 국민의 목소리에 떠밀려 시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도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1991년 현부시대통령의 부친인 전부시대통령의 중재로 이루어진 오슬로합의에서 이스라엘은 팔레스티나의 점령지, 요르단 강 西岸과 가자지구를 순차적으로 반환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 약속은 과거 15년간의 우여곡절에 퇴색하여 빛을 잃어버렸다. 2001년에는 클린턴대통령의 중재로 이스라엘과 알라파트 팔레스타인 정부(PA)대표가 모든 폭력을 중단하는 캠프 데이비드 합의를 하였으나, 이것도 깨져 버렸다. 그리고 제2차 인티파다(팔레스티나민중의 봉기; 投石에 의한 저항운동)가 발생, 지난 4년간 3천명이상의 팔레스타인 인들과 이스라엘 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2004년 말에 아라파트 PA의장이 사망하고, 2005년 1월의 선거에서 마무드 아바스 수상이 선출되었다. 금년 2월 상순 이집트의 휴양지 샤룸 엘 셰이크에서 이스라엘의 샤론수상과 PA의 마무드 아바스수상이 회담을 가졌다. 샤론수상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모두 모든 폭력을 중단할 것을 제안하였다. 아바스수상도 인티파다를 중단하기로 약소하였다.
샤론수상은 이스라엘은 2005년 말까지 가자지구에서 7,000명의 이스라엘주민 및 경비대를 전부 철수하고, 100만명의 팔레스타인 인을 점령하에서 해방시킨다고 선언하였다. 또한 요르단 강 서안지구의 팔레스티나인의 밭이나 부락을 엄격하게 통제하던 경비를 완화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실천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측은 하마스와 이슬람 지하드 등의 무장세력에 공격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팔레스타인 측도 부시정권이 제시한 ‘로드맵’(중동평화를 위한 기본계획)에 의거, 테러리스트조직의 무장해제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스라엘 국내에는 반대도 있어, 국민투표의 실시나 의회의 해산, 총선거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2005년 3월말에 이스라엘 정부의 금년도 예산이 승인되어, 철수의 시비를 묻는 국민투표 실시도 부결되었다. 샤론수상은 의회에서 재신임을 받아, 철수가 확실하게 되었다. 향후에는 국경선의 확정 등 和平의 구체적, 실무적 교섭에 들어가게 된다.
이러한 배경에는 미국의 압력과 지원이 있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곤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은 가자지구 등의 복구에 필요한 자금을 공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은 팔레스타인 국가의 성립을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의 장기간 약속인 入植地의 동결을 더욱 압박해 나갈 필요가 있다. 어쨌든 부시대통령의 중동평화구상, 즉 로드맵이 작동되기 시작하였다.
보리국가들을 얕보게 되었다. 그에 돌파구를 연 것이 부시정권의 이라크전쟁이며, 그 결과는 이미 앞장에서 설명한대로 이다.
다음은 사우디 아라비아이다. 제2차대전에 연합국은 70억배럴의 석유를 소비하였으며, 이중 60억배럴은 미국이 공급하였다. 이정도의 대량의 석유를 공급하게 되면, 미국의 석유안전보장이 위험에 처하지 않을 까하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당시 루즈벨트대통령은 미국의 석유매장량감소와 안전보장의 관계를 포괄적으로 연구시켰다. 1944년 4월 루즈벨트정권은 ‘미국은 東半球의 공급원(주로 중동)에서 대폭적인 증산을 촉진하고, 西半球의 석유를 溫存하는 폭넓은 정책이 필요’하다는 합의에 도달하였다.
루즈벨트대통령은 1945년 2월4일 연합국수뇌가 제2차대전의 전후처리를 결정한 얄타회담후에 사우디의 이븐 사우드국왕과 회담하였다. 회담은 5시간반동안 지속되었으나, 통역이외에 아무도 배석하지 않았고 기록도 전혀 남기지 않았다. 이 회담에서 미국과 사우디 아라비아의 동맹이 성립되었으며, 미국은 사우디의 다란에 대규모 공군기지를 건설, 사우디의 독립과 주권을 지켜왔다. 반면, 사우디는 미국기업이 사우디의 유전을 독점적으로 지배하는 것을 승인하였다고 한다.
미국과의 동맹에 의하여 사우디는 방대한 석유자원을 개발하여, 세계제일의 석유생산량을 보유하고, 풍부한 石油收入으로 국민의 복지를 최대한도로 향상시켜 왔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고도의 복지수준을 배경으로 한 사우디왕실의 폐쇠적이고 억압적인 정치에 국민들이 강한 불만을 품고 반발하게 되어, 사우디왕실의 위기설까지 흘러나오게 되었다. 젊은이들이 체제에 대하여 테러행위로 도전하게 까지 되었다. 사우디王制의 불안정화를 우려한 미국은 전부터 정치개혁을 요구하여 왔다. 그것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것이 지방평의회 위원선거이다.
이라크에서와 같이 사우디에서도 개혁이 궤도를 타고 민주주의가 정착하는 데에는 아직도 시간이 더 걸릴 것이다. 그러나 부시정권의 ‘중동에 민주주의를’이라는 정책은 이윽고 서광이 보이게 되었다.
(순간 석유정책 2005. 5.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