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칼럼>

에너지 백년대계를 도모할 때

손철_서울경제신문 경제부 기자

“역사는 아주 천천히 전진합니다. 한 달음에 앞으로 3보나 나갔다면 2보 반 뒤로 후퇴하는 것은 당연히 염두에 둬야 합니다. 3보 이상 뒷걸음질 칠 수도 있습니다.

국내 사학계의 저명 석학인 강만길 전 고려대 교수가 2000 6·15 남북정상회담 직후 한 강연에서 밝힌 얘기다. 노 사학자의 조언은 하지만 당시 분위기에선 별 반 주목을 끌지 못했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에서 손을 맞잡고 함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열창할 때는 남북통일이 성큼 다가온 듯 했다. TV는 온 종일 정상회담 소식을 내보냈고 신문은 광고까지 내리며 양 정상의 만남을 도배하다시피 보도했다

정상회담 5주년이 가까워지는 지금 돌아보면 강 교수의 예상은 적중했다. 그의 말은 적중 여부를 따질 ‘예상’이 아닌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르겠다. 김 위원장의 답방은 오리무중이고 북핵을 둘러싼 남·북한과 미·중·일·러의 6자회담 마저 교착상태에 빠져 있다. 그나마 남·북 장관급 회담이 조만간 재개될 예정이어서 숨통을 튀워주고 있는 상황이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움직이는 모습은 에너지 부문에서도 예외는 아닌 듯 하다. 지난해부터 불어닥친 고유가 등 국제 원자재 가격 폭등은 해외 자원개발 열풍에 불을 당겼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해 하반기 중·남미, 동남아시아, 인도, 러시아 등 해외순방 일정의 대부분을 자원협력에 할애했다. SK, LG상사, 석유공사, 광업진흥공사 등 민·관이 브라질, 러시아, 베트남, 사하공화국 등에서 유·가스전 개발과 광물자원 개발에 활발히 나서며 정상 협력을 뒷받침했다.

산업자원부는 최근 ‘유전펀드’를 설립, 자원개발에 더 많은 민간자본을 끌어들이는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자원개발 열기와 에너지 확보의 중요성은 산업자원부에 ‘에너지담당 차관’을 두겠다는 정부 계획에서 절정을 맞고 있다. 과거 동력자원부 시절처럼 에너지 전담부처가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정부가 에너지를 국가적 대사로 분명히 인식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여서 다행스런 일이다.

‘에너지 아젠다’는 그러나 철도공사의 러시아 유전개발 실패와 정권 실세 연루의혹이 제기되자 순식간에 얼어붙어 버렸다. 해외자원 개발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요즘 극도로 말을 아낀다. 척박한 자원개발시장을 업으로 삼고 있는 이들은 IMF 외환위기 이후 오랜만에 찾아온 해외자원개발에 대한 관심이 채 1년도 못돼 자취를 감추지 않을 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자원개발 분야 뿐 아니라 에너지업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 상당수도 유전게이트로 가시방석 위에 앉은 느낌이라니 그 여파를 짐작할 수 있다.

소위 ‘유전게이트’로 불리는 이번 의혹의 초점은 다행히 에너지사업 자체에 대한 회의보다는 자원개발의 문외한인 철도공사가 용감하게(?) 뛰어든 배경에 맞춰졌다. 따라서 추진중인 국내·외 자원개발사업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일 것으로 보인다. 자연스럽게 해외 자원개발사업에서 전문성을 존중하는 경향도 강해질 듯 하다. 무엇보다 전쟁을 방불케 하는 세계적 자원확보 경쟁은 자원개발을 당분간 국가적 관심사항의 앞 순위에서 뒤로 밀리는 것을 지켜줄 것이다.

3보 이상 앞으로 내달은 에너지 이슈가 우발적 스캔들로 인해 2~3걸음 후퇴하며 물러서지는 않겠지만 업계 종사자들이 에너지업계의 적잖은 패러다임 변화를 인정하지 않고 변화에 발 맞추지 않는다면 상황은 다르다. 강력한 역풍에 4~5걸음 뒤 처지는 시련의 시기를 배제할 수 없다는 얘기다.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는 에너지 문제의 중요성을 감안하면 국가적으로 커다란 손실이자 불행이 아닐 수 없다.    

때문에 에너지업계 관계자들은 먼저 개발과 보존 사이에서 사회의 중심추가 이동하는 변화상을 냉철히 이해해야 한다. 개발과 경제논리 만으론 국내든 해외든 자원개발 사업에서 성공할 수 없다는 주장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겠으나 보호와 보존의 중요성을 개발과 같은 선상에 놓고 심각하게 고민하는 지는 여전히 의문이기 때문이다. 새만금사업 중단, 천성산 터널건설 중단, 18년째 겉도는 방폐장 터 선정 문제 등의 이면에 똬리를 틀고 있는 변화를 깊이 성찰하지 않으면 자원개발 및 에너지 사업도 비슷한 역경에 놓이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아 변화를 체감할 수 없다면 6월 임시국회에 재 상정될 ‘에너지기본법’을 살펴보자. 이름에서 나타나 듯 국내 에너지 관련법을 규정하고 해석하는 데 기본 지침을 수록한 이 법은 정부가 에너지정책의 최고 심의기구로 대통령을 위원장으로 하는 ‘국가에너지위원회’를 설치하도록 하고 있는 것이 골자다. 특히 위원회는 시민단체 대표 5인 이상을 위원으로 위촉해야만 한다. 대통령, 총리, 관련부처 장관 등 당연직 위원을 제외하면 학계, 재계 등 각 분야 가운데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가장 많다. “에너지정책에 여론을 최대한 반영하기 위한 것”이란 정부 관계자의 답변이 변화를 실감하게 한다.  

다만 국가 에너지 백년대계를 향해 준비된 ‘에너지기본법’이 일부 시민단체의 딴지로 국회 통과가 미뤄지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시민단체도 ‘에너지기본법’의 큰 틀과 세부내용 대부분에 공감하고 있어 더욱 그렇다. 국가에너지위원회의 독립성을 위해 사무처를 따로 두자는 시민단체의 주장은 일견 타당한 면이 있지만 민간 참여를 감안하더라도 사실상 정부조직 확대를 꾀하는 것이어서 문제가 있다. 자리 늘리기를 위해 조직을 확대하고 있다며 공공연히 공무원을 비판해 온 시민단체가 자가당착의 모순에 빠지는 셈이기도 하다. 범 국가차원에서 에너지문제를 다루기로 해놓고 에너지위원회 사무처와 정부부처가 중복적으로 일하며 혹은 충돌하는 사태가 빈번해 질 가능성도 높다.   

국가적 중책인 에너지문제의 최일선에 선 이들의 어려움과 책임감은 더욱 커지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조정과 협력을 통해 역경을 뚫고 사회의 발전과 단합을 동시에 이뤄내야 한다. 사소한 흠집내기와 이례적 스캔들로 국가대사가 흔들려서는 안되겠다.  

I hear, I forget/ I see, I remember/ I do, I understand.(듣는 것은 잊게 되고/ 보는 것은 기억하게 되나/ 행함으로써 알게 된다.) 건강하고 강한 나라를 만드는 개개인의 기본 자세는 동ㆍ서양을 막론하고 이견이 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