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보고서>

석유 무기화의 과거, 현재, 미래

대한석유협회 기획관리팀

“석유무기화’하면 의례 1973년 10월의 ‘석유수출금지’를 떠올린다. 하지만 근세 역사에 있어서 정치적 무기로서 석유를 이용한 사례는 여러 국가에서 수 많은 사례를 찾아 볼 수 있다. 미국은 역사적으로 어느 다른 국가보다도 빈번하게 석유금수조치를 취해왔다. 2차세계대전 직전 일본에 대하여, 그리고 1960년대에 구소련에 대하여, 또한 지난 20여년 기간동안에 남아프리카, 버어마, 세르비아, 하이티, 리비아, 이라크, 이란, 수단 등에 대한 석유금수조치 등이 그 사례이다.

주로 미국의 동맹국들인 아랍산유국들이 서방국가에 대하여 석유무기화를 사용한 것은 1956년, 1967년, 그리고 1973년의 일이다. 1967년과 1973년의 경우는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국가들에 대하여 대외 정책을 바꾸도록 압박함으로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1967년 전쟁 이후 장악하고 있는 점령지로부터 철수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비단 과거뿐만 아니라 비교적 최근인 2002년 3월에 팔레스타인 예닌 난민캠프에 무력 진입한 이스라엘군을 끌어내도록 서방국가들을 압력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이라크와 이란은 이슬람국가들에게 석유금수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한 바 있다. 보다
최근에도 일부 회교지도자들이 같은 목적으로 석유무기화 사용을 촉구한 바 있다. 현재 아랍국가들이 석유 무기화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공식 입장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중동의 반미정서는 미국에 대한 석유금수와 석유생산중단을 지지하는 분위기이다. 그러나 아랍에 어떠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날 지라도 공식입장에 변화를 가져와 석유무기화를 취할 것 같지는 않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1956년,1967년, 그리고 1973년의 석유 금수조치가 당초 목표를 달성하는데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왜 실패한 것일까? 왜 일부 아랍국가들은 석유무기화가 대상국가들을 굴복시키지 못할 것이라고 믿으면서도 석유무기화를 단행하는 것인가? 향후에도 산유국들은 석유무기화를 다시 사용할 것인가? 그렇다면 언제, 어떤 이유로 사용할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을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실패한 정책인 과거 세차레의 석유무기화 시도를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1956년 석유금수

1956년 이집트는 수에즈운하를 국유화하였다.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 대하여 보복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에 1년전 이집트와 안보협정을 체결한 사우디아라비아는 영국과 프랑스에 대하여 석유수출을 금지하였다. 하지만 생산량을 줄이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반면 이라크 유전지대로부터 지중해로 이어지는 이라크석유회사 소유의 송유관시스팀인 가압저유소 하나가 시리아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파괴되어 이라크로부터의 공급차질이 있을 뿐이었다.

전문가들은 이 석유금수는 상징적인 대응이었으며, 경제적 영향도 미미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 전쟁으로 수에즈운하는 1956년 11월부터 1957년 3월까지 패쇄되었으며, 이라크석유회사의 파이프라인 가압소는 9개월간 작동을 멈추었다. 그 결과 산유량은 2백만b/d 감소했는데, 이는 당시 세계 초과 생산능력에 미치지 못하는 규모였다. 미국은 유럽으로의 석유 공급을 늘리고, 석유메이저들도 유조선의 행선지를 재편하는 대응으로 결국 유가는 배럴당 25센트 상승에 그쳤다.

1967년 석유금수

1967년 개전시에 이스라엘 공군이 이집트의 군용비행장을 공습할 때 미국과 영국의 공군기들이 엄호를 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일부 아랍국들은 미국, 영국, 서독에 대하여 석유금수를 단행하였다. 석유금수의 대외적 명분은 아랍국과 전쟁을 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서방국들의 군사지원을 차단하고 응징하는 것이었다. 석유금수는 1967년 6월 4일부터 1967년 8월 29일까지 지속되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는 미국과 영국의 공군이 작전에 참여한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수 차례나 석유금수의 중지를 시도하였다. 만일 석유금수를 지속한다면 석유수입의 상당한 감소가 불가피하며, 경제재건과 군사력 증강에 차질을 빚을 것이라는 우려에서였다. 또한 석유금수를 해제함으로서 서방국들을 도와서 지역내에서 세력을 확대하는 공산주의자들을 억제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석유금수는 목적달성에 실패하였다. 서방국가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을 지속하였다. 또한 군사력의 균형을 역전시키거나 전쟁 패배후의 아랍의 명예를 회복하지도 못했다. 결국 대상국가들은 고통을 받지 않았으며, 석유금수에도 불구하고 아랍의 석유를 계속 공급받을 수 있었다. 다만 석유금수가 아니라 수에즈운하의 패쇄로 인해 석유가격이 약간 상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처럼 석유금수가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지 못한 데에는 몇개의 요인이 있었다. 참여하는 국가들이 산유량을 줄이지 않았고, 금수에 적극적이지도 않았으며, 금수기간이 대상국가들이 압박을 느낄만큼 충분히 길지도 않았다. 일부 전문가들은 석유금수가 아랍국가들의 대내용의 의도를 가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즉,국내 정치적인 문제들을 잠재우고, 시민소요를 포함한 대중의 분노를 흡수하여 아랍의 대의명분으로 단결하는 구심점을 제공하며, 극단주의자들에 의한 석유시설에 대한 테러의 구실을 제거하며, 아랍국내에서 조업중인 외국 석유회사에 대한 국유화 압력을 완화시키려는 다목적의 정치적인 고려인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1973년 석유금수

1967년 석유금수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아랍석유수출국기구(OAPEC)의 결성이었다. 석유금수의 관리 실패를 통감하고 아랍석유를 아랍 산유국의 정치적 동기를 지원하기 위해 이용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1968년 OAPEC을 출범시켰다. OPEC 회원국 모두가 아랍국가는 아니며, 아랍산유국 모두가 OPEC회원국은 아니다. 따라서 OPEC내 아랍국가들은 OPEC을 석유무기화의 무대로서 활용할 수가 없다. 더구나 OPEC은 경제기구로서 정치적 목적을 배제하고 있다.

그러나 정치적 기구로서 OAPEC은 1973년의 제1차 석유위기를 주도하게 된다. 따라서 1973년 10월의 석유금수는 OPEC의 작품이 아니다. 또한 이라크와 오만 등 일부 아랍국가가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범 아랍 석유금수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오늘날 OAPEC은 정치적 기구가 아니며, 석유의 생산과 유가 결정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강조하고 있다. 주요 목적은 아랍 회원국간의 기술적 협력을 꼽고 있다. 적어도 1974년 이후의 역사로서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1973년의 경우는 명백히 다르다. 1973년 10월 17일에 쿠웨이트에 모인 아랍의 석유 장관들은 “산유량을 5% 감축시키고 앞으로 매달 그 지난 달에 비해 5%씨 생산감축을 계속할 것이다. 이스라엘이 1967년 6월에 점령한 아랍영토에서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또한 팔레스타인 민족의 합법적 권리가 회복될 때까지 이 감축은 계속될 것이다”고 선언하였다 아울러 전쟁에서 이스라엘을 공공연히 지원했다는 이유를 들어 미국과 네덜란드에 대해 석유금수를 단행하였다.

1973년의 석유금수는 그 전의 두개의 석유금수와는 구별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첫째, 1956년과 1967년의 석유금수 시에는 미미한 유가상승이 있었던데 비해 1973년의 석유금수 조치 이후에는 유가가 4배 급등하였다.
둘째, 과거 두차례와 달리 금수조치 해제이후에도 유가가 하락하지 않았다.
셋째, 유가의 4배 급등으로 경제침체, 인플레이션, 실업증가를 초래하였다.
넷째, 산유국들은 전례없는 富의 이전을 향유하였으며,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환경변화를 경험하였다.

비록 석유금수가 세계 석유공급량의 5% 감소를 초래하고, 공식적으로는 1974년 3월에 종료됐지만, 금수조치의 유효한 지속기간이 2개월 남짓이었던데 비해 원유가격은 4배 급등하였다. 5% 공급감소가 4배의 가격 폭등을 가져온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또한 이론적으로는 석유금수 해제이후에 유가는 원래 수준으로 복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1973년 석유금수 종료 이후에도 유가는 금수조치 수준을 유지하였다. 4배나 되는 유가폭등이 오래 지속된 데에는 석유금수 외에도 몇 가지 다른 요인들이 작용하였다. 즉 이들 요인들이 상호 작용하여 정치적 무기화로서 석유금수의 성공적 임무수행을 가능케 한 것이다. 생산량 감축, 유용 재고량 급감, 동절기 직전의 금수 타이밍, 초과 생산능력의 부족, 초과 생산능력의 OAPEC 수 개국 집중화, 산유국에 있어서 정부 통제력의 증대, 미국의 산유량 감소, 미국의 중동 산 석유 수입의존도 증대, 유조선 부족 및 타이트한 수송 능력, 미국의 油井渡 가격 통제, 확장적 금융 정책, 인플레이션, 투기, 買占, 비축 등이 그것이다. 당시 일부 보고서들은 1990년대에 세계 석유 부족을 예견하였고, 이로 인해 투기, 買占, 비축 등이 촉발되었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닉슨 행정부에 의한 가격 통제가 미국의 휘발유 부족사태에 상당한 원인 제공을 한 것으로 믿고 있다. 유정도 가격 통제는 미국의 석유시장에 카오스적 혼돈을 초래하였다. 우선 ‘기존 오일’ ‘신규 오일’ ‘ 수입 오일’ 등으로 구별하고 차별적 룰을 적용하여 혼란을 야기하였다. 이것은 나아가 미국의 생산량 감소를 초래한 반면 미국의 석유 소비 및 수입 증가를 초래하여 결과적으로 세계 유가를 더욱 끌어올리는 역할을 하였다.

석유금수는 실패했는가?

몇몇 전문가들은 1973년의 석유금수 조치가 적어도 정치적 및 경제적으로 일부 성공을 거둔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아랍과 이스라엘 사이의 대립에서 이스라엘 편향적인 태도을 보이고 있는 미국, 일본, 일부 유럽 국가들의 대외 정책을 어느 정도 변화시켰다는 주장이다. 또한 아랍 산유국들의 국부를 증대시켜, 강력한 정부와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출 수 있도록 기여헀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다. 1973년의 석유금수 조치도 그 이전과 마찬가지로 당초 선언한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또한 경제적 이득도 단기간에 그쳤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석유금수는 1980년대 중반에 석유시장 붕괴를 초래하기도 했다. 석유금수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데 실패한 증거로서;

● 여전히 미국과 유럽이 이스라엘을 지원하며, 이스라엘이 아랍 영토를 점유하고 있다
● 서방 국가들은 OAPEC의 어떠한 요구에도 응하지 않았다. OAPEC 회원국들은

‘우호국가군’ 리스트에 포함되는 조건으로 서방국가 들에 대하여 이스라엘과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이스라엘과 모든 경제적 유대를 단절하고, 아랍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고, 미국이 대외 정책을 바꾸도록 압력을 행사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OAPEC은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이 이러한 요구 조건을 수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호국가군’의 지위를 부여하였다. 또한 12월 25일에는 일본이 상기 요구 조건 중 어느 것도 충족시키지 못했음에도 공식적으로 ‘우호국가군’ 으로 분류됐다. 일본은 댓가로서 차관 공여와 기술 제공을 약속했으나 결국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 현재 미국의 중동정책은 석유금수 조치 이전 부터 변하지 않고 지속돼왔다. 1973년 석유금수 이후 취해진 미국의 ‘왕복외교’ 는 중동에서 예상되는 초강대국간의 대결을 방지하기 위해 소련을 견제하고, NATO 회원국 들의 결속을 공고히 하기 위한 의도에서였다.

● 역사적 증거로서 1973년의 석유금수가 유럽과 일본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에 대한 비우호적인 외교정책을 취하도록 압박했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스페인, 일본 등에서 나온 친아랍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모든 공식적인 발언들은 실질적으로는 과거의 정책을 되풀이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재고할 것”이라는 일본의 표명이 있기는 하였지만, 일본의 정책은 오래 전부터 본질보다는 수사적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 일부 전문가들은 산유국과 소비국 과의 관계 개선의 원인을 산유국의 富의 증가에서 찾는다. 부의 증가는 모든 국가들에서 다양한 그룹들 사이의 대화를 활발하게 하기 때문이다. 향후 석유공급에 대한 관심보다는 부의 증가가 정책변경의 동인이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따라서 석유무기화가 명백히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은 “제재가 풍요를 가져왔다”라는 해괴한 사실에 기인한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 경제적 목표는 무시될 수 없다. OPEC회원국들은 1973년 10월 개전 수 일만에 그리고 석유금수 시행 수 일전에 석유공시가격을 일방적으로 70% 인상하였다. 역사적 사실로 볼 때 아랍 산유국들은 석유금수 이후에 대규모 수익증대를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경제적 이득은 길게 지속되지 못한다. 1980년대 중반까지 OPEC은 상당한 시장 셰어를 상실했으며, OPEC의 초과 공급능력 만큼 결손을 가져왔다. 전통적인 이론에 의하면 경제제재 조치는 목표에 대한 저항을 증대 시키며, 목표에 대한 주도자의 장래 경제적 레버리지를 상실케 한다. 미국과 동맹국들은 석유 수입원을 아랍 국가들로부터 세계 다른 지역으로 전환하고, 에너지 절약, 연료 대체, 그리고 국내 생산 증대 등을 통하여 석유금수 조치 와 향후 예상되는 석유금수의 영향을 최소화 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석유 수요는 감소하고, 아랍 산유국의 收入도 감소하였다. 1980년대 유가 하락 이전에도 OPEC의 석유 收入은 (2000년 달러화 기준) 1974년에 440 십억달러, 1976년에 380 십억달러, 그리고 1978년에 340 십억달러로 감소일로를 보였다. 미국 에너지정보국(EIA) 자료에 따르면 OPEC의 산유량도 1973년 이후 내리막길을 걸어 1977년에야 1973년 수준을 약간 상회하는 수준으로 회복할 수 있었다. <표-1>에는 석유금수 시에 주로 아랍 OPEC 국가들이 非 OPEC 국가들에게 시장셰어를 빼앗기는 상황을 보여 주고 있다.
비록 단기간이지만 산유국으로의 富의 이전은 오일달러로 서방국가들에게 재유입되었을 때 미국경제에 도움을 주었다. 서유럽과 일본의 무역수지가 악화되어 특히 1975년에 유럽 대부분이 무역적자로 돌아섰을 때 미국의 무역수지는 호전되었다. 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석유금수는 미국보다는 아랍국가들에게 고통을 가져다 주었다.

<표-1> OPEC 국가의 원유생산 변동 ( 1973년 9월 vs 11월)

 

생산량(b/d)

                 

 

    9

     11

b/d

     %

아랍 OPEC

 

 

 

 

사우디아라비아

8570

6268

-2302

-27

쿠웨이트

3526

2470

-1056

-30

리비아

2286

1766

-520

-23

이라크

2112

2148

+36

+2

UAE

1671

1308

-363

-22

알제리

1100

900

-200

-18

카타르

609

474

-135

-22

소 계

19874

15333

-4541

-23

非아랍 OPEC

 

 

 

 

이란

5828

6046

+218

+4

베네수엘라

3387

3380

-7

 -

나이지리아

2138

2238

+100

+5

인도네시아

1420

1450

+30

+1

소 계

12773

13114

+341

+3

      

32647

28447

-4200

-13


석유금수가 실패한 이유는 무엇인가?

경제제재의 목표가 순응을 강요할 때는 일반적으로 실패한다. 대상 국가들은 대부분의 경우 제재 순응을 모욕이나 주권 침해로 간주한다. 따라서 대상국가에 대한 압박은 즉각적으로 민족주의를 촉발시킨다. 그럼에도 산유국들은 국내 및 국제 정치에 있어서 자신들의 상징적 가치를 위해 석유금수를 활용한다. 석유 무기화는 아랍과 이스라엘간의 갈등에 의한 실질적 이슈를 미국의 자존과 존엄의 문제로 변질 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미국은 애국심과 내부 단결을 고취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으나, 아랍에 대한 조건부 항복의 정치적 리스크도 증대되었다. 닉슨 행정부가 아랍 산유국들에게 어떠한 것이든 양보를 한다면 상당한 후유증이 따를 것이었다. 의도된 것인지 아니면 우연인지 1973년에 유정도 가격 통제와 휘발유 부족사태가 발생하자 전 미국인들은 석유금수의 영향을 체험하게 되었다. 이에 미 국민들은 아랍 국가들의 요구를 수용하기보다 상당한 손실을 감수하더라도 미국의 리더쉽을 지킬 것을 요구하게 되었다.

여론조사나 평론, 독자투고, 토크쇼, 할리웃 영화를 통하여 아랍을 비난하는 분위기가 대세를 이루었다. 미국인들의 이스라엘에 대한 동정심은 석유금수 기간 중에는 증가하나, 금수가 종료되면 감소하는데, 1967년의 석유금수 때도 같은 경향을 보였다. 심지어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은 석유금수를 ‘갈취’라고 극단적인 표현으로 비난하였다. 미국이 페르시아 만 지역을 점령하여 관리해야 한다는 요구가 있었던 것도 분명하다. 최근에 비밀해제된 영국의 문서에서는 미국이 실제로 점령 계획을 검토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사우디아라비아는 석유금수에는 미온적인 입장이지만 지금까지 모든 석유금수에 참가한 기록을 갖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지난 1973년의 석유금수에 가장 늦게 참여하기는 하였으나 석유 무기화에는 반대 입장을 견지해 왔다. 그러나 사우디와 동맹들은 막대한 댓가를 각오하고 석유금수를 선택하였다. 그들은 소비국의 대외 정책을 변경 시키지 못할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징적 가치로 인하여 제재에 합류하게 되었다. 석유무기화가 국내에 미치는 상징성은 OAPEC 회원국 뿐만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에게도 매우 가치 있는 것임이 확인되었다. 석유 무기화는 아랍국 가들에게는 국내의 정치적 문제와 민중 소요를 잠재우고, 대중의 분노를 흡수하였으며, 극단주의자들이 석유시설을 파괴하는 구실을 제거하였다. 즉 상징적인 석유금수는 세계 경제의 대동맥을 통한 석유의 흐름의 연속성을 보증하는 것이었다.

독특한 석유금수

1973년의 석유금수는 몇 가지의 정치적, 경제적, 자연적, 기술적 요인들로 인해 독특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 요인들이 상호 작용하여 과거의 금수조치에 비해 많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여졌으며, 석유무기화가 성공을 거둔 것으로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는 대상국들의 대 이스라엘 정책을 변경시키지 못했다. 아랍과 이스라엘의 대립은 계속되고, 팔레스타인 인들은 여전히 수 개국에 흩어진 난민캠프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은 무기와 첨단 군사 장비로서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을 계속하고, 아랍 국가들은 여전히 경제 개발에 필요한 기술과 전문지식 부족을 겪고 있다.

1973년 석유금수는 미국에 국가주의를 고취시켰다. 미국인들은 석유 무기화를 자신들의 주권, 존엄, 생활 방식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였다. 아랍 산유국들은 석유무기화의 한계를 인식했지만, 국내 여론에 영향을 미치고, 정치적 비판을 무력화 하며, 아랍 세계에서 자신들의 위상 강화 등을 주 목적으로 석유 무기화를 감행하였다.

몇 가지 요인들로 보면 현재 아랍 국가들은 상징적 가치가 충분히 무르익지 않는 한 또 다시 석유금수를 취하지 않을 것으로 여겨 진다. 향후 어떠한 석유금수도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할 것이다. 소비국들이 입는 경제적 피해는 석유금수와 연계되는 생산감축, 감산량, 감산기간에 좌우될 것이다. 만일 생산이 지속된다면 금수 대상국가의 석유부족은 다른 곳으로부터 물량이전에 의해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석유금수가 생산감소와 병행된다면 원유가격은 적과 동지 구별 없이 세계 어느 곳이나 상승할 것이다.

석유생산이 완전히 중단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한 생산 중단은 기술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비싼 댓가를 요한다. 아랍 국가들의 석유收入 의존도는 미국의 석유 輸入 의존도 보다 높다. 미국과 동맹국들은 원유 輸入수입 없어도 전략석유비축(SPR)을 사용하여 6개월을 지탱할 수 있는 반면, 산유국들은 석유판매 收入 없이 그렇게 오래 버티지 못한다. 미국과 동맹국들은 경제적, 군사적으로 보복할 것이며, 더구나 ‘예방적 선제공격’의 부시독트린에 비추어 볼 때 가능성은 더욱 농후하다. 그러나 군사력의 개입은 최근 수개월간 이라크의 사례에서 보듯이 석유의 공급 안보를 보장하지 못한다.

석유금수로 얻어지는 경제적 효익은 오래가지 못한다. 1970년대의 고유가는 결과적으로 非OPEC의 점유율 증대와 소비국의 석유 소비 감소를 가져 왔다. 에너지 절감, 연료 대체, 소비 효율 개선은 석유 수요를 감소시켰고, 결과적으로 유가 하락과 석유 판매 收入의 감소를 초래한 것이다.
산유국의 상징주의와 소비국의 국가주의 결합은 아랍 산유국들이 또 다시 석유금수를 취할 가능성을 예고하고 있는데, 산유국들은 금수대상 국가의 정치적 태도를 변경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들의 상징주의의 가치가 매우 높다고 믿을 때 석유무기화의 유인을 느낄 것이다. 상징주의의 가치는 일부 산유국들의 지도자들이 미국과 이스라엘의 정치적 행위에 대해 적절한 대응을 하지 않음으로서 국내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지위가 위험에 처한다고 느껴질 때 가장 높은 수위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현재 중동지역의 불안정한 상태와 아랍 민중의 대서방 반감 수준을 고려할 때, 석유 금수의 개연성은 매우 높다. 지난 1967년과 1973년의 석유금수를 유발시킨 이유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럼에도 한가지는 분명하다. 즉, 현재 상황은 1973년에 비해 아랍 산유국들이 석유금수를 취하기에는 문턱이 높다. 그러나 중동에서 사태가 악화되어 급진 정부가 들어선다면 문턱은 급격히 낮아 질 것이다. 급진 정부는 특히 미국과 동맹국들이 자신들로부터 수입금지를 취할 경우 석유무기를 자유로이 사용하고, 전례 없는 수준으로 감산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상상이 가능하다.

이러한 이유로서 미국과 동맹국들에 대해 훨씬 심각한 석유무기화의 가능성이 있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이 올바른 전략이다. 책임 있는 정부는 석유무기화 사용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에서 사태 악화는 일부 국가의 무책임한 정부에게 힘을 실어 주게 될 것이다. 그들은 세계는 물론 자신들에게도 치명적인 영향을 초래할 석유무기화를 시도하려 할 것이다. 따라서 석유를 무기로서 사용하려는 유혹을 사전에 제거하기 위한 조건을 성숙시키는 것이 산유국과 소비국 모두에게 이롭다. 이 조건이란 단순하게 말해서 미국이 확고한 노력을 기울여 팔레스타인 지역의 평화를 증진시키는 것이다. 석유무기화를 사용하는 것은 특히 장기적으로 미국과 서방국가들을 이롭게 한다. 왜냐하면 정치적 불안이 가라 앉고, 대중의 분노를 다른 곳으로 돌리며, 아랍의 석유시설에 대한 사보타지를 저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랍 산유국들이 현재 상징적인 석유금수 조치를 취할 의사가 없고, 과거에 미국 등에게 피해를 주고 아랍의 권리를 회복하기 위한 재래의적 석유 무기화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것이 오늘날 다른 의미의 효과적인 석유무기(파이프라인과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수단, 예멘 등의 석유시설에 대한 공격)로 변질됐는지 모른다. 석유 무기화는 진화하여 왔고, 강력해 졌으며, 발생 빈도가 잦아 졌다. 그렇다면 이러한 물음이 유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미국은 현재 페르시안만 지역의 석유시설에 대한 사보타지를 최소화시키고, 향후 세계 시장에 대한 석유 공급을 담보하기 위하여 아랍의 상징적 석유 금수를 암묵적으로 조장해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