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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롱베이 가는 길의 한국 유조차

노시경 | S-Oil 주식회사 수급계획팀 과장

차창 밖의 하늘에서는 계속 빗방울이 쏟아지고 있다. 아침에 확인한 일기예보로는 하노이 인근에 3일 동안 비가 계속 올 것이라고 한다. 할롱베이(Ha Long Bay)에도 지금 비가 온다고 하는데, 비 때문에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선다. 그러나 할롱베이는 해의 각도와 계절에 따라 경관이 달라지며, 비가 내리거나 안개가 끼면 더욱 낭만적으로 변한다고 한다. 내 눈앞에도 오늘 날씨에 맞는 할롱베이의 정경이 펼쳐질 것을 기대하면서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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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 시내에는 우리나라에서 사용되다가 방금 수입된 듯한 중고차들이 수도 없이 굴러다니고 있다. 광화문을 거쳐 신촌을 간다는 이정표를 단 버스와 서울의 속셈학원 미니버스가 하노이 시내를 헤집고 있다. 베트남 사람들은 한국에서 사용하던 멀쩡한 중고차들을 수입하고 있는데, 차창 밖에 적힌 한글을 전혀 지우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선진국’인 한국에서 온 차량이라는 사실을 밝혀주는 한글을 굳이 지울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할롱베이로 가는 승용차 안에서도 한글이 적힌 차량들이 무수히 지나간다. 우리 차 바로 앞으로 한글이 박힌 유조차 한 대가 지나가고 있다. 운전을 하는 베트남 친구 늑(Nuc)이 저 차는 한국의 정유회사에서 사용되던 차라고 한다. 회사에서 수급업무를 보면서 거의 매일 통화하는 경쟁사의 이름이 박힌 유조차였다. 베트남 친구에게 저 유조차는 내가 다니는 정유회사와 경쟁사라고 했더니, 조심스러운 듯이 말문을 닫는다. 사실, 그 경쟁사의 수급팀과 내가 소속된 에쓰-오일의 수급팀 간에는 많은 협력도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그가 알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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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유조차는 어디에서 생산된 석유제품을 수송하고 있는 것일까? 동해가스전이 최초로 개발된 우리나라에 비하면, 베트남의 석유 매장량은 풍부한 편이다. 베트남은 남부해안도시 붕타우(Vung Tau) 동쪽 144km 떨어진 해상에 자리한 4,635㎢ 면적의 유전에서 매일 석유가 쏟아지고 있다. 베트남의 원유 정제기술은 발달하지 못했고, 가스개발은 베트남의 관료주의적인 관행으로 인해 발전이 아주 늦다고 한다. 우리나라로부터의 수송거리가 중동의 절반수준에 불과한 이 베트남에서 더 많은 석유가 발견되어 우리나라에 더 많이 도입될 수 있다면 수송비도 크게 절감되지 않을까?

우리가 탄 차는 한국산 유조차를 제치고 쫑 두옹(Chuong Duong) 다리를 통해 홍(Hong) 강을 건넜다. 하노이의 시가지는 강을 건너서도 한참동안이나 이어졌다. 차들이 뜸한 4차선 고속도로를 시원하게 달리던 우리의 차가 일반도로로 들어섰다. 늑은 좁은 길에서 우리 차 앞의 트럭들을 추월하느라 정신이 없다. 우리나라와 달리 승용차가 뒤에서 경적을 울리면 트럭들은 순순히 길을 비켜준다. 길가의 논에서는 농부들이 베트남 삿갓인 논(Non)을 쓰고 모내기를 하고 있다. 산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광활한 이 곳의 논은 참으로 풍요로움을 자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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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롱베이가 가까워져 온다는 사실은 차창 밖으로 카르스트(karst)의 절묘한 산 모양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빗줄기는 묘하게도 할롱베이가 가까워오면서 가늘어지다가 할롱베이 입구인 바이차이(Bai Chay)에 도착하자 뚝 그쳤다. 바이차이에는 예쁜 어선들이 편안히 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새로 개발되는 바이차이의 리조트는 베트남이 과연 사회주의 국가인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자본주의의 냄새가 강하게 풍긴다.

베트남 남부의 앞 바다에서 석유가 나온다면, 이 베트남 북부 앞 바다는 숨막히는 절경을 구경하려는 세계 각 국의 여행자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할롱베이 유람선 선착장은 각 국에서 온 여행자들로 붐비고, 베트남 여행자들은 단체로 온 사람들이 많다. 이곳에서는 여행자들이 많아서 단체 선박을 함께 대절하기 때문에 그 비용도 그다지 비싸지 않다. 우리는 원래 15인승 배를 빌리려고 했다가 이 작은 배들이 모두 출항하고 없어서 2층 짜리 배 한 대를 통째로 전세 냈다.

바이차이 인근 바다 주위에는 많은 선박이 왕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모 항공사의 광고에 보이는 베트남의 전통 목선(木船)은 아쉽게도 이 선착장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 멋들어진 목선은 광고를 위한 연출이었던 것이다. 현재 운행되는 배들의 위 부분만 살짝 고쳐서 돛을 달면 전통 목선의 분위기를 한껏 낼 수 있을 텐데 조금 아쉽다.

드디어 배가 할롱베이의 바다를 향해 앞으로 나아간다. 베트남에서 가장 빨리 관광개발이 시작된 할롱베이는 비취색의 고요한 수면에 크고 작은 2천 개 이상의 섬들이 기암괴석으로 솟아 있어 환상적인 풍경을 빚어낸다. 은하수를 닮은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섬들과 에머랄드 빛 바다를 자랑하는 할롱베이 국립공원은 인공의 동양화를 압도하는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 할롱베이의 환상적인 풍경은 ‘인도차이나’와 ‘굿모닝 베트남’ 등의 영화 속에도 녹아 들어있다. 영화 ‘인도차이나’`에서 여자주인공 ‘린당팜’이 은신하였던 숨막히도록 아름다운 경치가 바로 이곳에 펼쳐진다.

대자연이 만든 웅대한 드라마인 할롱베이! 홍강 델타 주변의 기묘한 바위들은 약 12만 년 전 최후의 빙하기에 침강되면서 다양한 모양의 섬들을 바다 위에 남겨놓았고, 이 석회암 바위들이 침식해서 할롱베이의 절경이 탄생하였다. 할롱베이의 기암들은 과거에는 모두 바다 밑에 있던 것들이라고 한다.

할롱베이를 둘러보는 시간이 꽤 길기 때문에 우선 1층 선실에 앉아서 늑의 가족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늑의 아내인 우에(Ue)가 스낵 과자와 함께 열대과일인 롱안을 준비 해 와서 선실에 앉아 함께 까먹는다. 우리가 배를 빌린 데 대한 보답으로 우에가 먹을 것을 준비해 온 것이다. 어른들과 놀다가 심심해지면 화장실 간다는 것을 핑계로 밖으로 나가기 좋아하는 딸아이가 역시 배의 화장실이 어디 있는지 함께 가보자고 한다. 화장실은 1층 선미의 좁고 아슬아슬한 갑판을 걸어가자 나온다.

갑판으로 나온 김에 배의 2층에 올라 딸 녀석과 본격적인 할롱베이의 주변 절경을 만끽하였다. 종유 동굴이 있는 섬의 선착장을 출발하여 20분 정도 지나자, 할롱베이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 눈앞에 나타난다. 모 항공사가 하노이 직항편을 증설하면서 광고하는 할롱베이의 모습이 바로 이곳이다. 절경을 즐기려는지 배는 다시 멈춰 섰다. 알고 보니 이 선상에서 식사를 해도 되고 약 10여 채 정도 되는 선상가옥에서 파는 해산물과 과일을 사와서 먹어도 된다고 한다.

식사를 하면서 늑에게 할롱베이의 역사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할롱’은 원래 한자로 ‘하룡(下龍)’인데, 이는 용이 내려 온 곳이라는 뜻이다. 베트남이 옛날 옛적에 외적과 해적의 잦은 침입으로 고통 받을 때 하늘에서 용 부자가 내려와 적에게 여의주를 뱉어내서 외적의 침략을 막았으며, 그 여의주가 크고 작은 기암 괴석으로 변해 그 뒤에도 적의 침입을 막아 주었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그래서인지 섬으로 둘러싸인 이 곳의 바다는 언제나 호수처럼 잔잔하고 고요하다. 물론 옛 베트남인들의 전설이지만, 바다에 나가 섬들의 모습을 보면 흡사 용이 신비로운 기암괴석 사이를 누비고 지나가는 듯 하다.

할롱베이의 전설이 역사적 사실로 나타난 것은 13세기 몽골군의 침입 때였다. 몽골군이 베트남을 침략했을 때 베트남의 쩐홍다오(Tran Hung Dao) 장군이 할롱베이 일대의 지형을 활용해 적을 끌어들여 섬멸했다고 한다. 1287년 말에 원나라 세조는 당시 수륙 30만 명의 대군을 데리고 베트남을 침공하였다. 원나라 군대는 베트남의 수도인 탕롱(Thang Long, 하노이)을 점령하고 많은 건물을 불태웠으나, 할롱베이 앞 바다에서 군량공급 선대가 격파되어 보급로가 끊기자 퇴각하였다. 베트남은 도읍을 포기한 채로 정면대결을 피하고 게릴라 전법을 사용하여, 전세가 호전되면 전면공격을 하였다. 이것이 베트남 역사에 가장 자랑스럽게 기록된 대몽 전투였다. 이 당시 베트남의 쩐(陳) 왕조와 베트남 민중은 외세에 대항하는 가운데에 베트남의 민족정신이 고양되었다고 한다. 해안에서 가까운 종유동굴들은 수세기 동안 해적들의 은신처로도 활용되었고,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는 베트남의 공산주의자들이 숨어들어 게릴라 활동을 펼쳤다고 한다.

푸르고 깊은 아름다움을 간직한 바다에는 전설과 역사적 자랑스러움이 가득하고, 이 전설과 역사에 어울리는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식사 후에 한가로이 시원한 할롱베이의 바람을 맞아본다. 아내는 썬탠용 의자에 앉아 이 절경을 감상하고 있다. 이 배의 선장이 틀어 놓은 베트남 최신가요는 그대로 이 할롱베이의 배경음악이 되고 있다. 딸아이는 우리가 타고 있는 배가 신기해서 배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느라 정신이 없다. 일생 중 흔치 않은 최고 행복감을 느끼는 순간이 바로 이 순간이다.

아쉽게도 배는 벌써 바이차이를 향하여 방향을 바꾸고 있다. 할롱베이를 가슴 깊숙이 담아두기 위하여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해 본다. 점점 바이차이가 눈앞에 다가온다. 할롱베이 4시간 일정이 이렇게도 빨리 끝난다고 생각하니 아쉬움만 깊어간다. 다시 내일의 내 책상에는 에쓰-오일의 수급상황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이 코너는 회원사 임직원의 참여로 이루어 집니다. 생활속에서 일어나는 재미있는 에피소드, 추억 등 감동적인 사연을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