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탐방]
청계천다리와 연날리기
글 : 이홍환 한국 땅이름학회 부회장/국학연구소 이사장
이 글은 서울시가 ‘제8회 서울이야기, 청계천’을 주제로 한 시·수필을 국내외로 기성작가 포함하여 공모한 결과, 총 1,000여편의 작품중 최우수작(수필) 선정된 작품이다. - 편집자 주
청계천은 서울의 주산인 북악의 삼청동 골짜기에서, 그리고 우백호격인 인왕산의 청운동 골짜기에서 발원하여 서울의 중심부인 혜정교(광화문 우체국 근처의 다리이름)근처에서 하나가 되어 서울 중심부를 뚫고 동쪽으로 흘러간다. 흘러간 물은 한내(中梁川)의 중량포에서 중랑천과 합하여 한강으로 흘러드니 살곶이벌(箭串坪:뚝섬)에 3태극을 그리고 있다. 장마철에는 물이 범람하여 민가에 피해를 주곤하였다.
그래서 조선조 영조 36년(1760년)에는 인부 20만명을 동원하여 57일간의 큰 사역을 하여 청계천 바닥을 파냈다는 기록이 있다. 파낸 그 모래·흙은 오늘날 방산시장 자리에다 버려 가산( 山)을 이루었다. 청계천가의 버려진 가산이 흉물처럼 보여, 꽃을 심어 가꾸니 방산(芳山)이라는 땅이름이 생겨났다고 한다. 청계천의 다리기둥에 지평의 표준으로 물의 높이를 측정하기 위한 수표교(水標橋)를 설치했는가 하면, ‘경진지평(庚辰地平)’이라는 글자까지 새겼다.
아예 준천사(浚川司)라는 기관까지 두어 해마다 모래를 파내고 청계천의 뚝을 수축했다고 한다.
조선조말 융희 3년(1909)에는 정부의 보조와 민간의 기부금을 모아 준설공사를 완료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우리 선조들의 청계천 가꾸기가 각별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래서 청계천은 일명 ‘개천(開川)’ 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청계천을 준설은 커녕, 1963년에 큰광통교에서 흥인지문(동대문)근처 오간수다리까지 철근콘크리트로 덮어, 청계천을 질식시키다시피 만들어버렸다. 질식시켰던 청계천이 서울시에 의해 되살아나고 있다. 공룡의 유령같은 고가도로가 헐리고 철근콘크리트로 덮여있던 복개도로가 걷히면서 청계천의 속살이 드러났다. 반가운 일이다. ‘개천(開川)’이라는 청계천이 완전 복원되는 날, 무엇보다도 인구 1천만이 넘는 서울도심에 맑은 물이 흐르는 것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탁탁한 도심의 공해에 해결에 큰 도움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래서 청계천하면 옛날 어린시절, 정월 대보름날 친구들과 함께 광통교에서 수표교에 이르기까지 연을 띄우던 그 연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한다.
장충단 공원으로 옮겨 놓은 청계천의 옛 ‘수표교(水標橋)’ |
청계천 다리위에서 연(鳶) 날리기
청계천에는 참으로 여러개의 다리가 있었던 모양이다. 오늘날까지 다리이름이 그대로 화석이 된채 땅이름으로 남아있는 광교,장교,수표같은 이름이다.
다리모퉁이에 점포가 있었는데서 비롯된 모전교, 도성안에서 가장 넓은 다리로 대보름날 밤에 다리밟기로 질병을 쫓고 무병장수를 기원했다는 광통교, 조선조 개화기에 유대치가 살았다는 장통방의 장통교, 임꺽정이가 다리밑으로 도망쳤다는 오간수다리, 단종과 그의 비 정순왕후와 눈물로서 영영 이별했다는 전설을 지닌 영도교!
정월 대보름날 수표다리위에서 연날리기가 한창인데 왕(인조)이 행차하여 하늘에 펼쳐진 각양각색의 연의 향연을 보고는 왕이 감탄하여 이르되, “오호라! 이연 봐라…, 또 저연 봐라! 아! 요연은 쌍연이네!” 하니, 옆에 있던 신하가 듣기가 민망했던지…, 옆의 동료 신하를 보고 “나랏님(임금)도 입이 퍽 걸죽해…. 아 글쎄, 이연, 저연, 요연, 쌍연이라네”하는 우스갯소리가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청계천 하늘에 펼쳐진 연의 향연! 그 연의 모양도 각양각색으로 반달연, 꼭지연, 치마연, 동이연, 초연, 박이연, 발연, 거북선연, 봉황연, 용연, 호랑이연, 까치날개연, 제비연, 박쥐연, 나비연, 고기비늘연, 가오리연, 접시연, 방사씨연, 편자연, 중머리연, 바둑판연, 방패연들이 있었다. 제각기 자태를 뽐내며 하늘을 수(繡)놓고 있었으니, 나랏님이라도 “이연 봐라! 야! 저연 보아라! 아 요연은 쌍연이네”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을 것이다. 각기 연줄에 사기가루나 유리가루를 풀과 함께 섞어 개미를 먹여 남의 연이 닿기만 하면 베어지게 만들어져 있었다. 그래서 연줄을 풀어가면서 연을 날리는데, 꼬드기기, 얼리기, 윗들기, 밑들기, 튀김주기, 업기, 통줄주기, 살줄주기, 빼내기, 그루박기 등 저마다 다양한 기법이 동원되었던 것이다. 이런 연날리기의 대향연을 구경코자 왕은 물론 시민들도 개천 양쪽으로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개보름이 한 고비가 되고, 대보름이 되면, 액연(厄鳶)을 날린다 하여 연에다 “액(厄)”자를 쓰고 연줄에는 거위의 솜털을 매어 멀리 날리면서 “고고매”라고 외쳤던 것이다. 말하자면 집안에 언제 닥쳐올지도 모를 모든 액(厄)을 이 연에다 실어 보내고자하는 간절한 소망이 깃들어 있었던 것, 세월이여!
단종과 정순왕후…, 영영 이별의 다리 「영도교(永渡橋)」
청계천 복원과 더불어 옛 다리와 더불어 새로 세워지는 다리는 모두 21개. 그 가운데 청계천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다산로」와 「난계길」사이에 「영미길」이 있다. 이 「영미길」이 청계천을 가르면서 「영도교(永渡橋)」라는 다리가 복원된다. 「영미길」에 「영도교」라 어떤 걸림이 있을까. 옛 숭신방(崇信坊: 오늘날 숭인동)에 딸린 영미동에서 비롯된 길 이름이 「영미길」이다.
조선조초 6대 임금인 단종이 그의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돼, 강원도의 첩첩한 산골 영월(寧越)땅으로 귀양갈 때, 단종의 비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가 이곳까지 나와서 부군 단종과 영영 이별하였으므로…, 뒷날 사람들은 왕과 왕비가 영영 이별한 다리, 또는 영영 건넌 다리라는 뜻으로 ‘영도교(永渡橋)’라 불리게 되었다. 성종조에 이르러 뚝섬의 살곶이 다리와 더불어 중들을 동원,
청계천 ‘영도교(永渡橋)’에서 단종과 영영 이별한 정순왕후 송(宋)씨가 낙산 기슭, 산자락에 올라 날이면 날마다 단종이 유폐된 ‘영월’쪽을 바라다 보았다는 동망봉. ‘동망정(東望亭)’ 이라는 정자가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
이 다리를 돌로 크게 중수하고 아예 성종대왕이 친히 ’영도교(永渡橋)’라 명명하였다.
정순왕후 송씨는 부군 단종을 영도교에서 눈물의 이별을 하고는 낙산 기슭, 오늘날 숭인동 17번지 청룡사 옆, 복잡한 세상을 피해, 서울에서나마 부군이 유폐된 영월땅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작은 초가를 마련하니 정업원(淨業院)이다(오늘날 청룡사옆 ‘정업원터’를 알리는 표석이 서있다).
이 정업원에서 정순왕후는 시녀 희안(希安), 지심(智心), 계지(戒智) 등 세 시녀를 데리고 자색 물감을 만들어 팔며 구차한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정순왕후는 날마다 아침 저녁으로 청룡사 동쪽에 솟아있는 봉우리에 올라, 영월쪽을 바라보며 부군 단종의 만수무강을 빌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산봉우리를 동망봉(東望峰)이라 했던가!
「지우고픈 얼굴이 하나 있어/지우려 해도/지우지 못해/내 얼굴만 지우고//그리고픈 얼굴이 하나 있어/그리려 해도/그릴수 없어/내 얼굴만 그리고//그런 내가 싫어/고개 흔들며/눈물 뿌리니/역광에 부셔지는/겨울나무 겨울 숲」
실로 시인 신진식의 「겨울나무 겨울 숲」 의 시를 떠올리게 하는 곳이기도 하다. 단종이 유폐된 영월(寧越)땅이름과 정순왕후와 영영 이별한 영도교(永渡橋)!
영월(寧越)이란 글 뜻대로라면 「편안함(寧)을 초월함(越)」이니, 그 영월땅이 단종에게는 ‘편안히 넘어가는 곳’이 아닌, ‘편안함을 초월한 곳’이 되고 말았다.
또, 정순왕후가 부군 단종을 눈물로 이별한 영도교(永渡橋). 글 뜻대로라면 ‘영영 건넌 다리’이기에 ‘영도교’가 되고 말았으니, 참으로 그 뜻이 우연의 일치라기엔 신기하다. 세월은 가고 역사는 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