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 속으로의 여행

글·구본준 |한겨레신문 기자

‘신화’란 것이 사라진 듯한 이 첨단의 시대에 다시 신화가 되살아나고 있다. 역설적으로 신화가 가장 활발하게 등장하는 분야는 최첨단 전자기술과 인터넷기술, 그리고 가장 상업적인 기술이 총동원되는 분야들이다. 바로 ‘게임’ 분야와 ‘영화’분야다.

21세기형 미래산업이며,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앞선 분야라고 떠들어대는 이 전자 게임에 있어서 ‘신화’는 가장 중요한 소재로 떠오르고 있다. 스타크래프트며 리니지, 뮤 등등 요즘 엄청난 부가가치를 내고 있는 게임들은 하나 같이 ‘신화’에서 소재를 따왔다.

영화쪽도 마찬가지다. 영화사상 최고의 히트상품들인 <반지의 제왕> <해리 포터> 시리즈는 모두 갖가지 신화를 맘대로 버무려 만들어낸 ‘신화 상품’들로, 원래는 문학작품이었으며 또한 영국에서 만들어진 것이란 공통점이 있다. 그러면 왜 영국에서 이 두가지 상품의 원작이 나왔을까?

이 두가지 ‘현대판 신화’들의 모국인 영국은 다른 유럽나라들에 비하면 역설적으로 ‘신화가 없는 나라’다. 그래서 영국 사람들의 신화에 대한 갈망속에서 탄생한 히트상품들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 <반지의 제왕>을 쓴 존 로널드 류얼 톨킨은 신화가 없는 영국사람들에게 새로운 신화를 들려주기 위해 이 거대한 작품을 썼다. 옥스퍼드 대학 교수로 고대 북유럽 신화에 정통했던 톨킨은 영국인들이 놀라워하는 그리스 로마신화에 필적하는 작품을 써보고픈 욕망에 도전했던 것이다. (물론 영국에 신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일랜드의 켈트 신화는 유럽의 3대 신화로 손꼽힐 정도다. 그러나 톨킨이 보기에 그리 영국인들의 마음속에 확실히 자리잡은 고유한 신화가 없었던 탓이었다.)

실제 신화에 조금이라도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반지의 제왕> <해리 포터 시리즈>를 보고 나면 오히려 이 두 작품에 대해 그닥 높지 않은 평가를 내리게 될 수도 있다. 그 이유는 두가지 모두 기존 여러 신화들에서 많은 모티브를 차용해왔거나 아예 그대로 가져다가 버무려 놓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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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절대 반지’의 경우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귀게스’ 이야기에서 나온 희곡 <귀게스의 반지> 이야기와 거의 흡사할 정도다. 이 이야기 역시 신비로운 힘을 가진 반지를 끼우면 사람이 보이지 않게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또한 투명한 힘을 얻게 되면 선한 기운보다는 악의 기운쪽으로 기울게 되는 점도 다른 ‘투명인간’ 이야기들과 다를 바 없는 전통적 문법에 속한다. <해리포터 시리즈>는 그 차용 정도가 훨씬 더 심하다. ‘일각수’ 유니콘이며, 머리가 셋 달린 개 ‘케르베로스’ 등은 그리스 신화의 내용 그대로 가져온 것들이다.

그러나 이런 점들은 오히려 이 두가지 문화상품의 힘을 강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서양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친숙한 신화속 아이콘들이 다시 등장하기 때문에 훨씬 이해가 빠르고 또 그 캐릭터에 맞는 행동을 예측하는 재미가 더해지기 때문이다. 신화가 단순히 오래전 이야기가 아니라 세월을 넘어 계속 사랑을 받게 되고, 또 새로운 생명력을 다시 부여받게 되는 것은 바로 이처럼 후대에서 활발하게 문화적 상상력의 창고로 활용되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신화가 문화적 아이콘과 아이템의 보고가 되는 현상은 문화산업의 힘이 더욱 커진 요즘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신화에 주목한 두 작가에 힘입어 현대인들을 사로잡는 새로운 신화의 조국이 된 영국의 사례는 그 좋은 예다.

이런 흐름에 발맞춰 우리 출판계에서도 최근 들어 ‘신화’라는 코드가 뜨고 있다. 소설가 이윤기씨의 <그리스 로마 신화>가 크게 인기를 모으면서 촉발된 현상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출판시장의 흐름과 문화산업의 변천에 비춰 볼 때 이제 신화가 각광을 받을 시기가 된 측면이 크다. 또한 그동안 신화에 대한 관심이 철저하게 ‘그리스로마 신화’에만 집중되어 있었는데 최근에는 훨씬 더 다양하고 새로운 신화들이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특히 서양 신화에 밀려 사라진 듯 했던 우리 신화와 동양신화 책들이 부쩍 많아진 것은 무척이나 반가운 소식이다.

최근 나온 신화 관련서 가운데 거의 유일한 ‘우리 신화 입문서’인 <살아있는 우리 신화>(신동흔 지음, 한겨레신문사 펴냄)은 특히 돋보이는 책이다. 이 책은 오랫 동안 우리 신화를 추적해온 구비문학 전문가가 다양한 신화들 속에서 우리가 꼭 알아둬야 할 12가지 주제별로 신화를 추려 소개하면서 신화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할 측면들을 넌지시 짚어주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동안 우리 독자들은 정작 물건너 들어온 서양 신화에만 익숙하고 우리가 알아야 할 우리 신화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는데, 이는 독자들의 탓이 아니었다. 출판계에서 먼저 우리 신화를 책으로 펴내지 않았기 때문이었으니까. 그래서 이 책이 더 반가운 까닭이다. 물론 그동안 우리 신화 책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대중적으로 잘 만들어진 교양서는 거의 없었고, 또한 대부분 어린이용 동화책 수준이었다. 그런 점에서 성인 독자들을 위한 교양 한국신화 책은 이 책이 사실상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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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나면 우리나라가 곧 ‘신의 나라’라고 해도 될 정도로 신이 많은 나라임을, 그리고 그 신들이 얼마나 인간적이고 살가운 사람들의 벗인지를 알게 된다. 부엌에 가면 부엌신이 있고, 장독대에 가면 장독신이, 마을에는 마을신이, 나라에는 국조신이 있는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였던 것이다.

<살아있는 우리 신화>에 등장하는 주요 신들은, 그러나 우리만의 신은 아니다. 그 이유는 동북아시아 일대의 여러 민족들이 서로 같은 신화를 공유해왔기 때문이다. 곧 옥황상제나 전쟁신 치우 등은 우리 나라를 비롯해 한족과 만주족 등 모두의 신으로 사랑받고 있는 존재들인 것이다.

신화전문가 김선자씨의 책 <중국신화 이야기>(아카넷 펴냄)은 중국 신화를 중심으로 동북아 여러 신화들을 종합하는 책이다. 우리 바로 옆나라 중국의 문화적 모체가 되는 신화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고 있기 때문에 중국인 특유의 철학과 우주관,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지는 사고방식의 뿌리를 엿볼 수 있다. 단순히 중국 신화의 내용만을 알려주는 데 그치지 않고 비교신화학적, 그리고 폭넓은 인문학적 교양을 함께 들려주고 있기 때문에 일반 교양서로서 쓸모가 큰 책이다.

역시 중국 신화를 주로 다루고 있는 이화여대 정재서 교수의 책 <이야기 동양신화>(황금부엉이 펴냄)도 거의 비슷한 내용의 책으로 중국신화를 간추려 들려주는 입문서다. 소개하는 중국 신화의 의미를 설명한 뒤에는 우리가 잘 아는 그리스 로마 신화와 다시 비교해 맥을 짚어주는 점이 특징이다. 신화의 종가로 받들어왔던 ‘그리스 로마 신화’의 저변에 흐르는 오만한 시각과 남성 우월주의에 견줘 동양권 신화들이 얼마나 자연 친화적이며 평등주의적인지 새삼 느끼게 해주는 점도 큰 미덕이다.

보다 무게감있는 신화책을 원한다면, 그리고 개별 신화의 내용이 아니라 ‘신화’라는 것이 왜 중요하며 어떤 가치를 우리에게 전해주는 지 알고 싶다면 한단계 더 수준높은 독서가 필요하다. 우선 ‘일본 최고의 인문학자’로 불리며 일본 문화계 최고의 스타로 군림하고 있는 나카자와 신이치 교수의 책들이 눈여겨볼만 하다.

신이치 교수는 쉽게 말해 우리나라로 치면 이어령 교수나 도올 김용옥 교수 같은 ‘스타 학자’인데, 그 전공분야가 바로 신화와 종교쪽이다. 신화와 종교를 바탕으로 예술, 과학, 경제학 등 수많은 분야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종횡으로 꿰어 독창적 견해를 들려주고 있어 국내에도 많은 골수 팬들을 거느리고 있다. 신이치 교수는 특히 도쿄대에서 종교학을 전공한 뒤 네팔로 건너가 티벳 승려를 스승으로 모시고 3년여 동안 전승 밀교를 연구하고 수행한 독특한 경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신이치 교수의 책 가운데에서는 우선 국내에 가장 먼저 소개된 <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동아시아 펴냄)이 그의 독창적인 세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신이치 교수는 인간의 사고를 규정짓는 원형질이 신석기 시대에 만들어진 ‘신화적 사고’라고 본다. 지금 우리가 첨단 과학과 최신 이론으로 무장하며 엄청난 지적 발전을 한 것처럼 여기지만 실제 이런 모든 사고의 바탕에는 이 ‘신화적 사고’가 깔려있다는 것이다. 또한 신화는 사회구조 변화에 맞춰 따라서 변하게 되는데 그러면서도 그 속에는 인종과 민족, 대륙을 뛰어넘는 공통의 흐름이 있다고 한다. 신이치 교수는 그 증거로 바로 우리가 너무나 잘아는 ‘신데렐라 이야기’를 든다.

뜻밖에도 신데렐라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유리 구두’는 신데렐라 이야기에서 처음 나온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신발을 두고 사라진 주인공을 찾는 이 이야기 구조는 세계 각국 곳곳의 설화에 모두 존재하는 것이며 심지어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이야기 속에서도 발견된다. 그리고 뜻밖에도 가장 오래된 이 이야기는 중국에서 발견된다고 한다. 신이치 교수는 이 간단한 이야기 하나를 갖고 실로 깊고 풍성한 사유의 세계를 펼쳐 보이며 우리가 신화에 대해 몰랐던 부분들을 일깨워 주고 있다.

그의 책으로는 역시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신화책 <곰에서 왕으로>, 신화적 사고와 불교의 관계를 통해 종교와 철학, 신학을 아우르는 교양 강의록 <불교가 좋다> 등이 국내에 소개되어 있다.

신이치가 기본적으로 동양적 사고를 바탕으로 신화를 바라보는 학자라면, 서양식 사고로 신화를 해석하는 최고 권위자는 단연 신화학계 최고의 스타 학자인 조지프 캠벨을 꼽을 수 있다. 문학적인 문체로도 유명한 캠벨은 소년시절 미국 원주민 신화와 유럽의 아더왕 전설이 놀랍도록 비슷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신화의 세계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그의 대표작은 까치에서 펴낸 <신의 가면> 시리즈다. 세계 각국의 다양한 신화들을 관통하는 인류 보편의 공통분모를 추적하는 책인데, 분량이 4권이나 되고 내용이 만만찮은 편이다. 그래서 ‘이야기꾼’으로서의 캠벨의 면모를 만나볼 수 있는 책 <신화와 함게 하는 삶>(한숲 펴냄)이 입문자들에게는 더 적합한 편이다.(물론 소설 읽듯 쉽게 술술 읽을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곱씹으며 잘 생각하며 읽을 필요가 있다.) 이 책은 신화에 대한 수준높은 에세이집으로 왜 인류가 신화에 매달려왔고, 신화는 어떤 기능을 해왔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특히 인도의 요가와 극동아시아의 선 사상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점에서 흥미롭다.

마지막 하나 더. 진정 신화에 관심이 많다면, 또는 신화에 대해 진짜 손꼽히는 고전 중의 고전을 하나 만나보고 싶다면 꼽을 만한 책이 있다. 바로 제임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여러 판본이 있어 국내에서도 여러곳에서 나왔는데 한겨레신문사에서 낸 것과 을유문화사에서 낸 것이 가장 많이 팔리고 있다.)

이 책은 그야말로 세계 각국의 신화들을 풍성히 수록하면서 신화학의 기본원리를 담고 있는 신화학 최고의 고전이다. 수많은 서구 지성들이 이 책의 영향을 받아 특히 유명한데, 그 내용이 실로 방대한 편이어서 국내에서 나온 책들은 축약본인데도 900쪽에 이른다. 너무 두꺼워 질리게 만들기도 하지만 부담없이 아무부분이나 펴서 읽어도 되는 것이 또한 이 책의 장점이기도 하다. 인간 상상력의 가장 푸짐한 창고를 열어보고 싶다면, 정말 신화에 한번 제대로 빠져보고 싶다면 이 책 이상의 고전은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이야기다.